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Sep 28. 2023

<잠>,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이 여자는 자기 자식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다.

자기 남편을 내쫓는 것만 빼고.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던 사이 좋은 부부가 아기 대신 다른 손님을 맞이한다. 한밤 갑자기 깨어난 남편 현수(이선균)의 ‘누가 들어왔어’란 말과 불행이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를 지칭했던 현수는 그때부터 잠만 들었다하면 다른 인격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자해는 기본에, 부인 수진(정유미)과 기르던 반려견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살해하고,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은 긴장감 어린 소음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정작 2막부터 관객이 겪는 공포의 근원은 현수가 아니라 그의 기행을 퇴치하려고 하는 수진으로부터 출발한다. 원인 모를 몽유병을 겪는 남편을 사랑해 마지않는 바람에 수진은 갓 태어난 딸을 지키되 남편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매일 밤 수진과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두려우니 집밖에서 자고 오겠다고 자청한 남편을 끊임없이 집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문제가 있으면 함께 해결하는 게 부부”라는 문구를 굳이 명패로 새긴 유난스러움은 이제 분리를 허용치 않는 집요함의 명분이 된다.



불면과 불안으로 미쳐가던 수진은 급기야 생전 부부에게 자꾸만 시비를 걸었던, 몇 주 전 죽었다는 아랫집 노인 남자가 현수에게 빙의했다는 가설을 확신하게 된다. 무당이 부추긴 허무맹랑한 헛소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밤 수진이 누웠던 자리에 일부러 소변을 보던 현수의 뒷모습은 어쩐지 짐승 수컷의 영역 표시를 연상시켰다. 둘만의 공간에서 ‘다른 남자’의 침범을 기민하게 감지한 수진의 영적 감각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

미신과 과학의 경합, 굿과 현대 의학의 경합은 여전히 흥미로운 소재임에 틀림없다. 노인을 성불시키든 퇴마시키든 쫓아내야 안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 수진과, 이건 다 몽유병 때문이며 현대 의학의 힘으로 이미 다 치료됐다고 주장하는 현수. 여기서 여성이 믿는 것을 배격하고 믿음을 이성의 반대편에 위치시키는 남성 간의 오래된 대립이 재현된다. 혹은 수진이 틀렸다면, 그의 망상과 환시 일체를 심각한 산후정신증의 비유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그중 무엇이 진실인지 중요치 않아서 공포 그 자체를 더 부각하도록 설계되었지만, 바로 그 공포를 서사화할 근거가 여러모로 부족하다.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여자의 눈동자는 기이한 광기로 물들어가지만 광기 자체의 설득력은 약하기 그지없다.

수진은 늦깎이 신예 배우인 남편 대신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는 능력 있는 직장인이다. 그런데도 그는 매사 남편에게 집착하며 촬영장에 남편을 혹할 미인들이 있으리라 상상하고, 임신으로 인해 변한 몸이 남편의 마음을 식게 할까 걱정한다. 그는 딸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 같지만, 정작 딸의 안전을 해칠 가능성만 나날이 높아지는 남편과 분리되지 않으려 하는 모순 앞에 자식에 대한 애정도 기만으로 둔갑한다.

남편 앞에서 과한 저자세를 취하거나 애정에 기반한 합일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요즘 저런 여자가 얼마나 있다고’ 류의 황당함을 부른다. 핍진성의 부족은 몰입을 방해한다. 남편을 떠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결코 떠나지 않는 여자. 남편의 자가격리도 자신과 만든 가정을 ‘버리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여자. 어딘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스크린 속 주연으로 마주하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제자 유재선 감독의 입봉작에 봉준호 감독이 보낸 극찬을 인용하자면, 2023년치고는 참 ‘유니크한’ 여성상인 것은 분명하다.



수진과 그의 이혼한 어머니의 딱히 사이 좋지 않은 대화, 수진이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행복한 우리 집’을 강조한 일러스트를 넋을 놓고 바라보는 눈빛에서 어떤 결핍을 짐작할 수는 있다. 소음을 싸움이나 가정폭력으로 오해한 아랫집 여자가 ‘힘들면 이혼하면 된다’는 명쾌하고 다정한 충고를 건넸을 때 수진은 이미 이혼한 그를 경멸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그 어떤 끔찍한 일이 있어도 가족(보다도, 남편)과의 끈끈한 친밀감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을 들고 살아가는 여자 같다. 어쩌면 영화가 공포의 근원으로 지목한 층간소음, 산후정신증, 오컬트적 요소보다 더 두려운 것, 여성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바로 그 믿음일지도 모른다.



* 여성신문 23/09/28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