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1 씨네토크 w/김병규 평론가
05/24 개봉한 <카일리 블루스>의 에무시네마 씨네토크 녹취록 전문.
전반적인 정리와 소제는 제가 작업했으나 내용은 중간중간 괄호 안 첨언을 빼고는 편집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 촬영되어 2015년에 완성된, 8년이 지난 영화지만 여전히 논쟁적이고 유효한 질문을 많이 던지는 영화다. 연구자나 비평가들조차도 이 영화의 의제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의견차가 있다.
일례로 이 영화가 아주 빠른 중국 사회의 속도, 한 사람의 인간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속도를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느린 인간과 너무나도 빠른 세계의 시간 사이에 어긋나는 부분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옹호한다는 비평가도 있고 완전히 반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 영화는 말씀드렸다시피 2014년에 촬영이 됐고 2015년에 완성이 됐으며,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공개가 돼서 신인 감독상을 받았던 영화.
비간 감독이 1989년생이니까 26살 정도에 첫 번째 장편 영화를 찍고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받은 것. 그로부터 한 4년 뒤에 30살이 되던 해 두 번째 영화인 탕웨이가 출연하는 <지구 최후의 밤>이 완성이 됐다.
<지구 최후의 밤>은 <카일리 블루스>와 마찬가지로 2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카일리 블루스>가 뒷부분에 대략 한 35분에서 40분 정도의 롱테이크를 보셨다면 그 영화에서는 거의 50분, 1시간이 넘어가는 기나긴 하나의 테이크를 보실 수 있다. 심지어 3D이기까지 하다.
이 감독의 독특한 점은 여러 가지 이력들을 거론할 수 있을 텐데 하나는 광부 출신이라는 점. 두 영화를 모두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폐광산 같은 공간이 이 감독의 영화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버려진 공간, 그리고 과거가 누적되어 있는 공간, 그리고 그 시간을 캐내는 공간으로서 나는 광산에 접근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감독이 시간에 접근하는 방식을 자신의 물리적인 이력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간 감독은 시인이기도 한데, 단순히 시를 쓰면서 영화도 만든다는 차원에서 시인이라는 점을 강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전부 다 쓴 뒤에 시나리오와 비슷한 내용을 토대로 해서 같은 제목의 시집을 쓰는 방식의 작업을 하는 사람.
감독의 인터뷰를 제가 빌려왔는데, 2011년 <타이거>라는 첫 번째 단편을 만들면서는 시나리오만 가지고 영화를 촬영하고 편집했다.
그런데 영화의 편집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시나리오를 기반으로만 영화를 편집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얘기를 한다.
비간 감독 단편을 보신 분들이라면 좀 이해하실 텐데 이 감독은 단편이 더 난해하다. 그가 선택한 하나의 방법으로 "나는 영화의 편집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시를 활용하기 시작했다"라고 이야기한다. 시나리오, 콘티 그리고 촬영된 영상을 토대로 해서 편집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불어서 비간이 작성한 시의 구절들, 시구들을 거기에 덧붙이면서 편집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영화가 구성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발명해냈다는 것.
이 영화에 흐르는 시구들, 물론 인용한 것도 있는데 - 영화의 오프닝에서처럼 금강경을 인용한 부분도 있고 한데 - 본인이 직접 작성해서 내레이션으로 활용한 시의 구절들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주 무분별하게 활용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인용된 텍스트와 자기가 작성한 시구들이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시의 내용이나 이 시를 배치한 원칙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비밀에 붙이고 있다. 함구하고 있다. 해외 인터뷰 같은 것을 찾아봐도 시에 대해서는 비밀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나레이션이 활용되는 방식, 목소리가 활용되는 방식, 시라는 텍스트가 활용되는 방식이 비간 감독의 영화적 비밀에 접근하는 또 다른 어떤 열쇠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감독의 영화를 보면 항상 롱테이크만 얘기하게 되고, 항상 그 30분간의 롱테이크 그리고 <지구 최후의 밤> 같은 경우는 50분간의 롱테이크 거기서 우리가 뭘 봐야 되냐 그것을 어떻게 찍었느냐, 어떻게 그 장면에 도달하느냐까지만 말하게 되는데 그 영화가 그 롱테이크까지 도달하기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독자적인 리듬과 호흡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더 이야기해 볼 수 있어야 된다. 그리고 감독이 그것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고 새로 새로 시를 작성한다는 것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활동이라고 이 비간 감독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비슷한 중국의 신예 감독의 사례를 여러분들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소설가였던 역량을 발휘해서 같은 내용으로 소설을 쓰기도 했던 감독이 한 명 더 있었죠.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라는 영화를 만든 후보 감독이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비록 시와 소설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텍스트와 영화에 아주 연속적인 방향으로 접근을 했다.
비록 후보 감독은 아시다시피 안타깝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비간과 후보 두 분 감독은 나이대도 비슷하고, 서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한 신예 감독이라고 스스로 두 분도 직접 그렇게 이야기를 했고 평가들도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왔었다.
