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젊고 홀로 된 아빠 - 혼자 너무 철든 딸의 관계는 가족 서사 영화에서 가장 흔하며 대체로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은 조합이다. 아빠가 철이 없으면 없는 대로 아이와 충돌하며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드물게 철든 이라면 (보통 이 경우 아빠의 직업이 경찰, 소방관, 교사 또는 정치인으로 자주 그려지는데) 한 사람을 키우는 일의 딜레마와 외로움에 대한 고찰을 강조할 수 있으며, 아이가 좀 더 큰다면 갈등의 사이사이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연상시킬 긴장을 끼워넣기도 편하다.
그래서 아이에게 널 많이 사랑한다는 편지를 남겨줄 만큼은 철들었으나 여전히 흔들리며 울어야 하는 외로운 뒷모습을 아빠의 초상 삼은 <애프터썬>이나, 아빠가 아닌 매춘하는 싱글맘 쪽이 어리고 철없는 양육자 롤이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울림에 비해 <스크래퍼>의 면면은 조금 전형적이고 예상 가능한 것으로 느껴진다. 엄마를 잃고 혼자 남아 스스로를 키우는 조지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생부 제이슨은 모로 보나 믿을 만한 어른이 아니다. 탈색모에 트레이닝복, 건들대는 말투, 사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서투름, 자전거 절도를 말리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태도. 30세 언저리인 그의 미숙함은 딸 조지에게 보통 불신과 탐색의 대상이 되지만 결국 ‘친구 같은 아빠’의 가능성을 확실히 보장할 단서가 되기도 한다.
결말에서 둘은 <애프터썬>이나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충격적인 비극의 뒷맛을 남긴 것과 달리 꽉 닫힌 해피엔딩을 맞는다. 조지는 돌봐줄 어른이 필요하단 걸 인정하며 아빠를 용서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제이슨은 여태껏 없었던 피보호자에 대한 책임감을 되새기는 식으로. 대안 가족에 대한 상상은 어려웠을까 아쉬움을 품고 생각해 보지만 현실적으로 조지는 부양할 어른이 반드시 필요한 12세고, 유일한 친구인 알리 역시 이민계 가정의 사정이 빤한데 남의 아이를 하나 더 돌보기는 어려운 상황일 테다. 그러니 지극히 혈연에 기반한 가족주의, 용서와 화해 그리고 상호 돌봄으로 회귀하는 결론도 이해는 된다.
어른스러운 미성년이 용기 없는 성년에게 먼저 다가가게 한 방식의 게으름이나, 제이슨이 조지에게 소리 질렀던 일에 대해선 사과 없이 넘어가는 찝찝함 역시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류의 감성으로 이해하면 될 일. 최소한 제이슨과 조지 사이에는 권위 대신 우정이, 단단한 보호 대신 같이 흔들리는 성장이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
이해는 가지만, 퍽 만족스럽기만 한 진행법은 아니다. 이미 여기저기서 언급되는 <애프터썬>, <플로리다 프로젝트>, 그리고 <스크래퍼>의 따뜻함이 지닌 유사성보다는 이 영화가 아이의 애도를 그리는 방식에 더 흥미를 느꼈던 이유도 그래서일 테다. 이 애도와 관련해 앞선 레퍼런스가 특별히 하나 더 떠오른다면 바로 <가가린>이다. 곧 철거될 아파트와 함께 엄마에게서 버려진 소년 유리가 낡은 기물들과 철근 속에서 자기만의 우주선을 구축하는 과정은, 조지가 길에서 훔치고 주워온 것들로 바벨탑을 쌓아 엄마가 있는 천국까지 닿아보려는 시도와 겹쳐진다.
엄마가 두고 간 것이라면 소파에 쿠션을 놓는 방식 같은 사소한 것까지 죄다 집착하는 조지. 엄마가 자기에게 준 티셔츠라서 세탁하기도 아까웠던, 맘대로 생겨먹은 스포츠 저지 티는 알고 보니 제이슨이 18세의 어린 커플 시절 엄마에게 남긴 것이었다. 그때부터 제이슨과 조지 사이에는 이 보들보들한 직물을 매개로 한 구름 같은 친밀감이 생겨야 마땅할 것 같은데 신예 감독 샬롯 리건은 진부한 전개를 과감히 제거하고 대신 총알과 스마트폰, 자전거 부품과 같은 일상-비일상의 금속성 사물들로 애도의 질감을 확장시킨다.
파손된 자전거와 전자기기 부품들. 제이슨이 어릴 적 주웠던 총알. 물 새고 고장난 세탁기. 엄마의 음성이 들어있는 각자의 스마트폰. 주운 체했지만 실은 반짝반짝 새것이었던, 제이슨의 12년 간의 미안함을 메워줄 조지의 생일선물 팔찌. 아끼던 이의 물리적 상실을 극복하려는 그간의 영화적 시도들은 주로 꿈으로, 대화로, 사람의 온기로 이루어져 왔는데 <가가린>과 <스크래퍼>는 이렇게 극복도 신체적/물리적/금속성 지표들에 기대고 있다. 조지와 유리 같은 아이들에겐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었다는 듯한 영화적 태도가 한층 더 안쓰럽고 귀엽고 처절하다.
따뜻하고 정다워야 할 이야기의 진부함을 파괴하고 싶다는 듯, 중간에 냉동된 것처럼 차갑고 딱딱한 무언가를 무심히 끼워 넣는 샬롯 리건의 신기한 재주는 소재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부러 형식적 흐름을 끊으며 등장했던 주변인들의 인터뷰 푸티지는 극 속으로 매끄럽게 녹아들고 (조지는 자기 친구가 될 수 없다던 라일라가 이유 모를 호기심을 드러내거나, 아무리 그래도 학교는 나와야 한다며 문제아 취급하던 선생님이 막상 조지를 마주치자 어쩔 줄 몰라하며 ‘허그라도 할까?’하는 장면), 집거미들의 알리-조지에 대한 대화는 정말이지 현대적으로 키치한 숏이다. 연출자의 다음 필모는 조금 더 길어도 좋겠다(!)는 드문 감상까지 든다.
<슬픔의 삼각형> 주연이었던 해리스 디킨슨이 반복하는 이미지 - 주로 전형적으로 머리 비고 아무 생각 없고 철도 없는데 찌질하고 귀여운 동네 양아치 백인 남성 -도 흥미롭고 그가 그 범주 내에서 최대한 다양하게 역할을 바꿔보려는 것 같아 역시 행보가 기대된다. 이 영화로 장편영화 데뷔한 아역 롤라 캠벨(조지), 알린 우준(알리)의 능청맞고 자연스러운 연기도 좋다. 아이들은 정말 많은 걸 알고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