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Oct 16. 2023

<레이징 그레이스>와 <티처스 라운지>, 호러와 현실

2023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②

뛰어난 핍진성과 예리한 시선을 갖춘 각본은 종종 '장르' 영화마저 현실의 자리로 소환한다. <본인 출연, 제리>와 <포 도터스> 두 하이브리드 다큐에 이어, 할 말 많은 감독들이 분명한 목표를 갖고 만든 호러 장르 <레이징 그레이스>와 학교를 무대로 한 <티처스 라운지> 두 편을 추천한다. 역시 2023 부국제에서 가장 기꺼웠고 시의적절했던 영화들.




레이징 그레이스 (패리스 자실라)


Paris Zarcilla

자정에 시작해 대여섯 시간 이어져 흡사 밤새우기 차력쇼 같은 미드나잇 패션, 올해의 섹션 첫 영화로 상영된 <레이징 그레이스>. 'Raising' Grace인 줄로만 알았더니 ‘Raging’ Grace였던 제목부터 암시하듯 이주와 질병에 대한 차별, 특히 필리핀계 이민자들이 영국으로 특정된 국가에서 겪는 차별을 다룬다. 패리스 자실라 감독은 코로나 시기 내내 자신이 오랜 시간 살아온 영국에서 ‘병을 옮기는’ 불결한 동양인이 돼 배척당하고, 국가의 의료 체계에 온몸 바쳐 기여하는 필리핀계 의료인들이 감사는커녕 조롱당하고 괄시받는 차별을 목격하면서 엄청난 분노를 느껴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밝힌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는 목적부터가 분노하기 위한 영화, 호러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는 체하지만 ‘우아하게 분노하라’라는 엔딩 크레딧의 경구를 이행하기 위한 영화다.

(바로 그 때문에 기깔나는 호러를 기대했다가 예기치 못한 정치적 메시지를 마주한 여러 영화남들의 심기를 건든 것도 같지만ㅎㅎ 대체 동양인 남성들이 왜 이렇게 동양인 차별하지 말란 메시지만 보면 매번 새로이 버튼 눌려서 영화에 pc섞지 말라는 식으로 거슬려하는지 모르겠다. 평생 한반도 밖을 안 나가실 계획인 거라면 이해한다.)



딱히 갈 곳도 없고 비자도 없는 전 간호사 조이는 여러 집을 전전하며 입주 가정부로 힘겹게 일하고 있다. 엄연히 의료인인 그가 청소 및 가사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 이유는 딸 그레이스의 양육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으로 보인다. 영국인 의사인 생부는 본처가 따로 있는 유부남으로, 사실을 알고난 뒤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조이를 학대했고 조이는 딸과 자기 안전을 위해 양육비도 받지 않고 연을 끊은 채 살아가는 것.

비싼 비자 마련 비용을 위해 한 푼 한 푼 모으던 일상 중 갑자기 엄청난 기회가 생긴다.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입주 가정부가 되어 고용주 캐서린의 집안일을 해달라는 요청이다. 캐서린은 심지어 조이의 방을 따로 제공하고, 일종의 ‘심부름’을 조금 해준다면 주급 1천 달러를 별도 지급하겠다는 제안까지 한다. 필리핀어보다는 영어가 익숙해보이고, 자기 방은커녕 침대도 가져본 적 없이 캐리어와 옷장 속에 숨어 살아온 딸 그레이스를 위해서도 이 기회는 절실하다.


‘마담’ 대신 이름을 부르길 원하고, 치즈 샌드위치만 만들고 토속적인 필리핀 음식은 냄새도 피우지 말라고 하고, 조이가 없어지자 곧바로 절도를 의심하는 캐서린은 조금 까다롭고 평범하게 인종차별하는 영국인이지만 어쨌든 꽤 친절하고 문제없는 고용주다. 그가 이 집안의 실질적 권위자였으나 지금은 병상에 누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삼촌 나이젤을 차차 독살하던 중이라는 점만 빼면.