영화의 배경은 중국에 실존하는 카일리라는 지역.
비간 감독이 실제로 이 카일리라는 지역의 출신이고 그곳에서 굉장히 많은 일을 했다. 광부일도 광부 일이지만, 주유소에서 일했고, 광부가 되기 위해 암석 채굴 면허를 따는 또 다른 업무가 있었는데 그 일을 했었어야 했고, 또 결혼식 웨딩 촬영 기사도 했다고 하는데…
자기는 시를 쓰고 웨딩 촬영 기사를 하면서 카메라를 잡고 광부로 일하면서 암석에 대한 시간,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영화 촬영에 대한 열정을 계속 키워갔다라고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다.
(김병규 평론가 첨언 : 저는 이런 말 좀 믿지 않아요. 약간 자기 경력을 좀 부풀리는 것 같은 그런 특유의 예술가적인 그런 말이라서 약간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저하고 맞을 필요는 없지만 ㅋㅋㅋ)
비간 감독에 따르면 카일리라고 하는 이 지역은 중국 영화의 역사에서 전혀 기록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의무가 있다, 과업이 있다고 말한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인데 오시마 나기사의 말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 영화를 찍는다는 것, 이미지를 찍는다는 것은 정당한 이미지를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마땅히 받았어야 할, 마땅히 되돌아갔어야 할 이미지를 카메라가 돌려주는 것이다.
오시마 나기사라는 사람은 전후에 2차 대전 후에 재일 한국인들을 찍으면서 ‘그들은 분명히 일본 사회를 차지하고 있는 주변적인 존재들인데 어떤 일본 영화도 그들을 조명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카메라를 든 자는 그들의 시간을 분명히 기록해 내야 된다는 것.
오시마 나기사와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비간 감독도 비슷한 이야기를 카일리라는 지역에 대해서 전해온다. 이곳은 중국 영화의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곳, 어디에도 없는 곳, 예술적인 표현에 의해서 주목받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곳이라고.
이 도시는 실제로 중국의 소수 민족인 먀오족, 묘족을 다룬다. 주인공 첸의 직장 동료인 여자 의사가 말하는 이름이 양애인이라고 하는 옛 친구에게 사진을 전해달라고 하는데 그 옛 친구가 실제로 묘족으로 설정이 되어 있는 것.
카일리라는 곳은 그런 식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노래와 춤과 축제와 많은 기록들이 남겨져 있는 곳, 관습들이 새겨져 있는 곳인데 중국에 너무나도 빠르게 근대화되어 가고 있는 시간에 의해서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채 희미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간 감독은 “나는 그 두 가지를 기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이곳에 대한시간적인 기록들, 그리고 두 번째는 근대화에 의해서 희미해지는 것 같은 그 감각, 그 느낌을 영화에서 포착하려고 하고 있다.”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면 무언가 불투명하고 모호하고, 특히 시간의 차원에서 이것이 어느 시점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분명히 느끼셨을 것. 그것은 비간 감독이 말하고 있는 이 역설적인 예술적 지향의 성취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희미해지고 있는 그 경험 자체를 관객에게 감각하게끔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비간 감독은 아주 단순하게 얘기한다. 카일리 블루스는 어떤 영화입니까, 하면 “이 영화는 로드무비입니다.” 라고.
(김병규 평론가 : 자꾸 이렇게 딴지를 걸어서 좀 민망하긴 한데 반은 맞고 반은 좀 믿기 어려운 소리죠. 왜냐하면은 물리적으로 로드 무비는 맞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죠.)
분명히 어떤 여정이 나오고 굉장히 긴 시간 동안 도로에서, 혹은 열차에서 촬영된 분량들이 있으니까 로드 무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영화에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로드무비의 기초적인 원리나 전제라고 할 만한 것들이 어떤 게 있나?
로드무비의 전제라면 분명히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아야, 그리고 언제 떠나는지는 알아야, 그리고 그 여정이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서 무엇으로 끝나는지 정도의 합의는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여정의 의미를 우리가 획득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 통상적인 로드무비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문제는 첸은 물론이고 관객인 우리조차 언제부터 우리가 길에 있었고, 그리고 이 길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것이고 어떻게 여정을 끝낼 수 있는지 굉장히 모호한 상태로 진행되다가 끝나버린다는 것.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굉장히 안식과 피로감이 뒤섞여 있는 그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되지만, 그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우리는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는 것. 어느 정도의 해석은 할 수 있고 어떤 방향의 유출은 가능할 테지만 우리는 그 마지막 장면이 꿈에서 돌아온 것인지, 다시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다른 인물을 맞고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희미해지는 감각, 뭔가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감각, 멍해지는 감각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로드무비이면서 완벽한 로드무비라기보다는 안티 로드 무비적인 속성, 그러니까 로드 무비가 갖추고 있는 방향성과 목적성을 상실해버린 로드무비라고 말할 수 있다.
방향성과 목적성.
지구 최후의 밤을 보신 분들은 확실하게 느끼실 텐데, 비간 감독은 아주 지독한 씨네필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유형의 연출자.
