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도로 건조하게 해부한 이 시대 한국남성의 초상. 선량하나 무례하고, 서투르나 징그럽고, 귀엽고 싶으나 무지해도 너무 무지한.
집주인 ‘형님’의 따사로운 거실을 바깥 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객식구 기홍, 젊은 커플의 원룸을 넋놓고 관음하다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하는 솔로 기홍.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이 그토록 많으며, 저 이들과 나 사이에 이렇게 뚜렷한 계급의 단차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감각하며 살아가지만, 기홍은 의외로 열등감에 강력하게 지배받지 않는다. 그저 30대 중반에 회사를 뛰쳐나와 소위 ‘노가다꾼’으로 일하다가 최근 일감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조금 주눅들었을 뿐. 저보다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조금 더 베풀 줄 아는 너그러움도 요새는 아무나 가진 게 아니다.
그렇기에 기홍이 피아노학원의 어린 여자 사장에게 찍찍 던지는 반말이나 고향 친구 앞에서 부리는 허세, 한참 어린 여자에게 자기 집에 놀러오라며 일단 던지고 보는 좆같은 플러팅도 대충 밉지는 않게 볼 수 있다. 아 저사람 정말 뭘 몰라서 그렇구나. 진짜 몰라도 뭘 너무 모르고 이 시대의 예의에 대해 배운 게 없어서. 그냥 어느 순간 멎어버려서.
그러니까, 어떤 이의 삶은 너무 괴이할 정도로 평범해서 그걸 펼쳐놓기만 해도 최고의 스릴러가 되는 법.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기홍 주변의 이상한 일이 아니라 기홍을 평가하는 영화 밖 사람들 각자의 상식에서 발원한다. 자꾸 이상한 말을 하고 이상한 태도를 취하며 선을 넘어갈듯 말듯하는 기홍은 모두를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기홍을 낮추어보게 하며, ‘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의 전형성이 뒤틀릴 때 보는 이는 당황하게 된다.
기홍은 전혀 시적이거나 영화적이지 않다. 기홍보다 섬세한 경준은 아영의 클래식 연주를 듣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클래식 라디오 채널을 틀며 혼자만의 정념을 이어갈 줄 알지만, 기홍에겐 애수도 취향도 고민도 깊이도 없다. 그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며 딱 해야할 만큼만 성실하게 일한다. 그는 노가다판의 파워게임을 군대에 비유해 설명하는 인물이다. 그는 엘리트가 아니다. 평생 영특함에 대한 기대를 받아본 적도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대구 출신의 30대 장남이란 점을 차치하더라도) 나와 너무 다른, 거의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신념으로 견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본연의 선함 때문에 송하나를 용서하고 측은지심을 갖는다. 집 없는 송하나에게 아픈 데는 없냐, 어디서 지내는 거냐 묻고 택시비 명목으로 합의금이나 다름없는 고깃값을 돌려주기도 한다.
이제 비로소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가 이해되는가? 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좋아지는가? 아니요.
그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는가? 조금은.
그가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었는가? 확실히.
사실 ‘진짜 괴인’은 기홍의 ‘형님’인 집주인 정환 아니었을까. 기홍이 <이니셰린의 밴시>의 파우릭이라면 정환은 <버닝>의 벤과 같다. 그는 <버닝>에서 종수가 벤을 표현한 대로라면 적당히 개츠비다운 인물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수상하게 여유로운 젊은이. 늘 틀어져 있는 TV의 무의미한 소음, 전혀 어울리지도 멋있지도 않은 비싼 바이크와 턴테이블, 역시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대한 나름의 개똥철학, 시간을 때우기 위한 비싼 취미인 테니스.
정환은 자기 권태를 이기지 못해 자기 주변의 모든 이를 ‘재미있는 일’의 소재로 흡수하려 든다. 그는 하나의 버릇에서 제멋대로 애정결핍을 읽어내려다 하나의 단호한 말에 차단당하고, (그 자신은 몰랐지만) 부인 현정의 멸시를 받는다. 정환에게 하나나 기홍이 살아 있는 진짜 사람이란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자기에게 어떤 스펙타클을 제공할 수 있을지만 궁금할 뿐이다.