캐서린이 유산을 노리고 나이젤을 아예 죽이려고 한다고 의심한 조이는 캐서린이 출장을 간 사이 자기 의술에 필리핀의 민속요법까지 더해 불쌍한 노인 나이젤을 살려낸다. 몇 달만에 제대로 의식을 되찾아 감사를 표한 나이젤이 조이와 그레이스에게 캐서린보다 더 좋은 조건의 노동환경, 조이의 비자 문제 해결까지 약속하면서 모든 게 평화롭게 해결될 듯하지만.


알고 보니 나이젤은 캐서린보다 한 술 더 뜬 철저한 계급의식을 갖고 이를 숨기지도 않는 백인 남성이었다. 나이젤은 조이에게 ‘마스터 나이젤’로 부르라며 종용하면서도 그레이스에겐 ‘롤로 나이젤’ 즉 할아버지라고 부르라며 희한하고 변태적으로 차별적인 요구를 한다. 종내엔 조이와 그레이스를 분리해 그레이스를 제2의 글로리아처럼 키우려는지 조이를 불법체류자로 신고하기도 한다. 

제국주의 시절의 영국적 질서를 그리워하는 인종주의자인 그는 캐서린이 어렸을 때 캐서린의 생모를 내쫓아 정신병원에 평생 감금하고 그녀의 부만 빼앗아 가문을 재건하는 데에 이용했고, 자기 유모였던 필리핀 여성 글로리아는 귀향하지 못하게 평생 잡아뒀다가 죽은 후엔 아예 박제해서 유리관 안에 넣어둔 정신병자였던 것이다. 글로리아에 대한 나이젤의 기괴한 숭배는 이종 문화에 대한 혐오와 다를 바 없고, 열한 살에 엄마를 잃은 캐서린의 분노는 정당하다.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그레이스는 캐서린과 함께 반격을 시도하고, 캐서린의 바람대로 그 유서 깊은 가문의 저택은 글로리아의 미라와 함께 나이젤을 산 채로 불태우며 사라진다.



플롯의 전개 방식부터 연출까지 모두 괜찮은 서스펜스, 좋은 호러인 데다 시기적절하고 탁월한 발화이기까지 하다. 왓챠엔 종종 노골적이고 뻔한 알레고리라며 지적하거나 ‘차별의 집을 불태우는 필리핀 재롱잔치’ 운운하는 평까지 보이던데... 나는 이런 류의 영화들이 노골적이면 안 될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차별의 집을 불태우면 안 될 이유는 더더욱 없을뿐더러 이민자 출신 신예 감독의 재롱잔치다운 재미까지 잘 챙긴 편. 내겐 이날 영화들 중 최고의 작품이었는데 대체 어디에 이입해서 이 타당하고 직선적인 분노 앞에 홀로 냉철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은은한 차별주의자였던 캐서린의 ‘업보’ 청산이 충분했는지, 청산이 과연 가능할 일인지는 복잡한 문제겠지만 이민자 당사자인 패리스 자실라 감독은 후세대를 위해서라도 어떤 화해와 연대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알 수 없는 영국에서의 디아스포라 경험을 가진 그가 캐서린을 미워할 이유보다 용서할 이유가 더 깊다고 판단한다면, 나 역시 캐서린의 급선회를 설명하는 대사는 조이에게 건넨 이 한 마디로 충분했다고 본다.

네 권리를 찾았어야지. 나한테 맞서서라도.

글로리아의 비극적 인생에 부채감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이민자 가정부들의 군말 없는 순종을 불편해했던 백인 고용주 여성. 남자들의 초상화만 가득한 구역질 나는 가문의 영광을 불태우고 싶어하던 최후의 상속인. 엄마를 팔아넘긴 죄책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여자는 같은 처지에 처할 뻔한 이민가정의 어린 여자애를 불길 속에서 구원하고 그레이스는 다시 캐서린을 구한다. 두 딸의 연대가 단순하고 래디컬하면 뭐 어떤가, 바로 그래서 더 아름다운데.





