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①
비전문 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하는 영화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직접 배우 워크샵으로 발탁한 일반인 배우들과 즐겨 작업하니 한국의 관객에게도 그런 일화는 낯설지 않은 사례다. 이번 부국제에서는 공교롭게도 ‘비전문 배우’를 넘어 자기 얘기를 자신이 연기한 일반인이 등장하는 영화, 연출적으로는 다큐-팩션-극영화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영화들이 꽤 있었다. 배우론과 연기하는 사람의 자세 그 자체에 대해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만들 뿐 아니라, 보편론으로 나아가는 재연이 아니라 만든 이와 찍은 이의 ‘시점’을 담는 재현을 시도한 작품들.
그중 두 딸이 IS에 합류하기 위해 가족을 버린 이야기 <포 도터스>의 어머니 올파,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 가 40년 넘게 번 돈 전액을 중국 보이스피싱 일당에 빼앗긴 70대 제리 류(제리 슈)의 <본인 출연, 제리>를 추천하려 한다. 각각에 담긴 실제 사연이 상상 이상으로 무거운 것들인데도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는 배우들은 상처에 소금을 뿌려야 피가 멎는다는 듯한 태도로 자신의 비극을 가장 신랄한 방식으로 공개한다. 내겐 이번 부국제에서 본 11편 중 최고의 두 편이었기에 개봉한다면 많이들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파에게는 네 딸이 있다. 아래 둘, 에야와 타이시르는 엄마와 함께 살지만 위의 둘, 고프란과 라흐마는 8년 전 가족을 떠나 IS에 합류해 지하디스트 테러집단 수장의 아내가 됐다. 영화는 ‘진작 체포되어 현시점에는 시리아 교도소에 16년형을 받고 구금된 딸들’이라는 비극적 결론에서 출발하지 않고, 모든 것의 시작점인 올파의 결혼부터 시작해 그의 소중하고 착한 딸들이 왜, 어떻게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이슬람 교리를 체화하게 됐는지를 더듬더듬 훑어나간다.
올파와 딸들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종교가 얼마나 추잡하고 악독하게 여성의 몸에 기생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올파는 어렸을 적 홀어머니와 언니들과 ‘여자들만 있는 집’에서 자라며 말 그대로 문을 부수고 집에 침입하려는 남자들의 폭력에 저항해야 했다. 그는 남자처럼 머리를 자르고 격투를 배워 마을 남자들을 패고 다녔고, 억지로 한 결혼 첫날밤 신방에 밀어 넣어졌을 때는 남편이 된 망나니의 강간 시도와 언니의 적극적 동조에 반격해 남편을 코너로 몰아 흠씬 패주고 그의 피가 묻은 시트를 성교의 증거로 내미는 여자였다.
그러니까 영화의 극초반부 목격한 올파는 튀니지라는 이슬람 문화권 국가의 막연한 ‘이미지’와 잘 이어지지 않는 아주 비전형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이었다. 아마도 튀니지의 ‘혁명’ 이전, 샤리아 율법이 여성들을 더욱 집요하게 통제하기 전 시대의 여자들은 (올파만큼 돌출적이진 않더라도) 현대보다 훨씬 나은 자유를 누렸으리라 상상하게 하는 그런 여자.
하지만 이야기가 차차 그와 딸들의 관계가 어땠는지로 나아가면서 올파는 곧장 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너희 아버지란 작자는 너희가 창녀가 될 거라 믿고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마. 너희는 이 올파의 딸이고 올파의 딸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해.”라고 힘주어 네 딸을 가르쳤던 좋은 엄마는, 딸들이 자라나며 각자의 취향과 영역을 구축하려 할 때마다 정확히 자기 엄마와 언니가 자신을 억압했던 그대로 통제한다. 그는 딸들이 2차 성징을 겪기도 전에 그들의 성적 방종을 극도로 경계하고 감시와 체벌과 폭언을 통해 딸들을 단속한다. 없느니만 못한 남편의 가정폭력을 떠나자마자 만난 전과자 남자친구가 저지른 (암시된) 성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네 딸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보다는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당당한 변명이 뒤를 잇는다.
반면 이미 장성한 에야와 타이시르는 ‘엄마는 우리 때문에 남자친구를 잃었다고 생각해서 우리를 탓했다’고 증언하거나 언어적 신체적 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이뤄졌는지를 솔직하게 얘기하며 기묘한 태도를 유지한다. 엄마의 전 남자친구 역의 남성 배우가 겁을 먹을 정도로 태연하게 객관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는 에야의 - 연기자로서의 - 시선은 마치 거기서 자기를 해리시킨지 오래인 사람인 것처럼 아주 서늘하고 섬뜩하다. 그들은 엄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언니들을 떠나게 한 데에 엄마의 지분이 얼마나 될지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곰곰 따져봤으리라.