영화는 이런 정환을 심판의 자리에 놓고 어느 정도는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 듯하다. 카센터 노동자의 입을 빌려 ‘2002년 월드컵을 보고 자란‘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는 30대, 40대 초반쯤 된 애들‘이란 다분히 적의에 찬 설명을 끌어온다. 정환보다 조금 더 연상인 카센터 남성의 눈에 정환 같은 사람들이란, 주입당한 이상이 많아 눈은 높고, 능력도 없으면서 물려받은 돈으로 좋은 것들을 향유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일하는 기홍처럼 드물게 알찬 젊은이가 아닌 한량이며 얄미운 도둑놈이다.
그러나 그 남자의 설명이 길어지고 드라마틱해질수록 마음 속에선 ‘정말? 너희는 뭐 그렇게 열심이었어?’하는 의심이 피어나기도 한다. 거기서 거기인 인간들끼리 돌 던지지 말라는 일침에 공명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단, 타인을 잘 모르면서 세대나 계층 같은 조건에 따라 유형화하고 함부로 평가하는 행위를 이 영화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부박하고 별볼일없고 멋없는 일로 그려내고 있어서 나의 모름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무지해서 무례한 사람들의 속사정을 알아주지 않기로 결심한 채 살아왔다. 20대 여성인 내가 세상의 무례를 견디면서 그 이면까지 이해할 여력은 도저히 없다고, 나는 가장 먼저 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내 또래 여성들에게 가장 예의없었던, 제대로 된 한 사람의 인간 취급해주지 않고 깔아뭉갰던 사람은 보통 더 나이가 많은 남성들이었기에 그들을 모조리 한데 묶고 적대하는 것으로 나의 경계를 지켜왔다. 한 사람 한 사람 뜯어보고 탐구하며 그들의 사연을 알아가기엔 너무 지치고 상처받아서. 이미 그들 중 가장 시끄러운 자들이 남들도 다 겪는 고통을 저만 겪는 줄로 착각하고 눈물 질질 짜며 너무 많은 말을 해대고 있어서.
그런데 <괴인>에는 지겨운 항변이나 자기연민이 없다. 대신 ’그간 잊고 살았겠지만 여기도 사람이 있었답니다. 잊고 산 것도 이해해요. 내가 그간 잘못한 것도 인정해요. 다만 여기에 나도 살아가고 있어요‘, 하는 의도 없고 건조한 설명만 있다. 이 영화의 의도를 논하며 혼란스러워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이건 우리를 - 하나와 같이 외롭고, 객관적으로 불리하고, 공정한 싸움의 기회를 받지 못했고, 그래서 늘 억울하고, 슬프고 어려운 여자애들을 - 향해 기홍 같은 사람들이 보낸 초대장이니까. 기홍 같은 사람들의 ’그룹‘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초대의 대상이 아닐 테고 그렇기에 빈 종이 같은 흰 화면만을 목격할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영화의 빈 시간. 초조하고 화난 정환과 무구한 하나가 그들을 기다리던 새벽에, 기홍과 현정이 자전거를 타고 굽이굽이 밤의 산길을 돌아내려가는 씬은 그보다 한참 전 이미 등장해있다. 처음엔 누구인지도 무슨 의도인지도 모르게 영화의 맥을 끊고 갑작스레 등장한 그 씬은 결말부에 가서야 존재 의미를 알린다. 우리가 몰랐지만 이미 당도해있던 타인의 시간. 단절을 찢어 세상을 다시 이어붙여보려는 과감하고도 무심한 영화적 시도.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길가의 사람들이 달리 보였다. 낙엽 줍는 노인에게도 쓰레기차를 모는 남자에게도 편의점의 불퉁한 알바생에게도 중얼중얼 욕하는 버스기사에게도 내가 모르는 삶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온몸으로 체감하며 걸어갔다.
모르면 미워하기 쉽다. 제대로 알게 되면 미워하기 어렵다. 이 영화는 기홍으로 대표되는 나와 가장 먼 이들을 사유와 공생의 자리로 끌어오는데에 성공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게 바로 영화가 시도할 수 있는 최대의 휴머니즘 아닐까.
*23/12/02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