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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Dec 14. 2023

<괴물>, 그 누구도 무구한 일생을 살 수는 없지만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다중 시점은 본인의 경험이 반영됐다고 들었다.

= 맞다. 일본에서도 몇번 얘기한 적 있는데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겪었던 일이다. 신호가 빨간불이어서 멈췄는데 내 앞에 트럭이 한대 있었다. 그런데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는데도 한참을 꼼짝하지 않는 거다. 이상해서 경적을 몇번 울렸다. 잠시 뒤 트럭이 움직이고 나서야 휠체어에 탄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트럭은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그때 사정도 모르고 경적을 누른 게 내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가 알지 못한 채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가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다.

(씨네21, 각본 사카모토 유지 인터뷰)
1990년대부터 미국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퀴어'라는 용어는 성소수자 모두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어 왔다. 원래 퀴어는 남색가를 뜻하는 동시에 '이상한 사람, '별난 사람', '특이한 사람' 혹은 '정신병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동성애자들은 스스로 이를 재전유하면서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규정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퀴어는 자신이 다르고, 일탈적이며, 이상하고 비정상이라는 사실에 직면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것에 대해 당당한 지지를 공표한다.
(...) 이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특정한 정체성으로 고정되는 현재의 분류 방식에 대한 도전이자, 이른바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반본질적이며 급진적 사고에 기반한다. 따라서 퀴어는 동성애가 아니라 비전형성, 독특함, 이상함, 비고정성이며, 퀴어의 반대항은 이성애가 아니라 정상성(이성애 규범성)과 평범함이 된다. 퀴어 이론은 이성애 중심성에 도전하면서 젠더 정체성과 성적 욕망 간의 귀속적 연관성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혹스, 2005: <젠더와 사회>에서 재인용)


괴물은 누굴까?

사람의 마음이란 뭘까?

인간의 몸에 돼지 뇌를 접붙인다면, 그이는 인간인가 돼지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사카모토 유지는 각자의 필드에서 꾸준히 천착해온 두 가지 주제, 가족과 진실을 다시 한번 집요하게 탐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괴물’로 은유되는 비인간성, 비정상성이란 한 갈래가 더 붙는다. 파편적 진실만 알고 타인을 오해했다가 금방 온전한 진실을 알게 됐다던 사카모토 유지의 개인적 경험은 <라쇼몽>을 연상케 하는 다중시점을 경유해, 일반적이지 않고 평균이 아닌 것을 섣불리 돌출되고 기이한 것으로 낙인찍지 말자는 제언으로까지 확장된다.


‘괴물’이라 진단받은 아이들 요리와 미나토는 되려 그 멸칭을 매개로 단단히 유대한다. 그른 진단은 관찰자, 판단하는 자, 그럴 권위가 있는 자인 어른들의 제한된 시점과 정보 탓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매우 ‘상식적인’ 관념 때문이기도 하다. 악의를 갖고 학대하는 아버지뿐 아니라, 악의는 없지만 ‘정상적’인 가족과 성역할에 대한 고전적 믿음을 견지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비정상적’ 수행을 의심하는 것이다. 호리 선생은 체육시간 인간 탑의 아래편에서 쓰러진 아이에게 쾌활하게 “남자가 이 정도로 쓰러지면 쓰나"라고 말하고, 사오리는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럭비선수였던 그를 아들에게 수시로 투사하며 “너도 결혼해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길 바란다는 엄마의 소망을 아무렇지 않게 주입한다.

또 호리는 집까지 소중히 들고 온 금붕어 중 한 마리가 옆으로 누워 제대로 헤엄치지 못하자 ‘병들었다’고 냉담히 말한다. 이 세계에서 눕고 병든 것, 가장 약하고 쓸모없는 것은 쉬이 버려지거나 교정된다. 호리는 사오리의 항의 후 교장의 희생양이 되어 사회적으로 완전히 단절되고 나자 가장 먼저 금붕어들을 변기에 쓸어넣는 것으로 화풀이를 하려 한다(그가 결국 그러지 못했음이 그의 선함을 증명하지만). 호리와 달리 가장 순수악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진 요리의 친부는 요리가 남자아이를 좋아하므로 ‘정상적인’ 인간일 수 없다고 판단해, “돼지 뇌를 갖고 태어난” 잘못 교배된 아이라는 우생학적 오류까지 범하게 된다. 악의가 있든 없든 정상성에 대한 기대를 당연하게 암시하는 양육자/교육자들의 말들에, 스스로의 퀴어함을 이미 자각해버린 아이들은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의 압박과 공포를 느낀다.