티처스 라운지 (일커 차탁)



독일에서도 반복되는 교권 추락의 현장을 압축적으로 묘사한 일커 차탁의 <티처스 라운지>는 뛰어난 각본과 함께 배우 레오니 베네쉬의 너무 탁월한 연기 탓으로 보는 이의 마음에도 멍과 화를 남긴다. 이 지독히 일상적인 '학원물'은 소위 ‘금쪽이’들이 문제라는 단순 납작하게 가름한 서술보다 훨씬 복잡한 맥락을 그려낸다. 젊은 여선생인 카를라 노박의 역경을 다루는 무대를 구태여 다른 곳으로 확장시키지 않고, 오로지 학교에서의 모습만 고집스레 보여준 선택도 역시 좋았다. 이 우아한 세태극의 목적은 카를라라는 '사람'보다도 이 '상황'에 놓인 이들의 혼란과 오해의 역동을 보여주기 위함이란 것을 다시금 분명히 하는 듯하다.



폴란드계 이민 2세대라 주어진 노박이란 성에는 큰 정치사회적 함의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부단한 노력과 누구보다 밀도 높은 진심에도 불구하고 무관용 원칙, 민주주의적 투표, 프라이빗한 상담 등 허울 좋은 여러 조치가 반복되는 동안 말이 와전되고 심각성만 몇 제곱으로 가중되는 답답한 상황을 보다 보면, 초년생 여교사에겐 유독 험지에 가까운 교내와, 이민자 경계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의 정치사회적 정동이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카를라와 교육 철학이 거의 일치하는 교사는 친구인 상담교사 셈닉을 제외하면 같은 폴란드 출신의 두데크뿐이라고 봐도 좋은데, 그 둘만 공유하는 언어를 거절하고 교내에서는 독일어로 말하자고 권유하는 카를라는 그런 험난한 조건에서 자신에게 그 어떤 예외도 허용치 않는 원칙주의자다운 완고함을 보인다.

그 자신도 흑인이지만 아랍계 가정 출신에다 성적이 약간 부진한 아이 알리를 절도 사건의 가해자로 의심하다 역공당한 교사 리베르단테의 사례처럼, 칼로 나눈 듯 재단하기 어려운 씬들이 계속 반복되며 극의 섬세한 갈등을 겹겹이 더한다. '같은 소수자여도' 누군가는 남성이라, 이민 1, 2세대가 아니라 이미 완전한 정착에 성공한 세대라 다른 차별의 중첩을 경험하고. 교실이란 특수한 공간에서 아이라 혹은 어른이라서 피해자성을 더 쉽게 점유할 수 있는 조건을 사람들은 귀신같이 잘 찾아낸다.


결국 가장 영특했던 제자 오스카와 서로를 상처 입히고 상황이 점점 격화되는데, 학부모와 지갑을 훔친 용의자로 의심되는 동료 교사에 학생 신문부까지 다양한 행위자들이 개입한 고난은 벗어날 도리가 없는 궁지다. 거의 호러에 가까워지는 극도의 스트레스 하에서도 오스카의 강제전학만은 막기 위해 자기가 당한 불시의 폭행도 보고하지 않는 카를라의 아이를 향한 애착이 존경스러운 수준이다. 하체티나 제니 같은 착하고 속 깊은 제자들뿐 아니라 루카스니 톰 같은 전형적인 못되고 장난기 많은 남학생들에게도 끝까지 공평하게 최선을 다하는 교사의 모습. 그런 게 바로 ‘공정하다는 감각’ 아닐지...

정당한 자기 방어도 최소한으로만 하는, 정공법만 택하는 젊은 여성의 선택이 어떤 이들에겐 속 터질 수도 있으려나. 내겐 자기 삶의 태도, 가르치는 태도, 자기보다 어린 약자를 대하는 태도 모두 강박적으로 무결하고 올바르게 유지하려는 사람이 응당 취할 선택 같아서 즉각 이해됐고 그의 어설픈 면 역시 마음에 들었다. 기대만큼은 도덕적으로 정결하지 못한 환경에서도 정도만 걷기 위해 스스로 벼려온 사람이, 자기와 같은 줄 알았으나 까딱하면 어긋날 위험에 처한 연소자를 위해 취하는 보호의 자세 같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