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Sep 20. 2023

<마스크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모미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를 지키는 게 꼭 나를 지키는 것 같았다."


7년 전쯤 웹툰 <마스크걸>을 본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까?


​​


그 시절에 모미는 나였고 내가 모미였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대놓고 다리를 훑는 시선에 화냈더니 처음에는 안 봤다며 잡아떼더니 나중엔 "다리가 예뻐서 좀 볼 수도 있지 할아버지 뻘한테 싸가지 없게 굴면 쓰냐"부터 "어른이 예쁘게 봐주면 감사합니다 해야지"까지 나가던 노인 남자. 버스에서 다른 여자를 불촬하길래 피해자에게 조용히 알리고 둘이서 경찰을 불렀더니 끝까지 "내가 저런 년 사진을 왜 찍냐"고 화내던 (결국 기소된) 50대 남자. 전시회에서 10대 여학생들 사진을 찍은 또 다른 30대 남자. 시위에 난입해 자기는 마스크에 선글라스로 온 얼굴을 가리고서는 우리 사진을 찍어 커뮤니티에 올리던 그보다도 젊은 남자들. 조롱의 말들. 공개 법정에서 피의자에게 우호적인 증언을 한 어떤 공직자를 두고 "예쁘지도 않은 년이 생긴 대로 논다"고 분노하던 남성 비율 80%의 댓글들. "(자기 지지 정당의) 누구는 참하고 예쁘고 며느리 삼고 싶은데 (반대 정당의) 누구는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었다"던 정치 팬덤 내부의 말들. 정치판에서의 성폭력 고발에 대고 정당 무관하게 "너 같은 년 줘도 안 먹는다"고 주장하던 역시 남성 비율 80%의 댓글들. 욕망하고 동시에 괄시하는 시선들. 외모를 평가하고 깔아뭉개면 기가 죽으리라 예상하던 악의들.


같은 반 여학생 좀 그만 괴롭히라는 말에 급발진해서 "좋아하지도 않는데 뭘 괴롭히냐 내가 쟤처럼 볼륨 없고 못생긴 애를 좋아하겠냐"고 고함지른 10대 시절의 어떤 남학생. "a는 키가 너무 크고 b는 눈이 작아서" 못 사귀겠다던, 자기와 전혀 사귈 생각조차 없던 당사자들을 바로 앞에 두고 평가하던 대학교의 남자 선배들. 몇 번이고 고백했다가 차이고서는 네가 감히 날 차냐고 위협적인 ‘농담’을 하거나 너희 동네 쪽으로 눕지도 않는다고 허세 부리던 남자 동기. 학생 대표자로 나온 누군가를 두고 "c가 존나 예쁘긴 하지 근데 미친년이지"라면서 그가 들고 나온 의제들은 너무 교조적이라 자기 여친감으로 맞지 않는다던 다른 남자 동기들. 모두 다 한때 친구였던 사람들.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에서의 어쩔 수 없는 침묵들. 여자들끼리 몰래 오가던 시선들.


50대 여배우 A를 두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숱이 너무 없어서' 나이 든 게 티 난다던, 영화 자체와는 전혀 무관하던 어떤 여자의 코멘트. 튼튼한 발목을 살집 없고 연약한 발목으로 만들어준다는 성형외과의 몇십 만원짜리 주사 광고들. 승마살이니 승모근이니 뭐니를 없애야 하고 미백 주사와 왁싱으로 뽀얀 피부를 보여줘야 하고 눈썹을 넘어 입술 화장도 타투로 처리하라고 은근하게 권하는 광고들. 바로 그걸 듣고 보는 순간부터 신경 쓰기 시작하는 여자들.

그 모든 여자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들을 지키는 게 꼭 나를 지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모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미는 마냥 당하기만 하는 여자가 아니다.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종종 모미 그 자신도 '순결한 피해자' 코드의 면면을 탐닉하고 동경하지만 절대 그 삶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애초에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대신 모미는 비열하고 저열하다. 모미는 즉흥적이고 이기적이다. 모미는 욕망하고 질투한다. 모미는 끈질기게 따라붙다가 정 갖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부순다. 모미는 음해하고 날조한다. 모미는 사냥하고 포식한다. 모미는 우발적 살인의 가해자이며 이후에는 의도된 살인, 시신 은폐의 주도자가 된다.