그러나 영화는 올파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다. 대신 올파에게 ‘몸’이란 ‘넘어갈 수 없는 선’이고 ‘위험’ 그 자체이며 암묵적으로 ‘미래 남편의 것’임을 밝히는 배우들과의 대화를 경유해 연출자의 시각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올파가 직접 말했듯 그는 딸들에 대한 (특히 성적인) 통제를 여성 계보를 타고 이어져온 문화적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런 착각 혹은 무지는 올파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영화는 첫딸 고프란과 둘째 딸 라흐마가 엄마와의 갈등을 못 이겨 극단 이슬람주의를 경유해서라도 ‘자유’를 얻으려 했다고 해석한 것처럼, 올파의 통제 역시 여성에게만 유달리 더 잔혹한 이슬람 문화권의 전통적 관습법과 성장기의 트라우마 (남성의 침범) 때문임을 조심스레 제시하며 이해의 지평을 넓힌다. 개인을 탓하지 않으며 그의 관습적/관념적 사고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규명하려는 영화의 탐구적 태도가 혁혁히 빛나는 순간이다.
여기에 여성을 통제하는 종교적 금기에 대해 항상 최선의 반격을 해왔던 여성들의 역사라는 맥락이 얹어진다. 히잡이 금기라서 길거리에서 경찰이 히잡 쓴 여성을 잡아가던 시기에는 튀니지 여자들이 모두 저항의 의미로 히잡을 썼다. 그런데 지도자가 교체된 튀니지 혁명 후에는 다에시 국가를 주창하는 래디컬한 지하디스트 집단이 득세했고, 그들은 시장과 골목에서 공공연히 몸을 가리지 않은 여성들을 비난하며 히잡을 넘어 눈만 빼고 모든 부위를 가리는 니캅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고프란은 별생각 없이 되팔기 위한 공짜 니캅을 받으러 갔다가, 단지 ‘예쁘기 때문에’ 니캅을 씌워준 이맘(지도자)에게서 “이 여성은 달이다”라며 극찬을 듣는다. 그때부터 고프란은 그간의 방종(이라며 엄마와 다른 여자들이 믿게 한 것)과 세속적 죄를 모두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되면서 점점 더 극단적인 교리에 귀의하기 시작한다. 한때는 락을 좋아하는 고스족 소녀였던 라흐마도 마찬가지였다. 라흐마는 다에시즘에 점점 더 깊이 공명하게 되면서, 몸 전체를 가리는 니캅은 쓰지 않고 머리카락만 가리는 엄마를 부끄러워하고, 몸을 가리지 않는 여자는 남성에게 욕망당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는 관습적 수치심을 엄마에게도 심어 내면화하려는 여성 지하디스트로 변모한다.
결국 막내 타이시르의 말마따나 국가와 종교의 금기는 언제나 여성을 억제하기 위해, 금기를 통해 이상적인 여성상을 규정하기 위해 존재해왔고 올파와 딸들의 관계 역시 이 덫에 걸렸을 뿐이다. 영화는 실제 발생했던 대화를 가족들의 기억에 의존해, 세심하고 기묘한 다이얼로그로 재연하는 방식으로써 이 ‘덫’을 거듭 설명한다.
“딸들이 종교와 신이라는 급소를 찾아서 반격했네요. 힘의 균형을 뒤집었어요.”
“맞아, 내가 총 쥐는 법을 가르쳤고 애들은 날 조준했어.”
영화의 시간은 비선형적이고, 고프란과 라흐마는 전문 배우가 연기하는데, 에야와 타이시르는 자신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재연 배우처럼 위치해 있다. 올파는 자기 자신을 연기할 배우(힌드 사브리)가 “올파의 감정이 격해질 때만” 개입한다는 전제 하에 간헐적으로 출연한다. 올파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다가, 배우가 자신을 연기할 때 첫날밤을 얼른 해치워버리라는 언니를 따라하기도 하고, 딸들의 재연을 못마땅해하는 스크린 밖의 방해꾼으로도 등장하며 극의 구석구석을 제멋대로 탐험한다.
