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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Nov 13. 2023

<일층 이층 삼층>, 아름다워 무너지는 삶이라는 게

에무시네마 2023 유럽아트하우스 영화제 (2)

난니 모레티의 미개봉작 <일층 이층 삼층>은 이탈리아 도시 중산층 가족들의 집이라는 일상의 무대를 설정하고 세 가정의 일대기를 풀어가지만 우리가 받는 건 현대의 통속화 그 이상이다. 결국 화해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삶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또 용서받지 못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


삼층의 판사 부부 비토리오와 도라의 아들 안드레아가 음주운전으로 행인 테레사를 치어죽이고 일층의 루초와 사라 가족 집으로 돌진한 날, 이층의 모니카는 남편 조르조 없이 혼자 병원에서 딸 베아트리체를 낳는다. 옆집 노부부 레나토와 조반나에게 딸 프란체스카를 자주 맡기던 루초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레나토와 프란체스카가 사라졌다 돌아온 후 성폭력을 의심하고 사이 좋던 두 가정은 심각한 불화를 빚는다.


사라는 만류하지만 루초는 자기가 믿는대로 보고 싶어하며 계속 레나토를 공격할 근거를 찾으려 그 손녀인 샤를로트를 이용하다가, 어린 샤를로트가 품은 연정에 못 이기는 체 넘어가 성관계를 갖는다. 출산한 모니카는 자기도 엄마처럼 환영을 보는 정신이상자가 될까봐 걱정하며 일 때문에 항상 출타 중인 조르조를 그리워하고, 가택연금된 안드레아와 비토리오 부자는 끝없는 갈등을 빚으며 누구 한 사람 편을 들 수 없는 도라를 마음 아프게 한다.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해 5년 후, 10년 후를 차례로 조망하며 체류 중인 난민들을 불법화하고 내쫓으려는 폭력 시위가 일어나는 현재의 로마까지로 나아온다. 레나토와 조반나, 비토리오까지 나이든 이들은 죽어가고 아이들은 태어나 자란다. 영화의 시간이 흐를 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각 집의 이야기를 이끌고 설명하는 주체가 되는 여자들이다. 미쳐가는 여자들, 세상을 알아가는 여자들, 가정의 룰을 지키다가 결국 거기서 벗어나는 여자들. 그들의 눈빛만으로 극이 흘러갈 수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망상증을 염려하는 모니카의 불안은 그 정신증이 모계 유전과 출산이란 경로를 통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의사는 그의 어머니와 그는 별개의 인물이며 출산은 망상과 무관하다고 안심시키려 하지만, 결국 모니카는 두 번째 아이를 낳기까지 점점 심해지는 환상을 겪었고 그의 딸 베아트리체 역시 엄마의 환영일지 아닐지 모르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조르조의 사이 나쁜 형 로베르토가 진짜 찾아왔던 것인지 모니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를 만큼 심각한 증상은 모니카의 지극한 외로움에서 기인했다.


이 외로움은 비단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없어서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첫 출산 이래로 오로지 아이를 돌보고 남편을 기다리며 집 안에 유폐된 성인 여성의 ‘세상과 만나지 못한’ 외로움이기도 하다. 모니카의 불안을 계속 자극한 까마귀가 흉조이면서도 지혜의 전령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 끝내 집을 떠난 그가 특정한 목적지 대신 ‘여행을 갈 거야’란 사실만을 알리고 다시 영영 사라진 것 등은 ‘가정의 천사’가 마땅히 가졌어야 할 자유에 대한 난니 모레티의 복원 시도를 암시한다.


도라와 세상과의 조우는 조금 더 격정적이다. 그가 사별한 비토리오의 옷을 난민들의 임시 숙소에 기부하러 갔을 때 극우 청년들의 화염병 시위를 마주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깨어난’ 기분을 겪는 것이다. 길가에서 쓰러져 보호소 직원의 도움을 받고 욕조를 쓰고 도라는 비토리오의 죽음 후 계속 그랬듯 그의 자동응답기에 대고 대화를 걸고, “이 건물 주민들에게 ‘깨어나세요’라고 소리치고 싶다”면서 “세상은 이 건물보다 훨씬 넓다”고 벅차한다.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마다의 행과 불행을 ‘바깥에서’ 보게 된 그 여자는, 기어이 그 유형의 삶을 거부하고 농사 짓고 노동하는 삶을 선택한 아들까지 제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의 안드레아가 자기가 알던 착한 아이가 아니란 걸 드디어 인정했고, 그래서 과거의 음주운전 피해자 유족에게 늦게라도 찾아가 사과하자 그이가 안드레아가 몇 달 전부터 성실히 사과해왔음을 알리면서 또 한 번 현재의 아들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애가 아닐 수도 있단 사실을 새로이 깨달은 것.