바로 그래서 모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속좁고 음침하고 열등감에 절어 있는 여자, 자기 위의 누군가를 거꾸러뜨려서라도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여자, 눈에 띄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

게다가 누군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남성 가해자에게 어떤 서사도 주어지지 않기를 원할 때 그에게 발언권이 주어지는 것을 너무 여러 번 보아왔고, 동시에 여성 가해자가 그 자신은 어떠한 말도 허락받지 못한 채 오로지 얼굴과 몸과 (그나마) 성장배경을 갖고 도마 위에 오르는 것도 여러 번 봐왔지 않나.


​조주빈과 같이 여성을 대상으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남성들은 피해 여성들에게 사과하는 법이 없다. “여자들이 몸을 함부로 놀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연쇄살인범 유영철)며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조주빈)며 자기 연민을 표현한다. 이 말이나 저 말이나 근간에는 저열한 나르시시즘과 가부장적 지배 욕망의 전시가 있다. 어째서 우리 사회는 처벌이 필요한 가해자에게 피해자를 모욕하는 서사화까지 허락하는가. 홍대 누드크로키 수업에서 남성 모델을 불법 촬영한 여성을 포토라인에 세웠을 때 우리 사회는 그에게 어떠한 말을 허락했는가. 그가 말을 했던가? 기억이 나는가?
여성이 가해자가 될 때 ‘그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서사화하는 보도나 대중 서사를 접해본 기억이 많지 않다.

- 박희정 기록활동가, 주간경향 20.04.06


그러니 <마스크걸>이 공들여 빚어낸 한 '얼굴은 못생겼으나 몸매는 죽여주는' 여자의 삶을, 즉 욕망되고 동시에 욕망하기를 부정당하고 경멸받는 사람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다.

2016년부터 18년경까지 연재된 <마스크걸>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내 인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드라마 <마스크걸>이 가닿은 곳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덜어낼 것과 얹을 것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남감독의 실책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어떤 부분은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해 압축과 생략을 통한 새로 쓰기의 좋은 예라고 말하고도 싶지만. 모미를 연기한 세 배우가 키뿐 아니라 발 사이즈도 동일하단 점이나, 나나-이한별 배우의 목소리를 합성하고 변조해 '마스크걸'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일련의 노력이 읽어지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런 ‘비주얼’의 구현 외에 그가 이 서사에 대해 이해한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의심도 든다.​


생략된 것 중 특히나 아쉬웠던 내용이 원작에서 얼마나 핵심적인 소재였는지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1) 모미(아름)와 춘애(라라, 드라마에서는 미애) 모방과 기싸움


웹툰 시즌2부터 성형한 얼굴로 토킹바에 취직한 모미는 시즌1 회사 시절에 자기 짝사랑을 좌절시킨 예쁘고 얄미운 '아름'의 이름을 따다 쓰고, 본투비 파티걸로 타고난 듯한 '라라'(춘애)를 점차 따라하기 시작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맨 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아양 떠는 일에는 익숙지 않던 모미는 라라의 인생을 훔쳐 쓰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방송 마스크걸과 현실세계 모미의 자아를 합일시킬 방법을 익히게 된다. 남자친구 부용에게 맞고 살기도 힘든데 가게의 단골까지 뺏기게 생긴 라라는 물론 이 꼴을 그냥 두고 볼 리 없고, 둘은 대립하고 경쟁하다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서로를 진실로 이해하게 된다. 웹툰에서도 비극으로 그려진 이 연대는 결국 나쁜 타이밍에 불운이 겹치며 오해를 불러 실패에 이르고, 모미는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사람을 잃는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두 여자는 만나는 즉시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쌍둥이다움'을 수용한다. 이는 어쩌면, 어느새 '여적여'의 오래된 코드를 배격하고 자매애에 가치를 두며 여성연대를 지향하게 된 그간의 정서적 변화를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세계의 어떤 남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미디어 업계의 남성 제작자들은 어떤 게 '팔리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재확인이기도.​


그런데 모미의 리얼리즘적 인간미는 대체로 남을 열정적으로 미워하고 불신하지만 모방하는 바로 그 뻔뻔한 면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이 극의 연출자는 이해하고 있을까. 또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쌍둥이끼리는 어디가 다르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서로에게서 다른 부분만 찾아내던 춘애와 모미가, 증에서 애로, 경합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바로 그 과정의 카타르시스가 너무 빨리 포기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따른다. 이 경합은 추후 모미의 딸 미모와 친구 예춘(춘애를 뒤집은 직관적 이름)의 관계를 통해 다시 구체적으로 재현되기에 엄마와 딸의 연결고리로서도 놓칠 수 없는 장치였다.