카일리에서 많은 노동과 실질적인 영화 제작에 어린 나이부터 뛰어들었기 때문에 정식적인 영화 교육을 받지는 않았는데, 그 대신에 인터넷에 중국어 자막이 너무 많이 널려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나는 너무 손쉽게 볼 수 있었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분 중에 한 분… 그래서 영화를 무작위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면 박스오피스에 걸리는 영화들을 보거나 혹은 영화 학교에 가서 영화를 봤다면 영화 역사에 맞게 40년 된 어떤 영화, 50년 된 어떤 영화, 무성 영화 시기는 어떤 영화, 이런 식으로 영화를 봤을 텐데 인터넷에서 버려져 있는 것들을 주워 먹고 자랐기 때문에 무작위로 영화를 볼 수 있었고, 그런 자세로 내 영화적인 테이스트, 취향이라고 하는 것을 습득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왕가위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뒤섞이고 여러 감독들이 있을 것.
그래서 수많은 인터뷰나 비평에서도 비간 감독이 직접 자기가 말하고 있는 영향받은 감독도 있고, 혹은 이제 비평에서 찍어주고 있는 비관 감독과의 연관성을 갖고 있는 몇몇의 감독들도 존재하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본인도 얘기를 하고 그리고 비평에서도 일관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가진 것을 재현하고 재구성하고, 이를테면 실내에서 물줄기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장면들이라든지 그 물줄기를 이렇게 비추다가 조명이 전환돼서 약간 이상하게 시제가 전환되는 장면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고스란히 타르코프스키가 했던 것들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
이외에도 스트루가츠키 형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쓴 ‘노변의 피크닉’이라는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알렉세이 게르만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의 원작이 된 동명의 소설을 쓰기도 한 사람들. 그리고 노변의 피크닉이라는 작품을 각색한 타르코프스키의 또 다른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스토커>. 그 영화의 중국어 원제가 ‘노변 야찬’이다.
그래서 카일리 블루스, 그러니까 로드 사이드 피크닉 역시 정확하게 그 제목을 그대로 따라왔고 비간 감독도 인터뷰에서는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난 스토커를 처음 봤을 때는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자기도 이런 영화를 찍지만 남들이 찍는 어떤 영화에 대해서도 이해가 잘 안 돼서 그 책을 다시 읽어봤다고 한다. 원작이 된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서 영화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가 있구나라는 그 절차를 이해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영상으로 전환되는 것, 그래서 영화는 이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영화는 왜 이럴 수밖에 없을까라고 하는 한계점도 생각을 했다는 얘기..
두 가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염두에 두시면 좋겠다.
즉 한계점과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대로 기록을 하는 자세와 그것이 희미해져 가는 어떤 시간들..
영화의 마지막 40분 가량이 진행되는 당나이 마을이라고 하는 곳은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에 나오는 시공간의 법칙이 완전히 재편돼서 나타나는 그 구역을 연상시키고, 타르코프스키가 보여주는 아주 강렬한, 아주 인상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인 ‘트래블링’이 등장한다.
그 구역 안에 들어가려고 할 때 카메라가 보여주는 수평 트래블링이라고 하는 것은 저도 아주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고, 많은 비평가들도 그런 식의 고백을 하는데. 이 영화에서 시도하려고 하는 것도 한 지역에서 한 지역으로, 혹은 한 구역에서 한 구역으로 이동하는 카메라의 많은 움직임들.
물론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많은 예산을 들이진 못했다. <지구 최후의 밤>은 이것보다 많은 예산을 들였고 흥행에도 성공했고 기술적인 완성도가 훨씬 빼어나졌지만, 이 영화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찍었다. 굉장히 열악한 조악한 단계에서 만들었지만, 이 트래블링이라고 하는 열망을 어떻게 트래블링의 장치들을 갖추지 않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하나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더불어서, 비평에서는 주로 거론되지 않지만 두 번째로 이야기되는 감독, 비간 감독이 구체적으로 거론한 영화가 <재견남국>. 보신 분들이 사실은 많이 없으실 것 같은데, <재견남국>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시게 되면 어떤 지점에서 감독이 영감을 얻었다..기보다는 용기를 얻었는지가 느껴진다.
왜냐하면 <재견남국>은 차를 타고 기차를 타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계속 돌아다니고 차로 어딘가로 실려나가는 장면으로 또 끝나는, 이런 식으로 요약할 수도 있는 어떤 영화.
그러니까 내용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고, 탈 것들의 장면들로 영화의 대부분의 러닝 타임을 채워놓은 그 영화도 대단히 야심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간 감독은 <카일리 블루스>에서 이 구성을 취하면서 기차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한 가지를 더 추가했죠. 뗏목을 타고, 그런 탈 것들로만 이루어진 영화를 구상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적인 열망이 있는 거다.
