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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Sep 06. 2023

<피기>, 소녀 살인마의 성인식


복수극의 윤리에 대한 오래된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매력적인 스릴러-성장-페미니즘-슬래셔-로드 무비로서의 장점은 명쾌히 빛나는 이 영화는 (왓챠 기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성인 남성에 의한 소녀들에 대한 폭력, 과시적인 가학성의 전시, 갑작스럽고 연유를 알 수 없는 로맨스의 시작, 미지근하고 갈팡질팡하는 주제 의식(정말?)이 비판의 주된 이유로 거론되지만 거의 동일한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본즈 앤 올>이 받았던 예찬의 수준을 생각해보면, 왜 이 영화만 유독 혹평 일색인지를 곰곰 생각하게 된다.

당신이 <본즈 앤 올>의 로맨스 - 똑같이 혼란스럽고, 갑작스럽고, 오로지 ‘같은 종족’이라는 동질감만으로 촉발된 - 에는 몰입했지만 이 영화는 좋아할 수 없었다면 혹시 아름답지 않고 수시로 팻셰이밍 당하는 소녀에게 즉각 이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은 아닐까. 좀 더 거칠게 말하면, 급이 나뉘고 싶어서. 쟤와 나는 생김새부터 너무 다르고 그러니 이해할 의지나 여력이 생기지 않아서.


현대 사회의 미적 기준에서 뚱뚱함은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이다. 살집은 게으름, 관리되지 않음, 병과 가난과 불결함과 고립의 이미지와 직결된다. 특히 그 어떤 성연령 집단보다 가장 심한 외모 강박 하에 놓이는 어린 여성의 뚱뚱함은 용서받지 못할 죄다. 젊지만 아름답지 않고 보기 좋게 마르지 않은 사라는 누구에게나 조롱받을 수 있다. 사라를 동정할 수는 있어도 그애가 내가 될 리는 없다고 무심결에 생각하는 관객과, 한때 사라의 친구였으나 이젠 아닌 클라우디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혹은 사라에게서 자신의 일부를 보았기 때문에 더 격렬히 그를 밀어내는 관객도.

우리 같은 사람들의 경멸과 배척의 눈빛을 하루하루 견디며 섬세한 사라는 아마 단 한 명의 이해자라도 자길 도와주길 빌었을 것이다.



사라의 소망은 가장 극적인 형태로 이뤄진다. 사라와 똑같이 배가 나왔고 먹을 것을 탐닉하나 사라보다 훨씬 강경하고 폭력적이고 압도적인 물리력을 지닌 구원자 성인 남성이 돌연 나타나 조건도 없고 이유도 없는 사랑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사라의 식욕과 분노를 이해하고 사라에게 아낌없이 간식을 사주며 ”괜찮아?“라는 제법 상냥한 물음을 제공한다. 그건 모두 사라가 살면서 맛본 적 없는 다정. 하지만 살인마는 물론 사라의 소원의 크기 따위 능가한지 오래고, 그애의 가족까지 때려가며 사라를 그 집에서 빼내기도 한다.


사라는 성적으로 욕망당하지만, 욕망당하기만 하는 다른 여자애들과 달리 동시에 조롱당한다. 그리고 사라의 욕망은 가치없거나 숨겨야 할 것으로 치부된다. 제 방에서 자위할 땐 최초의 섹슈얼한 암시를 먼저 건넨 남성이 연쇄살인마 단 한 명뿐이라 어쩔 수 없이 그를 떠올렸다지만, 사라가 이전에 진정으로 염원한 것은 잘생기고 사연 많은 (그조차도 참 전형적인 폭력 가장 이슈) 동급생 페드로였을 것이다.

그러니 우여곡절 끝에 홀로 된 사냥꾼으로서 사건을 해결한 - 그리고 뻔하게도 극의 절정에서 생리가 터짐으로써 ‘여성됨’을 증명한 - 사라가 마을 밖에서 만난 것이 백마 대신 하얀 오토바이를 탄 페드로임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사라의 이상이었던 페드로가 이젠 아무것도 아니고, 사라는 마을로 돌아갈 것이라는 (로드무비적 속성) 확인이 영화 속에서 마지막으로 필오했으니까.

이제 페드로는 사라를 구할 수 없고 구할 필요도 없다. 살인자가 사라와 동일시 되기 위해 살인을 종용한 것에 따르지 않고 모든 일을 제 입맛대로 결말 지은 사라 역시 페드로의 등에 기댈 필요가 없다. 사라는 페드로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세상을 이미 깨우친 다음이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자,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자기 원수의 살인범이었던 초자아적 인물을 하나 깨고 껍질 밖으로 나옴으로써.


그는 사라의 성인식이었다.



사라는 (남의 손을 빌려) 복수도 했고, (남의 손을 빌리길 거부함으로써) 넓은 아량으로 용서도 했고, 악을 처단한 영웅까지 되었다. 설명되지 않고 개연성도 없어서 자연재해에 더 가까웠던 살인마 남성의 애정은 그의 죽음으로 소멸했고 사라와 친구들은 다시 안전해진다. 그리고 그가 있기 전보다 후에 사라의 삶이 더 꿋꿋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라는 이제 자존을 배웠으니까. 사라에게 그는 트라우마틱한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선물처럼 기억되리란 예감이 든다.


가족 내에서의 정서적 고립, 여성 또래집단이라 더 가혹해지는 외모 평가나 따돌림은 실상 훨씬 다층적인 문제인데 좀 납작하게 다뤄진 듯해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흔치 않은 ”살찐“ 사춘기 여성이 그 살로 인해 시작되는 한여름 성장 드라마를 슬래셔와 접목해 그린 독창성은 칭송해 마땅하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로시, 마카, 클라우디아처럼 전형적으로 마르고 예쁜 여자애들이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무슨 소리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평 일색이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의 메시지와 전달법과 연출이 정확히 같았더라도. 그 마른 여자애들의 신체 이미지는 우리 눈에 익숙하니까. 사라처럼 익숙하지 않은 것을 처음 메시지화할 때는 언제나 거칠고 투박하고 소요가 많고 쓸데없단 평이 함께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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