동일시와 투사 그리고 재현과 틈입이 수시로 일어나게 만드는 이 혼란스러운 구조는 본래 정확한 구술 기록을 위해 고안되었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는 본래의 역할을 넘어 전문 배우와 비전문 배우 간의 라포의 시작점이 될 뿐 아니라, 종내엔 거의 가족 심리치료에 준하는 효과를 낸다. 에야, 타이시르, 올파가 자기 자신 또는 가족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돕고 이해시키기 위해 가족의 지난 습관들과 당시엔 털어놓지 못했던 상처까지 소상히 이야기할 때, 올파는 10년은 족히 지나서야 자기가 몰랐던 자기 딸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말 즈음 올파는 고프란 역의 배우에게 돌연 ‘내가 엄마라면 어떨 것 같아?’하고 묻는다. 애교 많고 얌전한, 다정하고 곱슬머리였던 첫딸과 놀랄 만큼 닮았다던 배우가 잠시 머뭇거리자 올파는 재차 ‘나라는 사람이 엄마로서 마음에 들어?’라고 묻는다. 필시 영화를 찍는 전후로 ‘진짜 딸’들에게 언젠가 확인하고 싶어졌을 이 질문은 이젠 곁에 없는 고프란과 라흐마를 상상하게 하며, 동시에 바로 옆에 앉은 남은 딸들 에야와 타이시르까지 동요하게 한다.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는 것처럼 카메라를 등진 올파의 뒷모습은 ‘나를 사랑하는 거 말고 좋아하냐고’ 물었던 <레이디버드>의 뒷모습과 겹쳐 보인다.
“제리는 근면성실한 엔지니어로 40년 이상 재직하다 퇴직한 지 딱 1년이 됐을 때 자기의 전 재산을 - 말 그대로 예적금과 주식 계좌와 보험 계좌에 든 모든 돈, 심지어 그의 성실한 인생을 상징하는 퇴직금까지 모든 돈을 -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직접 송금한다.”
기막힌 사기 사건의 표면만 보면 이렇게 한 줄로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리가 살아온 인생은 그리 단순하고 명쾌하지 않다. 퇴직 이후의 상황에만 간단히 몇 줄의 맥락을 더해보자. 그는 몇 년 전 부인 캐시와 이혼해 혼자 살고 있고, 세 아들들 제시, 조나단, 조슈아는 각기 인생을 꾸리느라 바빠 심신 건강해 보이는 아빠에겐 그다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중국의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바로 이 점을 파악하고 그의 어둡고 약한 면을 끈질기게 공략했다.
스스로 경찰 장 씨, 우 형사로 소개한 사기범들의 수법은 이렇다 : 먼저 제리가 전재산을 맡긴 미 은행의 중국계 지점장이 돈세탁의 주범이라고 의심하게 만든다. 그에게 이용당한 계좌를 영영 빼앗기지 않으려면 제리는 아무도 모르게 장 경위와 우 형사에게 협조해야 하고 황당한 스파이 미션 같은 것들도 종종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제리를 누구에게도 의견을 구할 수 없는 상태로 고립시킨 후, 그들은 엄청나게 자주 전화해 제리의 안부를 묻고, 식사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며 친근하게 굴고, 약은 잘 챙겨드셨냐며 제리를 챙기고, 중국에 오면 부모님 고향을 구경시켜 드리겠다고 제안하거나 이혼한 캐시와 다시 합치는 건 어떻냐는 제안까지 건넨다.
가끔씩만 찾아오고 아빠의 이상한 상태에는 큰 관심을 둘 여력이 없는 아들들보다도 다정한 장 경위의 말을 따라 제리가 실제로 캐시 집에 꽃을 사들고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심경이 복잡해진다. 그러니까 이 외롭고 약하고 혼자된 노인에게는 (본인도 잘 몰랐겠지만) 서로를 돌보고 친밀히 지낼 친구가 간절히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성실하고 진지하고 수 쓸 줄 모르는 착한 사람들이 자주 그렇듯 사람을 잘 믿는다. 그건 요즘 세상에선 장점이 될 수 없는 특질이고 그는 그 믿음 때문에 40년간 이민자로서 고되게 노동한 대가를 잃었다. 몇 달 간 계좌를 하나씩 하나씩 해지해 사기범들에게 죄다 송금하고, 뭔가 이상하단 걸 감지한 은행 직원의 아주 소극적인 도움의 손길도 거부하고, 종내엔 아들의 새 집 계약금으로 쓸 돈까지 모조리 보낸 후에, 그들이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자 그제야 자기가 당했다는 걸 깨닫는 제리. 그때 홀로 서 있는 제리의 등 너머로 지는 석양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허탈하고 슬픈 장면이다.
그가 잃은 총액은 988,000달러의 현금이었다. 이제 그는 다시 제로 베이스의 디아스포라 노동자가 되어 우버이츠 기사로 일하고 열심히 돈을 번다. 현시점 그는 (아마도 생활비와 의료비 등을 감당할 수 없어) 미국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가족들을 두고 고향인 대만으로 돌아간 상태다.
영화가 이렇게만 끝났다면 더할 나위 없는 비극을 단순 ‘재연’한 때깔 좋은 서프라이즈에 그쳤겠으나, 돌부리 틈에 핀 풀꽃 같은 제리의 활기와 회복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라 결국 해피엔딩을 이룬다. 그러나 영화는 사기 피해 이후의 ‘진짜 결말’ 즉 제리가 잃은 돈 대신 가족들과의 따뜻한 교류를 되찾고,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고 즐거워했던 일인 연기를 7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시도했고, 자기 이름이 들어간 영화를 찍게 되는 희망찬 이야기로서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인 출연, 제리>의 진짜 가치는, 역시 <포 도터스>와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배우 본인과 연출자의 시점 속에 자리한다.