한 구역에서 한 구역으로 이동한다는 열망, 그리고 그 구역과 구역 사이를 연결하는 그 경로를 있는 방식들에 대해서는 허우샤오시엔의 <재견남국>이 주는 어떤 용기, 허우샤오시엔이 실천했던 방식이 이 감독에게 주는 한 가지 방법론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허우샤오시엔이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실내 공간의 조형적이고 아주 즉물적인 요소들에 집중하는 분들이 아주 많다.
<카일리 블루스>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어떤 부분을 떠올릴 수 있냐면 실내 공간에서 물이 떨어진다거나 그런 천장에 달려 있는 빛이 계속 바뀐다거나 하는. 그런 식으로 실내 공간의 미장센을 중심으로 타르코프스키나 허우샤오시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비간 감독은 그들의 다른 면모, 그러니까 사실 따져보면 굉장히 터프한 면모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가져왔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어떻게 영화의 보물, 영화라고 하는 신체를 어떻게 이동시키느냐에 대해서 허우샤오시엔과 타르코프스키는 엄청난 대가였다. 비간이 빌려오는 타르코프스키, 비간이 빌려오는 허우샤오시엔은 바로 그런 맥락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구체적으로 창조하고 있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특별함이 발견되지만 사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허우 샤오시엔은 중국의 신예 감독이라면 10명 중에 8명은 거론하는 감독. 당신이 존경하는 감독은 누구입니까 했을 때 허우샤오시엔 혹은 에드워드 양의 이름을 피해가는 중국의 감독은 거의 없다. 특히 지금 7세대, 8세대 젊은 신예 감독들에게 이 질문을 드렸을 때 그렇다.
그래서 그 영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은 왕빙 같은 감독조차 존경하는 두 명의 감독으로 정확히 이 두 사람, 샤우시엔과 타르코프스키를 뽑았다. 좀 까다롭게, 까칠하게 말하자면 이건 어떤 특별한 취향으로 거론될 수는 없는 이름들인 거다. 특히 중국의 감독들한테 어떤 정신적인, 정서적인 동조의 측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신예 감독이 어떤 형식이 강조되는 모던 시네마를 찍었다고 했을 때 당신은 홍상수의 영향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건 하나 마나 하는 소리다. 왜냐하면 그 영향을 안 받는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마찬가지로 허우샤오시엔도 중국의 감독들에게, 중국의 신예 감독들에게 같은 이름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그들의 규칙 아래서, 그들의 영향 아래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특별한 내가 특별한 무언가를 계승한다거나 특별히 영향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 부정확한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제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비간의 연관성, 혹은 비간이 거론하는 또 다른 감독 중에 한 명은 빔 벤더스. 독일의 영화 감독이고 여전히 신작도 내는 감독.
(김병규 평론가 : 근데 빔 벤더스를 조금이라도 좋아하셨던 분들은 이해를 하시겠지만 이분이 최근에 내는 신작들은 다들 안 보고 있다. 안 보는 게 예의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거든요. 저도 그렇고요. 저도 가슴이 아파서 더 이상 못 보고 있어요. 어쨌든)
이 영화를 보면 빔 벤더스의 영화 제목 몇 개가 떠오르고 몇몇 장면들이 떠오르실 것... 대표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으로> 혹은 <베를린 천사의 시>.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은 ‘카일리 천사의 시’, ‘카일리 천사의 악몽’ 같은 영화로 이해할 수 있다.
변화하는 도시. 세계가 계속 변화하고 있고 우리는 날개를 달거나 탈 것을 타고 그 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창문 너머로 계속해서 바라본다는 것이 빔 벤더스의 영화와 비간의 영화에 공통적으로 감돌고 있는 하나의 감각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카일리 블루스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장 중요한 테마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또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계를 계속해서 보여주니까. 그것 말고는 다른 거를 얘기하지 말라는 것처럼 시계도 보여주고 온갖 장치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상징이냐,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논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그리고 그것은 왕가위의 <화양연화>에 나온 어떤 장면을 오마주하는 시네필적인 취향이 아닌가요라고 물어보는 것도 제가 생각하기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영화에서 시간이라고 하는 감각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영화의 첫 장면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기억나시나요? 병원 내부에서 시작된다.
병원 내부에서 카메라가 천천히 패닝을 하고, 실내 조명은 깜빡깜빡 거리고 있고, 의사인 첸이 기침을 하면서 약을 달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 동료 의사는 죽어야지만 아프지 않을 거라고 죽어야지만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말해 주고 있고 전등은 하루에 세 번씩 깜빡거린다고 얘기를 해주고.
(첨언하자면 번역의 시차인지 평론가의 사소한 기억 오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내가 관람한 버전의 자막에서는 동료 의사가 아닌 첸이 ‘죽어야지 아프지 않다’고 하고 동료가 이를 반박한다. 그리고 ‘하루에 세 번씩이야’라는 동료 의사의 말에 ‘전등이요?’라고 되물은 것 역시 첸, ‘아니, 약 말이야’하고 다시 분명히 한 것은 동료 의사.)
그러고 나면 이제 검은 화면에 금강경의 구절이 떠오른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다.’
