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별빛영화제 1
잼버리 소녀소년들을 위해 상영했다는 웃기고 반역적인 얘기 듣고 더 궁금했던 황윤 감독의 <수라>. 마침 에무시네마 별빛영화제를 빌어 한국엡손이 준비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환경영화 상영 회차에 수라가 걸려 볼 수 있었다.
황윤 감독님은 내가 2017년 첫 비건 지향 라이프 시작할 때도 <잡식 가족의 딜레마>나 여러 인터뷰들 찾아보면서 교보재처럼 참고하고, 전적으로 신뢰했던 롤모델 중 한 분이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새 작품을 보게 되니 설렜다.
사실 <수라>야말로 보지 않고 얘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영화이기 때문에 내가 할 말은 많을 수가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그중에서도 새만금 간척 사업에 걸린 손익만 생각하는 소수의 결정권자들 때문에 우리가 아주 아름다운 것들을 잃어왔고 앞으로도 더 잃을 수 있다는 사실. 원래 뚫려 있었고 생명으로 가득했던 바다, 거기 메워진 흙 아래에 어떤 생명은 영원히 잠들었고 내 세대를 포함한 아이들은 그걸 평생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황윤 감독이 처음에는 카메라로 담았고 나중에는 녹아들었던 시민생태조사단, 그 평범한 사람들의 대단한 노력 덕에 무엇을 잃었는지라도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와 경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 오동필 님과 그 아들 승준 님과 정희정 님과, 고 류기화 어민, 고 이강길 감독, 그리고 부안부터 서울까지 350km를 삼보일배한 성직자들과 그들을 따른 기나긴 행렬을 보는데 어떻게 그렇게 눈물이 울컥 났을까.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은 어린아이였던 승준이 생물학과에 진학한 20대가 될 만한 시간 동안 내내 갯벌에 촘촘한 마음을 들인다. 2003년부터 무려 20년간, 때마다 새들의 개체 수를 세고 연간 보고서를 발간하고 과거의 정부 공시 평가서에서 은폐된 것들을 찾아내고 함께 모여 장승을 세우고 밥을 해먹고 노래를 부르고, 그러면서 갯벌에서의 시간을 온몸에 새겨 체화하는 것이다. 전 세계 철새들의 박물관이었다던 서해안 염전이 모두 잊힌 지 오래, 지금은 그들 한 명 한 명이 거기 파묻힌 갯벌들의 박물관 같았다.
시민생태조사단의 오동필 단장은 생계를 위한 일 중 하나로 집을 고치고 짓는다. 황윤 감독이 담은 일하는 그의 단정한 모습과 소리가 곧이어 갯벌을 뒤져 먹이를 찾는 온갖 새들의 움직임과 울음과 겹쳐진다. 각기 부리를 꽂고 갯벌로 파고드는 새들. 그리고 양발로 풀을 찢는 게, 파동과 족적을 남기는 서해비단고둥의 무리, 갓 태어나 엄마를 찾는 아기 새, 귀엽고 멋진 빛깔의 검은머리갈매기, 다 없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구멍에서 나타난 흰발농게 …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상상해본 적 없던 아름다움. 부감숏으로 오래오래 보여주는 물줄기가 흐르는 갯벌 그 자체의 아름다움.
오동필 단장은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난다는 도요새의 군무를 두고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본 죄로’ 갯벌의 일에 붙들렸다고 표현한다. 하나의 인간이 본 것만으로 죄 지었다고 생각할 만큼 숭고한 것을 직접 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유부도에서 드디어 도요새의 군무를 직접 보고 들은 황윤 감독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도요새 떼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17년 전 언니라고 불렀던 고 류기화 님이 갑작스러운 댐 개방으로 방류된 바닷물에 휩쓸리는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충격과 허망함에 갯벌에 대한 영상 기록을 중단한 바 있다.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 무려 7년간 찍은 갯벌과 그 무수한 생명과 도요새의 춤까지 모든 걸 고맙게도 고스란히 담아 우리에게도 보여주고 들려주었는데. 그런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또 인간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하고 만다.