그런데 이 강력한 정상/비정상의 재판에 처해 처음에는 오로지 겁만 내던 아이들은 - 특히 아직 ‘정상’ 그룹에서 탈락되지 않았던 미나토는 - 서로의 비정상성을 확인하면서 점차 당당해진다. 아이들은 종내엔 아예 괴물이란 상징, 이 반역적인 퀴어성을 자신들만의 의미 - 사랑- 으로 전유해 버린다.

요리의 세계, 거기 초대되어 더 넓어진 미나토의 세계에서는 누운 것과 병든 것이 배척될 이유가 없다. 아이들은 한낮 하굣길 하수구 밑에 있다고 믿는 고양이 소리를 듣기 위해 옆으로 털썩 눕는다. 누워서 서로의 뺨에 쏟아지는 햇볕을 느끼며 간질거리는 호감을 확인한다. 아이들이 기다리던 ‘빅크런치’가 태풍과 호우, 산사태라는 재난으로 실현될 때 그들의 아지트였던 낡은 열차 역시 누워버린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바라던 대로 감쪽같이 사라진다. 어른들에게 ‘빅크런치’ 이후 아이들의 존재/부존재란 진실과 마찬가지로 확신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번외로, 해가 갠 들판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로 진입했다고 굳게 믿은 여러 관객도 그 어른들에 포함될 것이다. 엔딩에서 아이들이 죽었다곤 한시도 생각해보지 않은 (의외로 드문) 관객 중 하나로서, 내가 오히려 걱정한 건 무너지는 산(진짜 현실)에 갇힌 사오리와 호리의 안위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극도로 현실적이고 때때로 믿을 수 없게 잔인한 영화적 어법은 충분히 ‘아이들에게 잘못한 어른’의 속죄를 그런 방식으로 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어찌 됐든 많은 이에게 요리와 미나토의 생사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수수께끼인 것처럼 내게는 사오리와 호리의 생사가 그러했는데, 그럼 미나토와 요리의 삶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태풍이 지나간 후’ 두 아이의 대화 때문.


"우린 새로 태어난 걸까."
"그런 일은 없는 거 같아. 우린 그대로야."
"그래? 다행이다."


빅크런치를 겪어도, 소중한 누군가가 죽어도, 나의 존재가 그이에게 완전히 부정당할 때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시간의 흐름만큼은 인간이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평한 진실. 그러니 시간에 이끌려 삶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아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황정은, 연년세세).



미나토와 요리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 내세에 되고 싶어하는 것, 남이 환생해 되었으리라 가정한 것은 죄다 기린, 벌레, 말, 나무늘보와 같은 비인간 동물이다.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되었으니, 비인간에 찰싹 달라붙어 ‘내가 나로 있을 곳’을 찾을 수밖에. 병든 것으로 오해받더라도 시야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함께 누울 수밖에. 시간의 진리를 역행하는 큰 재앙에 기댈 수밖에.

그래서 미나토와 요리가 그린 괴물 그림은 무섭고 징그러운 꼴이 아니라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괴물은 누굴까?’란 물음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너도 나와 같은 괴물이야(그래서 이렇게 이상한 난 혼자가 아니고, 같은 존재인 네가 있어 기뻐)'로 확장된다. 아이들은 나를 버리는 것(죽음)인 동시에 나를 지속하는 것(기억과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리셋됨)인 환생을 고대한다.





아이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감정이 암시되기 시작할 때부터, 교실 안 마이너리티 간의 연대를 굳이 퀴어한 사랑으로 ‘또’ 이어붙인 이유가 있을지, 일본 영화/드라마계의 두 거장도 별수 없이 유행에 편승한 건 아닐지 다소 의아하고 불만스러웠지만 영화는 그들이 ‘마이너리티’가 된 최초의 이유부터 퀴어함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억지로 이어붙인 게 아니라 그 퀴어함에 대한 (노력을 전제한) 공감의 태도가 영화의 근간이다. 요리의 아버지가 요리를 ‘정상화’하기 위해 가장 급한 과제라고 여겨 시킨 것이 “나는 이제 여자애를 좋아해”란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게 될 때의 충격파는 얼마나 노골적이고 직설적인가.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 일반적이지 않은 것, 보편적이지 않은 것,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너무 쉽게 특이하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에 영화는 정면으로 맞선다. 때로는 아무 의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는, 심지어 선하기까지 한 주변인의 ‘상식’이 가장 큰 상처가 된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상식을 말할 때 어떤 생각을 말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바로 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 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사유하지 않음’과 ‘일방적 관점에서의 목격’은 끈끈히 결착되어 있다. 자기 방식대로 보기 때문에 사유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상상 가능한 것만 본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믿는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인간은 대개 믿는 대로 보는 존재다. 보이는 만큼만 보기를 ‘선택’하고, 그리하여 볼 수도 있었던 것의 맥락을 삭제한 정보만 접하며 믿음을 강화하고, 그리하여 ‘더 보기’에 대한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모두가 자기 손과 발과 눈이 닿는 아주 좁은 범위 내의 진실만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진실이란 건 얼마나 편협한지, 그래서 얼마나 안정적이며 위험한 것인지를 일깨우는 사회 실험이 영화 내내 전개된다.