제가 금강경을 철저하게 해석하고 동양 철학에 대해서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만 보더라도 영화에 아주 많은 것을 일러주는 한 문장이기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첸이라는 인물은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천천히 이동하는 그 패닝 숏이 화면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첸을 외면해서 지나칠 때까지 보여주는 방식으로, 카메라는 일찌감치 첸의 시간을 이미 지나치고 있다는 것이 첫 장면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
여기서부터 어떻게 26살에 저런 영화를 찍었을까, 혹은 롱테이크가 되게 경이롭다, 어떻게 찍었을지는 좀 궁금해지긴 한다. 밧줄도 달아가면서 막 뛰어가면서 찍었다고 하는데 그런 어떤 경이로움이라기보다는, 대단히 긴장감을 가지면서 본 작품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왜냐하면 뭔가 아슬아슬하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가 안고 있는 인식들을 가지고 아주 아슬아슬하게 그것들에 대해서 반문을 하면서 영화를 성립시키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가 성립될 수 있을까 싶은데 - 성립은 된 거죠. 영화가 만들어졌으니까 - 어쨌든 근데 그렇게 성립된 영화의 방법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제 입장에서는 그런 식의 긴장으로 오게 됐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상당히 간단하다.
징역을 살다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의사가 두 가지 과업을 받게 된다. 동료 의사가 사진을 전달해 달라는 한 가지가 있고, 사라진 아이 웨이웨이를 찾기 위해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두 번째 방향이 생기고.
한쪽으로 갔다가 다시 다른 한쪽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굳이 분류를 한다면 돌아오는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말하자면 남편이 집을 떠나서 밖에 있고 아내와 자신의 친자식은 아니지만 어린 아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설정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익숙하실 것. 이건 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의 설정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아들이 아버지를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있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 시점을 뒤집어서 아버지의 관점에서, 떠나간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이미 죽어 있고 아이가 사라져 있는 상태를 설정한 것이 카일리 블루스의 이야기적인 상태.
이건 너무 예전부터 많이 쓰여서 저는 좀 거론하고 싶지는 않은 표현인데 ‘둘로 잘린 영화’다. 그러니까 영화가 쭉 진행되다가 롱테이크를 기점으로 해서 앞부분과 뒷부분이 잘려나간다…
많은 비평가들이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지만 저는 약간 애매하다고 생각이 된다. 제가 느끼는 애매함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어떤 애매함이라고도 생각이 들고. 둘로 나뉘면, 앞과 뒤가 완전히 상반돼서 전환이 된다면 그 절단면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히 어디인가? 하는 애매함.
아주 많은 사람들은 그 롱테이크가 시작되는 구간을 절단면으로 든다. 형식적으로 앞뒤가 완전히 뒤바뀌니까.
근데 한 가지 더 영화의 외형, 영화의 구성, 영화의 속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완전히 바뀌는 구간이 한 가지 더 있다.
오프닝 타이틀. 영화 시작하고 30분, 40분 정도가 지난 뒤에 오프닝 타이틀이 뜨죠.
그리고 나면 영화가 어떻게 돼 있나? 약간 범죄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바뀐다. 그러니까 앞부분은 전형적인 아트하우스 무비, 스타일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영화에서 볼 것 같은, 병원에서 업무를 보다가 만성적인 자기 질병에 힘들어하고 자기 꿈에 대해서 호소하는 사람의 이야기.
그러다가 오프닝 타이틀이 뜨면은 어떤 사건이 벌어지나? 엄마(사귀던 여자)가 죽어 있고, 자기 아이가 팔려나가서 그걸 잡으러 가야 되고. 이건 범죄 영화의 시스템이다.
범죄 영화의 도입부에다, 아이도 되찾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서부극이 되는 것. 범죄를 저질러서 어딘가에 있던 삼촌이 집에 돌아와서 잡혀간 아이를 되찾고 집에 돌아온다. 정확하게 존 포드가 <수색자>에서 만든 그 구조가 된다.
범죄 영화처럼 변형을 겪으면서 또 다른 변형을 뒤에 한 번 더 마련해 두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둘로 잘린 영화이기는 한데 어느 구간의 절단면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영화의 감성이라고 하는 것이 또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절단면이라고 여겨지는 변형의 지점들을 딱 한 곳에만 설치해 둔 것은 아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그 롱테이크에 주위를 집중할 수밖에 없게끔 찍어놨지만 우리는 분명히 이 앞부분에서도 아트하우스 무비처럼 자신의 병과 꿈에 대해서 기억에 대해서 고통받아오던 남자 주인공이 갑작스럽게 아이를 되찾아야 하는 순간을 얻게 되는 이 구간에서도 영화의 전환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거.
제가 뭔가 아슬아슬하게 우리의 인식에 대해서 질문한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비간은 여기서 시간 그리고 영화의 체계라고 해야 될지, 영화라고 하는 것의 근본적인 어떤 성질에 대해서 두 가지의 어떤 내기를 본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혹은 두 가지의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싶다. 거기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다라고 하는 것.
그 두 가지는 모두 시간과 연관되어 있긴 하다.