여성 간의 경쟁도 (남자들끼리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있을 법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집애들이 서로(의 상품성, 남자에게 사랑받을 능력, 외모)를 질투해서' 그렇다며 편할 대로 납작하게 이해해버린 남자들이 아니었다면, ‘여적여’를 피해 가기 위해 복잡한 관계성을 묘사하길 포기해버리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연출자가 게을렀고 고민이 덜했다고밖에 평할 수 없다.



2) 주오남의 스토킹과 모미가 저지른 최초의 살인


이 생략은 묘사에 대한 포기보다는 오히려 감독의 의도적인 변주인 게 분명해 더 불쾌하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그거다. 왜 주오남은 순정남이자 미모의 아빠가 되어야만 했는가?

원작 웹툰에서의 주오남은 인방 BJ 마스크걸의 몸 사진에 모미의 얼굴을 합성해서 회사 복도에 붙여 모미의 정체를 까발리고, 아름과 부장이 밀회하는 장소로 모미를 불러내서 모미의 뒷담을 듣게 하는 질 나쁘고 집요한 스토커였다. 그는 모미가 핸섬스님과 모텔에 들어간 것을 알고 모미를 구하기 위해 애쓰기보단 모텔 앞에 서서 체념 어린 저주를 내리고 그 다음날 복수를 실행한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안재홍이 연기한 주오남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외모로 인한 왕따를 당했다는 서사와 함께 ‘모미를 지켜주고 싶었다’는 (춘애나 가질 법한) 동질감에 기반한 로맨스 서사를 한 겹 더 부여받는다.

아역까지 동원한 주오남의 서사는 ‘남자도 못생기면 서럽고 힘들다’ 이상의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함축하고 있는가. 물론 남성도 외모에의 상대적 박탈감으로 서럽고 힘들 수 있지만, 그래서 그가 상실하거나 갖지 못한 것들 중 가장 귀중한 것이 (모미처럼 온 인생과 자존이 아니라) ‘지켜줄 여자친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출 거라면 대체 이 박탈감을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그를 ‘모미를 지킬 수도 있었을 남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첫 살인의 주체가 모미 아닌 주오남이 되어버리고 만다. 2화에서 모미가 무력하게 앉아있다가 주오남의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모미씨는 집에 돌아가라”는 지시를 듣고 그대로 따르는 부분은 단연 최악이다. 주체성, 충동성, 분노와 주도면밀함 같은 모미 고유의 특질이 그 순간 완전히 소거되어 버릴 뿐만 아니라 주오남에 대한 모미의 분노 - ‘너도 다른 남자와 같다’ - 역시 당위를 잃고 만다.

원작의 주오남이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모미의 삶을 두 번 세 번 망가뜨린 후 뒤늦게 모미가 걱정되어 집으로 찾아간 다음이었지만, 극에서 주오남은 그 말을 듣기에는 어쩐지 좀 불쌍하고 처절하고 억울해 보인다. 그는 어쨌든 ‘그럴 수도 있을 법한’ 이해의 여지를 남겨둔 사람이고 자수하려던 모미의 시신 은폐를 도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미가 원치 않은 방식의 원치 않은 책임감이라 해도 그걸 모미가 받게 한 시점에 모미는 이미 무력한 신세가 되고 만다.