‘수라’는 수놓은 비단이란 뜻으로, 부안부터 군산, 김제를 통틀어 새만금 간척 사업이 진행된 지역에서 단 하나 남은 마지막 갯벌이다. 사실 원래 어촌이었고 지금은 간척과 미 군항기의 소음으로 황폐해진 아주 작은 마을의 이름이지만, 새만금호 수질 오염에 여러 해 항의한 어민들과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해수 유통도 최근 확대되면서 작은 공터에 차차 물이 차오른 것(동필님은 수라가 건조한 땅이었던 시절부터 거기서 갯벌을 본, 갯벌을 상상하고 기다리고 이름 부르며 그려온 사람이다). 본래 살아있었던 갯벌들을 생각하면 아주 좁은 이곳에도 그 물마저 반가운 양 엄청난 수의 생명이 부활하고 다시 찾아든다.
하지만 새만금 신공항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아마 이 수라갯벌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군산에 공항이 하나 있는데도, 국가 안보와 미군의 편의를 위한다는 무의미한 명목 때문에 그 작은 안식처도 완전히 파괴될 텐데 어떤 사람들은 새만금 신공항 하면 관련주와 카지노를 떠올리고 정치인들은 투자가 무산될 위기에만 분노하며 ‘균형 발전’을 핑계 삼고 시민단체는 ‘이익 단체’로 호도되고 만다. 스무 살이 갓 넘었을 승준은 이 모든 소요의 한가운데서 공항 설립을 저지할 근거를 찾기 위해 멸종위기종인 새의 울음소리를 녹음하고자 추운 겨울 새벽부터 습지를 떠돈다. 너무나 고요하게, 너무나 확신과 희망에 차서.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벌어질 예정인지 나처럼 몰랐고 여전히 모르는데, 절박하고 참담하지만 또 끈질기고 자그마한 희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기게 되살아난 생명들과 그만큼 끈질기게 비인간동반자들을 쫓아다닌 인간 기록자들 덕 아닐까. 동요 없는 승준, 황윤 감독의 마지막 얼굴. 우리는 그들에게 너무 큰 것을 빚지고 있었다.
엔딩크레딧에 하나하나 불린 날짐승 땅짐승들의 이름, 해창갯벌 신안갯벌 순천맛갯벌 서천갯벌 유부도갯벌 그리고 수라까지 모든 갯벌들의 이름…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Sura : A Love Song인 이유를 다시금 깨닫는 순간. 이만큼 진실된 송가에 가까운 다큐가 또 있을까.
보는 중에는 어쩐지 <벌새> 김새벽 배우의 목소리로 읽힌, 영지 선생님의 편지 중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란 구절이 계속 생각났고 눈물도 났는데, 집 오는 길에는 한창 많이 듣던 쏜애플의 게와 수돗물을 들으면서 영화를 조금 더 격렬하고 반동적인 감상으로 되새기기도. 이제 게와 수돗물은 내게는 <수라>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헤이, 여기에는 노래가 없어
내게 밤을 들려줘
헤이, 목이 타도 마실 수 없어
내게 물을 부어줘
한숨 속에 말라붙어 버린
거칠은 대양
텅 빈 그 위로 떨어지다가
아직 숨이 붙은 놈을 봤더라
끊어질 듯한 너를
묽은 물에다 넣고
가장 가까운 바다로
질려버린 음악을
늘어지게 듣다가
어느새 불빛들이 이어지네
헤이, 여기에는 노래가 없어
내게 밤을 들려줘
헤이, 목이 타도 마실 수 없어
내게 물을 부어줘
아, 형제는 차갑게 식어가고
나의 차례를 기다려
우린 떨어지다가
점점 스러지다가
끝내 잊혀질 거야
얼마나 남았을까
아직 알 순 없어도
우리 앞의 기나긴 시간들을
살아가자
너와 내게 남겨진
생명을 다해
살아가자
너와 내게 남겨진
생명을 다해
헤이, 여기에는 노래가 없어
헤이, 목이 타도 마실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