하나는 영화가 시제를 찍을 수가 없다는 것.
이 영화에 대해서 아주 간략한 정보만 검색해 보시더라도 이런 정도의 문장은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여 있는 시적인 아름다운 영화”...
(김병규 평론가 : 이제… 저는 또 그런 얘기를 들으면 또 심술이 도져서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물론…)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하는 것이 그 마지막 롱테이크에서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고 마치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혹은 비간은 그러한 뒤섞임을 통해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을 질문할 필요가 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영화라고 하는 것은 시제를 명시할 수가 없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화면밖에 없다. 그것이 과거이고 미래이고 현재인지 그 화면의 내부의 정보로는 명시되어 있는 구석이 없다. 우리는 다른 장면에서 얻은 정보들을 통해서 그것의 정체를 유추할 뿐이다.
갑자기 제 얼굴이 확 줌인을 해서 제가 막 찡그리는 표정을 짓다가 다른 장면으로 돌아가면 저게 플래시 백이구나 하는 식으로 대략적으로 유추할 뿐. 다만 그 장면 자체에 대해서는 그것을 명확하게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영화는 현재의 표면만을 담아내고 그 현재의 표면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들, 이어진 사진들의 결합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
두 번째는 영화는 방향을 틀 수가 없다는 거. 방금 말씀드린 것과 약간 비슷한 맥락인데 영화는 평면 내지는 표면이라고 하는 것의 결합으로 한 장 한 장 쭉 이어지는 영상의 결합일 뿐이고, “그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을 화면 내부에 확증하기에 굉장히 까다로운 매체가 온다.”
이거는 제가 한 말이 아니고 비간 감독이 아주 존경했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몽테뉴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일기에 썼던 내용이다.
인간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방황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가 영화다.
인간은 어떤 한 곳으로 향할 수도 없고 계속해서 앞뒤로 방황한다는 것. 이 영화에서 여러분이 가장 많이 보셨을 만한 장면이 어떤 장면일까? 물리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서 보여주는 장면은 계속해서 도로를 쭉 이동하는 것.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찍지 않았다. 부감을 들어서 찍는다거나 아니면 수평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그것을 쭉 포착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지만. 이 감독의 지금 이 정도 제작비의 세팅으로는 그런 장비는 불가능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그 앞에서 자전거가 됐건 다른 오토바이가 됐건 카메라를 세워서 앞에서 쭉 따라가는 것인데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나요?
방향성을 상실했다는 이 사람이 앞뒤로 계속 어딘가로 간다는 것은 알겠고, 이동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이곳의 최종적인 지점, 갈 수 있는 마지막 한 지점이 어디인지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거다.
그래서 롱테이크의 지속 시간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물리적인 시간과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굉장히 길지만, 이 영화의 화면 안에서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이행하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이 영화가 첫 장면을 포함해서 굉장히 많은 장면에서 카메라가 멈춰서 있고 수평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패닝 쇼트라고 하는 것을 활용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염두에 두시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패닝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는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이 원형의 움직임이 이 영화에서 굉장히 많이 반복이 된다.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놀이공원의 열차도 그렇고, 정해져 있는 경로가 있고 그것을 원형으로 이렇게 돌고 있는 움직임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로써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사물적인 장치들로 미러볼이 있고 시계가 있고… 계속해서 원으로 돌고 있는 어떤 물체들, 그것이 서사적으로 무언가에 기여를 한다기보다는 시각적으로 우리의 눈을 하나씩 천천히 중독시키고 있는 거다. 계속해서 우리는 어딘가를 뱅뱅 돌 것이다.
원으로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지나쳐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그것이 다시 보여서, 아까 그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딘가 다른 곳에 와 있고, 그것이 다른 누군가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고, 그게 어디까지 진행되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웨이웨이와 대면하는 순간까지.
이런 사물들과 더불어서 말씀드린 대로 카메라가 담당하고 있는 이 원형이라고 하는 시스템이 바로 패닝.
패닝이 어떤 의미를 보여주냐면 한 번 장소를 정하고 그리고 카메라가 서는 위치를 정하는 순간 다른 컷을 활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 영화에서는 많은 경우 한 신에서 딱 한 컷만 쓰이는 장면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실내 장면에서 데쿠파주를 활용해서 장면을 나눠서, 한 씬에서 다른 장면을 들여서 보여주는 장면이 거의 드물다. 특히 영화의 초반 30분 범죄 영화가 되기 직전, 예술 영화 상태의 <카일리 블루스> 시절에는 거의 드물다.
예외가 있다면, 대부분의 장면에서 컷이 바뀐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공간이 전환된다는 것인데,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딱 한 가지가 있다.
꿈에 대해서.
이야기 인물들이 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하나의 신 안에서 컷이 나뉘기 시작한다.
동료 의사가 자기 꿈에 대해서 막 이야기할 때 갑자기 플래시백처럼 지금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 과거의 영상이 갑자기 난입되고 두 사람의 컷이 이렇게 샷, 리버스 샷으로 나뉜다. 이런 식의 신 구성은 데쿠파주 구성이고, 일반적인 영화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것이지만, 패닝을 통해서 공간을 아우르고 보여주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식을 택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방식이 된다는 거.
