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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Nov 13. 2023

<클로즈 유어 아이즈>, 영화의 죽음 이후 태어났다면

에무시네마 2023 유럽아트하우스 영화제 (1)

시네마의 실종을 말하면서 ‘잃어버린 필름’이란 흔한 소재를 써먹는 것보다 더 극적으로 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 촬영 중 자기 주연 배우를 잃어버린 감독이 33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그를 찾아 나서기. 50년간 단 네 편의 장편을 제작한 빅토르 에리세의 자전적 작품이란 영화 외적 서사로 더 주목받는 듯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내러티브는 오직 그 실종만이 전부다.


시네마의 상실 혹은 더 나아가 시네마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영화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범람하는 시기다. 스콜세지나 미야자키 하야오, 그보다 젊은 감독 중엔 올리비에 아사야스나 PTA, 웨스 앤더슨 혹은 조던 필 등이 다른 길을 경유해 영화 세계의 쇠락을 아쉬워한다.


그들보다 더 직설적으로 찍는 일 자체의 아름다움에 접근하고, 포장을 덧대지 않은 영화 그 자체를 소재 삼는 영화들 역시 점점 더 많이 보인다. 가장 최근에는 데미안 샤젤의 <바빌론>이나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더 멀리 가자면 장예모의 <원 세컨드> 정도가 예시가 될 법하다.

그 옛날 <시네마 천국>을 기리며 한층 더 비장한 진단을 내리고 ‘진짜 시네마 천국‘을 추억하는 영화들. 영화의 존재론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자기 영화의 가치를 지키는 일의 고결함을 자전적으로 풀어가는 작가/감독들의 전철에 빅토르 에리세 역시 (의도치 않았겠지만) 자연스레 합류하게 된 것 같다.

언급된 작품들의 퀄리티나 표현 방식의 차이를 논하기도 전에 약간의 억울함이랄까 반감이 드는 건 아무래도, 그들이 시네마에 ‘이미 정해진 죽음’을 비장하게 선고해버리는 방식이 이 시대 젊은 영화 팬의 대다수를 배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잔치를 한참 전에 다 끝내놓고 아 그때가 좋았는데, 그땐 좋았고 그것만이 진실이었는데, 이제는 다 거짓되고 저속한 것들만 남아서 너희는 옛날의 그 진실된 시네마를 간접적으로 볼 수만 있을 뿐 그 풍요를 ‘알진’ 못하리라고 끝없이 아쉬워하는 옛 사람들을 보면서 대체 무슨 감동과 경이를 느껴야 하는 걸까.

지금 남은 것은 다 ‘진짜’의 모방이고 폐허란 말인가 싶어질 정도로 꿋꿋한 외면이, 대체 언제부터 ‘위기’였는지 감도 안 잡히는 시네마와 영원히 작별인사 중인 것 같은 태도가 얄밉고 너무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만든 이의 50년어치 역사를 알아야만 울림과 효용을 갖게 되는 영화가 과연 극 영화 그 자체로 매력 있는 영화일까. 사실 그이의 역사를 알게 뭐란 말인가 빅토르 에리세가 바로 전작인 <햇빛 속의 모과나무>를 만들었을 때 나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는데….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의 산업적, 도구적 격변을 아쉬워하고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거나 뒤에 남겨진 이들에 대해 시종일관 따뜻한 애수 섞인 톤을 유지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인 영화인들은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과거를 추억하고, 잃은 줄 알았다가 다시 재건된 장치와 공간을 반기고, 잃은 이들의 사진을 손끝으로 만져보며,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이 지닌 혼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 속 미겔 가라이와 훌리오 아레나스가 1990년까지 만들던 미완의 영화 <작별의 눈빛>은 조악했고 오리엔탈리즘 범벅이었으며 가장 힘준 마지막 응시조차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뻔했다. 어린 중국계 혼혈아 딸의 눈빛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위안을 얻고 싶어하는 유대인 아버지의 죽음이라니. 훌리오가 혹시 이 영화 개봉을 회피하고 싶어 도망간 건 아닐까 반쯤 농담으로 말하게 될 정도로 상투적이고 심지어 착취적이다.

극 중 극 <작별의 눈빛>을 찍은 사람들은 그보단 낫게 그려지지만, 역시 기대보단 못하다.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리던 차오수(주디스)와 그 스크린을 바라보며 눈을 감아버린 가르델(훌리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눈을 감아버린 아나의 교차 정도가 그나마 시적인 부분이다. 훌리오를 처음 진찰한 신경정신과 의사와 미겔 가라이의 다이얼로그처럼 영화를 기리는 ‘영혼’만 남았고, 영화의 알맹이(이야기)는 전혀 강렬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 ‘진짜 영화의 죽음’을 느낀다면 너무 못된 걸까.

너희 그래도 잘 따라오고 있지? 하며 물어오는, 전 세대 영화인으로서 후세대에 따뜻한 안부를 보내려는 의도가 체감되는 영화도 물론 종종 있다(최근에는 그것을 스콜세지나 하야오의 신작에서 느꼈다). 그들과 달리 어쩔 수 없는 물리적 시대적 차이를 두고 뒤늦게 도착한 이들을 고려하지 않는 이런 영화도 물론 있을 수 있다. 영화의 역사를, 그것과 혼화된 자기의 개인사를, 그 둘의 상실만을 슬퍼하느라 너무 바쁜 이들. 심경은 이해하나 경의만 보내기에는 이쪽도 여유가 없다.


내게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저 객관적으로 재미가 없고 설득력도 약한 영화다. 영화라는 매체의 미학적 역사적 아름다움을 말하는 작품들이 이렇게나 넘쳐나는데, 과연 이 영화가 빅토르 에리세라는 이름값을 떼고도 개중 수작이라 평가받을 수 있을까. 부국제를 빌어 화려하게 부활한 이 영화를 극찬한 (특히 내 또래 씨네필) 모두가 감독의 전작을 원래부터 알고 있었을지, 평판과 권위가 강력하게 작동한 예시는 아닐지 심히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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