그 누구도 피해자인 제리를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분명 제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게 왜 당했냐’고 말하고 그의 기막힌 사연을 함부로 재단하고 소비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실제로 제리가 직접 참석하신 부국제 GV에서도 내 또래 남자가 ‘저는 00한 내용의 몇 번째 전화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사기라는 걸 바로 알았는데 제리는 어디서 위화감을 느꼈는지, 못 느꼈다면 왜 못 느꼈는지’ 묻기도 했다…^^ 우리 줄 사람들 다 한숨 쉬었다 인간아 인간아… 그게 당사자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의 질문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정말 굳이 그 자리에서 뱉어야만 할 질문일까요? 직접 당한 피해자이자 70세 넘은 디지털 약자 앞에서? 님은 멍청한 스캠 수법에 절대 속지 않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젊은이라서 참 좋겠습니다;;) 그런 반응을 유독 의식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프로듀서인 둘째 아들 조나단 슈, 그와 오랫동안 페어로 일해온 로렌스 첸 감독 두 사람은 정말로 다정하고 보호적인 태도로 제리 슈라는 한 인간을 이해할 길을 마련하는 데에 총력을 다한다. 제리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어떤 것에 얼마나 취약하고 한편으론 얼마나 강건하고 고집 있는 사람인지. 어떤 자세로 자기의 인생을 뒤집어버린 이 사건을 소화하고 있는지까지 설명하기 위해.
특히 자기 자신을 연기한 아들들이 ‘아빠가 이상해진’ 몇 개월 동안 그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못하고) 사기범보다 아빠에게 다정하게 굴지 못했던 사실을 절대 숨기지 않고 잔인하리만큼 적나라하게 그리는 부분들에선 형제들의 밀도 높은 미안함과 자기반성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이 솔직함은 자식 입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눈물 한 번 더 흘리게 되는 부분. 이건 전적으로 제시, 조나단, 조슈아에 의한, 아빠를 위한 다정이니까.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다시 돌아가도 혹은 나였더라도 그렇게 어느 정도 무심하고 어느 정도 귀찮아하는 자세였으리란 걸 십분 이해하니까.
영화의 흥미로운 도입부로도 다시 돌아가보자. 오프닝은 제리가 찍은 가족들의 홈 비디오, 그리고 교회 연말 무대에서 혼자 쓴 코미디 각본으로 연기하는 제리를 찍은 비디오 푸티지였다. 거기서 그는 계속해서 돈에 대해 농담하고 돈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돈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황홀해하고 부인 캐시에게 사준 반지, 목걸이, 롤렉스 시계나 명품 티셔츠를 끊임없이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로 등장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공한 이민자와 그의 자본이 맺는 관계에 대한 명쾌한 코믹일 줄로만 예상했건만. 그랬던 그를, 성실한 노동의 가치와 그렇게 아등바등 구축한 자본을 긍정하면서도 돈을 쓸 줄은 몰랐던 그를, 결말 이후 다시 되돌아보면 쓸쓸하고 깊은 울림이 남는다.
하지만 당사자인 제리 슈(영화 속에서는 제리 류) 어르신은 놀라우리만큼 차분한 태도로 자기의 새 삶을 받아들인다. 보는 관객이든 가족이든 타인의 마음은 찢어지지만 그는 그 큰 돈을 모두 잃었다는 자책과 후회를 겉으로 티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미 지는 해와 함께 모든 걸 흘려보낸 것도 같다, 진심으로. 미국에서 방출되다시피 귀향하며 그는 “캐리어 두 개만 덜렁 들고 왔다가 다시 캐리어 두 개만으로 돌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며 웃는다. 제리의 미국에서의 50여 년은 삶에 대한 보편적이고 거대한 은유인 것만 같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은 실패가 아니라 그저 공수래공수거의 이치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의연함에선 숭고미까지 느껴진다.
게다가 그의 삶은 아직 중단되지 않았다. 비록 부분 뇌출혈이 발견되고 음식 배달을 해야 하고, 아들들에게 유산처럼 물려주고 싶었던, 단순히 돈을 넘어 노동의 대가로서 더 큰 의미를 갖던 그 돈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에겐 가족과 함께 영화를 찍는 큰 프로젝트가 남았고 되살아난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남았으니. 코믹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눈물 펑펑 나게 하는 휴먼 드라마인 동시에, 최고의 긴장감을 주는 서스펜스이자, 영화 속 인물의 삶에의/연기에의 태도까지 경애 어린 마음으로 되새겨보게 만드는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