그리고 두 번째로 또 어디에서 진행이 되냐면 옥상에 올라와서 의사와 주인공 첸이 자기 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때도 컷이 하나하나 일일이 다 나뉘어진다.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무언가 컷을 나눠야 하는, 데쿠파주를 활용해서 쇼트를 쪼개야 하는 원칙적인 조건이 된 것처럼 활용되는 것.
굳이 얘기한다면 패닝 숏이라고 하는 것은 멈춰 있는 카메라, 비간 감독의 광산에 대한 이야기, 카일리라고 하는 공간에 누적되어 있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처럼. 그곳에 위치해서 사물처럼 멈춰서 우리를 지켜보는 어떤 것, 곧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첸을 지나치는 시간, 과거로부터 이어져 있는 수많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카메라. 여기서 꿈, 다른 시간, 혹은 카일리가 아닌 다른 공간을 꿈꾸는 열망이 틈입한다는 것은, 그 과거의 시간에서 카일리에 누적되어 있는 그 시간의 질서와 규칙에서 이탈한다는 뜻이다.
첸은 꿈에 대해서 어떻게 항상 이야기를 했나? 자기 과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꿈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낡은 집이 허물어져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어떤 맥락에서 여기서 자면 항상 꿈을 꾸기 때문에, 꿈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공포스럽고, 즉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 과거의 과업이라고 하는 것이 침입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어쩌면 삶을 지속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거.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대략 35분, 40분 가량을 차지하는 그 롱테이크에서 첸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기억이 아니라 철저한 현재라고 느끼고 있는 (순간이다). 롱테이크를 찍는다는 것은 그것이잖아요. ‘현장성’. 우리는 현재를 보고 있다. 계속해서 지속되는 시간을 보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첸이 미용실에 가서 대화를 하는 대목, 그리고 그 뒤에 가서 다시 웨이웨이를 만나서 오토바이 뒤에 타는 대목에서 그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꺼내게 된다.
철저하게 현재적인 시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공간 자체가 첸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그토록 가고 싶지 않았던, 그토록 자기 삶 자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던 그 과거라고 하는 기억들, 흔적들, 시간의 파편들이 거기에 침입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이 여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난데없이 너무나 커버린 웨이웨이를 다시 만나게 돼서… 근데 사실은 이 장면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다. 단지 이름이 같을 뿐이고 그 웨이웨이와 이 웨이웨이와 다를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그것도 관객이 확정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니까. 근데 어쨌든 저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시간을 비약을 경험한 웨이웨이를 만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마지막 장면을 말씀드리자면, 마지막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웨이웨이라는 남자아이가 이야기한다.
“원시인은 사람의 앞뒤를 구분할 수 없다.”
원시인은 이 영화에서 거듭해서 언급되는 대상이었다. tv에도 계속해서 나오고 그래서 영화의 초반부에 아직 꼬마 시절 웨이웨이가 어떻게 얘기했냐면, 텔레비전에 원시인만 나와서 무서워서 볼 수가 없더라고 했다.
그랬는데 마지막에 그 원시인이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원시인은 사람의 앞뒤를 구분할 수 없어서 몰래 따라와서 뒤에서 안는다고 한다.
(역시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관람할 때는 분명 웨이웨이가 ‘원시인은 사람의 앞뒤를 구분할 수 “있어서” 몰래 따라와 뒤에서 안는다’고 말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쪽이 더 맞긴 한데 아무튼 앞뒤를 구분할 수 없어서 방향을 잃는 인간에 대한 해석도 흥미로우니 그대로 남겨둠.)
익숙한 말이 계속 나오는 거다. 사람의 ‘앞뒤’라고 하는, 계속해서 나왔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
이 장면에서 지금 웨이웨이를 따라와서 뒤에서 안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첸이다.
즉 원시인이라고 하는 존재, 영화 내내 화면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분명히 카일리 안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던 이 존재, 웨이웨이가 초반부터 두려워했던 이 존재, 동굴의 폐광산에 산다고 여겨지는 존재, 웨이웨이보다 덩치가 훨씬 크다고 말해지는 존재, 그리고 카일리라는 공간의 과거를 가리키고 있는 이 존재는, 과거 속에 매몰되어 있는 이 존재는, 우리가 계속해서 지켜보던 첸이라는 존재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는 것.
반복해서 말하지만 첸은 여기서 과거와 현재가 결합되어 있는 여정을 한 테이크 안에서 통과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웨이웨이라고 하자마자 어떤 장면이 나오나요? 35분, 40분 동안 이어지던 롱테이크가 딱 끝나고 첸의 얼굴로 컷이 전환이 된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가 끝나고 컷이 전환되는 순간은 어떤 때에만 발생을 했다? 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뿐이다. 꿈을 주제로 이야기하거나 혹은 꿈 자체라고 여겨지는 순간, 꿈이라고 하는 신호가 켜질 때에만.
