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23/05/27 여성신문 리뷰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10배를 버는 직업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업계의 남성들이 평균 연봉 3000만원을 달성할 때 여성 평균 연봉은 4500만원을 가뿐히 웃돈다(Fortune, 2015). 업계 탑끼리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커져, 남성 1위부터 10위의 연봉 합이 총 80억이라면 같은 순위의 여성들은 총 830억을 받아 간다. 그야말로 여자들이 잔치를 벌이면 남자들은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셈인데 남자들은 당연한 결과라며 겸손히 순응하기까지 한다(ABC뉴스, 2013).
전 세계 남녀 임금 격차를 떠올리면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이 업계는 아주 가까운 곳에 이미 실존하고 있다. 바로 패션모델의 세계다.
현대의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비고정적인 신체를 지향한다. 우리는 철저한 시장 논리에 따라 자기 몸을 재단하고 재편하며 때론 수술을 통한 적극적 변형도 서슴지 않는다. 패션이라는 거대한 글로벌 산업은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외형에 대한 꿈을 팔고, 매 분기 업데이트돼 절대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제시하며 마르지 않는 돈의 흐름을 주무른다. 여기서 모델 개개인은 선망받는 주체로 개입하는 게 아니라 옷이라는 거대한 상징을 걸치기 위해 투입되는 장기말이다.
주인공 칼 역시 등장 10분 만에 '사진과 너무 다르다', '보톡스가 필요하다', '슬픔의 삼각형(미간 주름을 의미하는 성형업계 용어) 좀 어떻게 해보라'는 잔인한 평가에 얻어맞는다. 그는 간신히 얻어낸 패션쇼 앞줄 끝자락 자리에서는 밀려나고, 어두운 뒤편에서 여성 탑모델인 연인 야야의 런웨이를 우울하게 지켜본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불공평한 업계에서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칼의 좁고 축 처진 어깨에 연민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야야의 모델 인생은 그저 순탄하기만 했을까. 업계에 막 진입했던 시절의 야야는 아마 칼보다 더 무례한 평가, 난처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신체 변형 수준의 체중 감량을 포함한 노골적 요구를 수없이 견뎌왔을 것이다. 최근까지도 여성 모델들에게 '자기관리'를 명목으로 가해진 언어적·신체적·성적 학대에 대한 숱한 고발이 터져 나오지 않았나. 평등한 화려함을 약속한 패션업계의 실상은 어린 여자들을 제물 삼아 뼈와 살을 파먹으며 제 수명을 연장하는 덫이다.
그러나 영화는 수상쩍을 정도로 여성 모델의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그나마 보여주는 것은 이미 이골이 난 듯 자기 직업에 대해 '일찍 은퇴하고 부자의 트로피 와이프가 될' 운명이라고 냉정하게 점치는 야야의 시니컬한 조소다. 칼을 대하는 야야의 태도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일찌감치 자아를 포기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예쁜 인형을 연기해 꼭대기를 점유한 뒤, 언젠가는 반납해야 할 권력을 영악하게 활용하는 사람의 깊은 피로감이다. 남창 취급에 과장되게 분노하는 칼의 ‘fuck feminist’라는 읊조림은 야야의 피로에 비하면 얕고 우습고 같잖은 코미디에 불과하다.
'슬픔의 삼각형' 2막의 유람선이 보여준 자본 권력의 피라미드를 뒤집은 것이 3막의 조난당한 섬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거울쌍 같은 두 '섬'이 호화롭고 짓궂은 이미지로 관객의 영혼을 사로잡는 데에 비해, 1막의 모델 오디션과 패션쇼는 정적이고 현실에 가까운 탓에 덜 조망된다. 하지만 1막 역시 '여자가 남자보다 돈을 많이 번다'는 기묘하고 이질적인 권력관계에 의해 보편적인 세상에서 단절되고 고립된 '섬'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얼핏 패션업계는 성차별을 자본의 논리로 '극복'하거나, 혹은 성별 권력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보인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패션모델계의 젠더 역학을 흥미롭게 여겨 차용한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생략된 맥락도 있다.
여성 모델이 왜 많이 버는가? 여성 패션 시장이 남성 패션 시장보다 몇 배나 큰 규모이기 때문이다. 왜 여성 시장이 큰가? 여성이 남성보다 옷과 화장과 미용 시술에 비교 불가할 정도로 큰돈을 들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여성이 평생 남성보다 훨씬 교묘하고 촘촘하고 강력한 외모 강박 하에 놓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젊은 여자가 보는 ‘혜택’이 정말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쁨을 거부하는 것은 조롱받고, 예뻐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미덕으로 상찬받기 때문이다.
미추에 가장 민감한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최근 몇 년간 통용된 건 더치 페이스 즉, '얼굴도 더치페이해달라'는 불만 섞인 밈이다. 부위별로 잘 가꿔진 여성 배우, 아이돌, 모델들의 평균 외모보다 동종업계 남성의 평균 외모는 지나치게 수준이 낮다는 (그러나 물론 소득 규모는 남성이 훨씬 높다는) 전 세계 소비자의 냉혹한 진단이 웃지 못할 현실인데, 소수의 선도자를 제외하곤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패션-모델 업계를 그저 흥미로운 혁명의 장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무대 뒤에서 새로운 미의 기준, 이를 얻기 위한 새로운 제품을 제시하면 무대 위의 누군가는 이 새로운 아름다움의 옷걸이가 되기 위해 아사 직전까지 혹사하고 스스로를 성적 학대에 노출하기도 하며, 무대 아래 누군가는 모방하고 자책하고 끝없이 소비하며 병들어 간다. 결국 이 세계에서도 패자는 여성이다. 그렇기에 젠더와 계급이 경합하는 장 위에서 루벤 외스틀룬드가 고안한 새로운 싸움은 분명 흥미롭지만 고루하다.
3막의 실험대 위에서는 야야처럼 매끄럽고 욕망당할 만한 몸을 갖지 못한 하위 계급의 동양인 중년 여자 아비게일이 바로 그 '부족한' 신체의 능력만으로 구축한 대안적 모계 사회가 목격된다. 부자들의 구토 쇼, 해적의 수류탄을 맞아 침몰한 배 정도의 파격적 전제를 두지 않고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곳. 자본이 자본을 낳는 기존의 법칙에서 벗어나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 뒤집히고,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하지만 무능력하고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조롱받던 이들 - 여성, 동양인, 청소노동자들 - 이 능력을 되찾고 인정받는 곳. 극단적인 균형 맞추기를 위해 고안된 그 세계는 1막의 패션쇼가 뻔뻔히 천명했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허울 좋은 이상을 보기 좋게 비웃는다.
하지만 이건 금방 깰 것이 분명한 꿈이다. 섬의 반대편에서 생존의 가능성을 발견한 야야가 몇 초 만에 본래의 계급을 다시 의식하고 포식자로서의 '아량'을 회복한 순간, 아비게일과 관객이 함께 느꼈을 차분한 좌절감을 기억해보자. 분노한 아비게일이 목격자 야야를 제거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만 더 오래 섬의 (불공정한) 지배자로 머무를 수 있기를 바라는 슬픈 소망은, 이 영화가 끝나고 관객이 돌아갈 곳은 결국 1막의 현실이기 때문 아닐까. 다시, 초대받은 것만으로 황송해하면서, 런웨이 위 깡마르고 아름답고 각 잡힌 모델들을 멍하니 입 벌리고 쳐다보는 관객의 시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