한 술 더 떠 그는 모미를 힘으로 제압해 강간하고, 정말이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모미가 자기파괴적인 섹스로 그의 욕정에 호응하며, 이를 계기로 미모를 임신하게 된다. 원작에서 성형 후 자기 이득에 따라 남자를 갈아치우던 모미가 백수 감독 남자친구와 착취자 스폰서 중 누가 아빠인지도 모르는 애를 가진 것은 모계 혈연을 한 번 더 강조하려는 의도였지만(엄마만 중요하고 아빠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음), 드라마에서는 모미의 딸도 주오남과의 비틀린 ‘로맨스’의 결실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배우 안재홍의 개런티와 출연 분량이 중요했다고 쳐도, 아무리 시즌 2의 길고 긴 방황을 단축하려는 촬영상의 목적이 있었다고 쳐도, 그가 김경자의 아들이기만 한 게 아니라 미모의 생부이기도 하단 점을 관객으로 하여금 싫어도 계속 의식하게 하는 플롯의 장점이 대체 무엇일지 알 수 없다. 주오남은 모미 관점에서 흡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처럼 포지셔닝되고 극 내내 꾸준한 그림자를 꾹꾹 남기게 된다. 미모와 이진국 집사(드라마 속 남오주, 떡볶이 할머니)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인연이, 이 부계를 통해 ‘진짜 혈연’이 됨으로써 “할머니가 진짜 우리 할머니였으면 좋겠다”는 미모의 안타까운 말도 기기괴괴한 울림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 외, 크게 데이고도 연예계 데뷔와 재건 수술에 계속 집착하는 모미의 모습은 위의 두 생략에 비하자면 너무 사소한 부분이라 집중할 새도 없다. 드라마는 오히려 모미의 수다스러움, 철없음, 근시안적인 면을 제거하고 배우 나나의 묵직한 침묵으로 오뉴블이나 웬트워스 혹은 시카고 등등을 레퍼런스 삼은 비장미를 구현하고자 애쓴 것 같지만, ‘바뀐 얼굴로만’ 더 과감해지는 모미의 폭력성은 어쩐지 (큰 쾌감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큰 사건들을 분기점으로 삶의 180도 전환을 겪는 모미를 표현하기 위해 이한별-나나-고현정 배우의 페이스오프를 시도했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지만 과연 그 전환은 그만큼의 효과를 냈는가. 모미들 간의 분절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얼굴의 이질성보다 오히려 ‘목소리 없음’의 공통분모로 강조되는 듯하다.

​​

추가된 내용으로 따지자면, 모미의 엄마 신영희의 죽음도 불필요했고 (할머니와 손녀의 극적 화해를 그릴 방법이 정말 그 신파뿐이었을까?) 춘애-부용의 과거도 스캠 로맨스의 풋풋함에 한 화의 대부분을 할애해 힘을 줄 필요는 없었다고 보인다. 오히려 집중했어야 할 것은 어린 춘애와 부용이 공유한 찰나의 멜로적 순간들이 아니라 웹툰처럼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오래 산 부부 같은 친밀감 사이사이 가정폭력과 착취가 끼어드는 순간들 아니었을까. 어렸던 춘애가 성실히 편의점 알바를 하는 학생이 아니라 부용의 눈에 들기 위해 특기인 도벽을 적극 활용했단 점 또한 춘애-모미의 닮음을 짚는 데에 중요한 장면인데, 이 설정 역시 이것저것 촬영장 밖의 사정인지 밀려나버렸다.

​​



결국 드라마가 끝난 후 회자되는 건 배우 안재홍과 염혜란이 얼마나 역할을 ‘씹어먹었는지’(염혜란의 신들린 하드 캐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안재홍은 굳이 또? 이 숱한 배우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남자 조연에 이렇게 집중하고 싶은가? 싶어진다ㅎ),

그리고 배우 나나의 ‘뒤태 전신 노출 감행’이 얼마나 과감하고 또 남초식 언어로 하자면 ‘ㅗㅜㅑ’인지밖에 없는 현실을 돌아보면서 막막해진다. 그러니까, 분명 그러지 말라고 만들어진 작품이었는데….


몇 주 전 드라마 공개를 기다리며 다시 구매해 정주행한 웹툰 <마스크걸>의 베댓 대부분은 성별 무관하게 모미를 더 알아보고 싶어하며, 어쩌면 그녀를 나의 삶에 빗대어 이해할 수도 있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간 돌아선 사람들과 실패한 정치를 생각하면서 조금 더 심란해졌다. 시절이 좀 지나가기도 했거니와 그때의 포털 댓글창은 지금만큼 공격적인 여성혐오의 장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긴 하지만, 그때의 ‘이해’를 불러오지 못한 드라마 <마스크걸>이 이룬 것은 과연 뭘까.

완전히 실패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도 여러모로 원작자의 의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정말 외모지상주의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실사화였다면 더욱이 묻고 싶다. 화려한 배우 풀과 압축된 리얼리즘 이상의 무슨 알람이 되고 싶다는 것인지.



매거진의 이전글 <스크래퍼>, 우리 슬픔의 질감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