과거에 붙들려 있는 존재, 미래로 이행할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웨이웨이라고 하는 이 시간의 폭을 너무나도 많이 경험한 존재를 떠나보낼 수 없다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을 이 순간 여기서 첸이 자각을 하고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컷이 바뀐다.
이란의 감독인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라는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화에서의 숏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의 입방체와 같은 것이다.
부피를 가지고 있는 세계의 입방체다.
그래서 하나의 숏은 6개의 면을 갖는다.
하나의 장면은 구멍이 뚫려 있는 6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입방체인데, 키아로스타미는 그 사이로 화면에 보이지 않는 소리가 틈입한다고 믿었다. 소리는 어디에서든 들려올 수 있다. 우리가 이쪽을 보고 있더라도 저기에서 뭔가 강아지 짖는 소리가 나면은 저쪽 방향에 강아지라고 하는 것이 있구나,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강아지 소리의 음량에 따라서 어느 정도 크기의 강아지인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숏에 소리가 틈입할 수 있다라고 생각을 했다. 제가 느끼기에 비간은, 하나의 숏에 뚫려 있는 그 구멍 안에 시간이, 시제가 틈입할 수 있다고 믿는 감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현재 뒤에, 혹은 이 현재와 더불어서 과거가, 혹은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가 두려워했던 예전의 기록들이 침입해서 들어올 수 있다고- 그 숭숭 뚫린 표면 위로 시제라고 하는 것이 겹쳐질 수 있다고 하는 것. 왜냐하면 영화는 시제라는 것을 확증할 수 없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현재라고 하는 조건조차 확정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비간이 제기하는 아주 정치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은 저는 이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카일리라고 하는 이 사라져가는 도시의 기록을 찍는다는 것, 이런 부분도 물론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할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대단히 익숙하게 보고 듣는 감각을 미묘하게 교란시키는 거. 영화라고 하는 시스템이, 우리가 극장에서 불이 꺼진 곳에서 빛을 향해서 시선을 던지고 주인공을 중심으로 보게 되고 이런 시스템이 특정한 가치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이론들이 이미 얘기하고 있다. 특정한 이데올로기적인 어떤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비간은 시각적 이미지라는 것이 내 앞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내 앞에 보이는 것이고 청각적인 사운드라고 하는 것이 내 근처에서 들리는 것이라는 감각의 규칙을 재조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부 후시녹음으로 세팅된 영화. 사실은 기술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다.. 그 롱테이크를 생각해 보면 그 현장음을 다 집어넣는다는 거는 들을 수가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건데, 어쨌든 그런 식으로 소리라고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그냥 가까이 있기 때문에 들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니까) 홍차 냄새가 멀리서 느껴져서 우리를 과거로 되돌리듯이 멀리에서 들려오는 어떤 음악, 어떤 노랫소리,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내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느끼고 있지만 사실 내가 뒤로 가고 있구나, 하고 자각하게 만드는 시스템으로 영화의 마지막 35분을 채우고 있다는 것.
영화적 경험이라고 하는 단위를 뒤틀기 위해서 이 감독은 영화의 형태를 뒤트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마지막 35분이 롱테이크라는 시스템으로 구축이 되어 있었던 것.
그것의 마지막 두 컷, 이 영화의 롱테이크 35분의 롱테이크만큼이나 첸의 얼굴을 보여주는 그 바로 다음 컷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 원칙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패닝샷이 설정되면 데쿠파주를 활용하지 않는 원컷의 패닝 샷으로 전개하고, 꿈이라는 신호가 등장할 때면 컷이 전환된다는 규칙을 세움으로써, 영화의 형태를 한 번 자의적, 임의적으로 재교육하고 재조정해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말씀드렸지만 단순히 ‘근대화 이후 카일리라는 도시에서 시간을 기록했다’, ‘롱테이크로 엄청난 야심을 보여줬다’ 이런 종류의 어떤 소재적이고 미학적인 문제도 물론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미지와 사운드를 배치하고 받아들이는 영화의 감각적인 패턴에 교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를 다시 요구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특별히 또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계속해서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다시 기차를 타고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첸의 얼굴을 기차 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말씀드렸다시피 그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어떤 일을 끝내고, 그가 기차에 잠들어 있는 이 시간이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 것인지, 어쩌면 징역에서 돌아온 시점이 아닐까,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이 남자가 꾸는 꿈 자체가 영화의 전체가 아니었을까, 혹은 지금까지의 영화가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 잠들어 있는 사람의 꿈이었고 그리고 어디서부터 깨어난 사람의 현실이었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이야기하게 된다.
확증할 수 없는 단계. 왜냐하면 영화라고 하는 화면은 평면이고 시제가 주어져 있지 않고 방향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평면의 성질, 속성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우면서 동시에 잠재우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맥락에서 <카일리 블루스>는 동시대 중국 영화의 가장 모범적인 영화 가운데 한 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영화라는 물질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우리에게 경험을 전달하는지에 대한 정치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