아들이 자신과 남편의 룰을 떠나 스스로 성숙했음을 마음 깊이 이해한 도라는 비토리오에게 “여자에게 아들과 남편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그래도 난 당신 없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애를 버렸지. 하지만 이제는 우리 규칙이 아니야. 이젠 내 규칙에 따를 거야”라면서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아들 안드레아를 찾아간다.


모자가 오랜만에 서로를 제대로 마주보는 마지막 장면이 반드시 극적인 화해로 이어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라는 이제 아들을 별개의 사람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되었고, 그 타인을 사랑하는 일을 남편 눈치 보며 몰래 하지 않아도 된다.


앞서 10년 전 두 여자가 만났을 때, 모니카는 베아트리체의 첫 목욕을 도와주는 도라에게 ‘어른과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방문이 몹시 기껍다는 티를 낸다. 비록 도라는 곧 감옥에 가게 될 아들 안드레아의 일에 온 신경이 쏠려 있지만, 그런 말을 하는 모니카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고 상냥하게 초보 엄마를 돕는다. 이 조우는 서로 대립하고 폭력을 쓰고 불신하는 남자들 - 레나토와 루초, 비토리오와 안드레아, 조르조와 로베르토 -의 모습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평화로운 연대다.



일층의 루초-사라 가족만이 루초가 일으키는 온갖 사고 쪽으로 초점이 가 있는데, 그럼에도 루초의 멍청하고 충동적인 짓들이 대체로 딸에 대한 강한 애착과 보호 본능에서 비롯된 것임을 영화는 계속해서 일깨운다. 우습게도 루초는 다른 가정의 남자가 자기 딸을 성적으로 유린했을까봐 걱정해 울기까지 했으면서, 동시에 다른 집의 훨씬 어린 여자를 거부하지 않고 감정적 육체적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성폭력 혐의로 재판에 서고 있다. 레나토를 향했던 그의 불 같은 분노는 기실 남성인 자기 자신에 대한 무의식적 불신에서 촉발된 것임이 암시되고, 딸을 향한 진실된 사랑은 이 모순 앞에 힘을 잃는다.


사라는 별거 중인 남편의 억울함이 없도록 재판에 성실히 출석하고 그의 안정을 돕는다. 10년 전 루초의 폭언에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한 후 홀로 딸을 데려가던 여자의 분노한 얼굴은 이제 차분한 가장의 얼굴처럼 변해 있다. 프란체스카는 십 대 후반이 되어 집을 떠날 준비를 하며, 샤를로트 또한 홀로 성장하고 루초로 인한 모든 감정을 졸업하게 되면서 둘은 진정한 용서를 나눈다. 여성들의 용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아집을 내려놓고 자신이 틀렸었단 걸 인정하는 루초는 딸의 품에서 오열하며 한 발짝 더 나아간다.

​​


난니 모레티는 이 모든 사건들이 발생하는 집이라는 공간을 고집스레 떠나지 않으면서도 집을 절대 한 번에 풀 숏이나 컨티뉴어스 숏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집은 조각조각 분해되고 파편화되어 이어지지 않는다. 도라는 사랑하는 남편 비토리오를 화장실에 가두고 모르는 체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며, 모니카는 함께 침대에 누웠었고 자길 부엌에서 기다린다고 했던 로베르토가 없어지자 크게 동요하고 실망한다. 사라와 루초의 침실은 아예 중반부터 구분되어 있으며 아이들이 자는 방과 거실의 이음새도 매끄럽지 않다.


요컨대 이 가족 드라마의 원제는 ‘삼 층’ 즉 집의 구조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그 집 안에 어떤 것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는 고의로 불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가장 전위적이고 정치적이고 독창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평가됐던 난니 모레티는 최근에는 주로 일상, 가족, 통속에 집중하며 흔한 상업영화 감독처럼 변절했다는 실망 섞인 평을 들어왔다. 하지만 <일층 이층 삼층>은 그가 천착해온 주제들 - 가부장적 권위의 해체, 이탈리아의 위기, 국가와 가정의 불안 -에 여전히 충실함을 보여주는 영화다. 게다가, 일단 압도적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무심한 ‘5년 후’가 반복되는 동안 차오르는 감정만으로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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