사오리는 교사들의 답답한 대처에 “죽은 눈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당신에겐 인간의 마음이란 게 없나요?”라며 교장을 몰아붙이지만 사실 사오리도 자기가 선 곳에서 볼 수 있는 만큼만 본다. 너무 큰 충격과 고통을 겪은 후의 사람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원래’의 자신으로부터 해리되는지 당신은 아는가. 그것을 이해한다면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자산인 학교라는 공간을 지키려는 교장의 ‘사람답지 못한’ 행동도 그리 기이하지만은 않다.

사오리는 “손녀를 잃고 슬펐나요?”라고 일부러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내도록 말을 공들여 벼려내고, ‘아들이 괴롭힘 당한 나의 심정도 그 마음과 같다’고 주장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상실과 그 괴롭힘이 어떻게 같은가. 감히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교장은 그 말에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데 이는 그이가 사오리의 말에 동의해서라기보단 반박해봤자 타인이 알 수 없는 고통을 설명할 여력이 남지 않은 사람의 공허 같아 순간 마음이 쏠린다.

게다가 호리가 못된 아이들 때문에 걸즈바에 다니는 몰염치한 선생으로 몰린 것처럼 교장과 죽은 손녀에 대한 소문 역시 완전히 소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교장이 실은 자기가 차로 친 손녀를 남편이 친 것처럼 꾸몄다는 ‘가설’을 호리에게 전해준 동료 교사가 바로 호리에게 ‘걸즈바를 그만 다니라’며 장난스레 경고한 사람, 즉 소문의 진위를 검증할 생각도 없이 당사자까지 닿도록 쉽게 퍼나르는 경향이 있는 인물이란 점도 생각해 봄직하다.


마트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여자아이의 발을 거는 교장의 모습을 본 사오리의 시점, 항의하러 오는 학부모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손녀 사진을 의도적으로 세팅하는 교장을 본 호리의 시점에 의존할 때 관객은 교장의 인간성을 쉬이 불신하게 된다. 하지만 3부에서 미나토에게 ‘하지 못할 말은 여기다 후 불라’면서 트롬본을 쥐어주는 교장 선생님은 아주 다른 사람인 것만 같다.

그이는 미나토에게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곧 ‘정상’과 그것이 보장하는 ‘평범한 행복’이란 관념이 얼마나 빈약한 논거를 가진 신화인지, 얼마나 허구적이고 소수자 배제적인 합의인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대사다. 즉 그는 미나토와 요리의 ‘비정상성’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고, 그들을 품어준 최초의 어른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고백하는 미나토의 진실은 교장에게 가장 먼저 가닿을 수 있었다.


'평범한 가정'을 통한 '평범한 행복'에 대한 기대를 견지해온 두 어른, 사오리와 요리 친부의 믿음은 기실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도 무너질 모래성이다. 사오리의 사랑하는 남편이 사실은 바람 피우던 여자와 온천 여행을 갔다가 죽었다는 진실이 미나토의 입에서 폭로될 때의 탈력감을 생각해보라. 사오리는 죽은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의지적으로 외면하고 진실을 무시한다. 아이에게도 아빠의 부재로 인한 모자 가정의 결핍이나 외로움만을 공유해온 사오리의 외면은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평범성을 가장 강하게 고집한 다른 양육자인 요리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는 요리가 자신의 퀴어함을 부정해야 '어머니가 돌아온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아이에게나 자신에게나 억지로 심어가며, 부인이 도망가 망가진 인생을 술로 간신히 지탱하는 알코올중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평범한가. 그것이 행복인가.



영화는 믿는 대로 보는 인간의 숙명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아직 세속적 관습에 영향 받기 전인 아이들만이 때묻지 않은 희망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오래된 신념에 일정 정도 복무한다. 그러면서도 피해자였다가 가해자로 변모하거나 발각되는, 가해자인 줄 알았는데 다른 면에서 봤더니 피해자인 인물들을 엮어두고는 그 혼란 속에서 생존을 위해 ‘거짓’ 자체를 무기 삼는 소수자의 모순을 자꾸만 전시한다. 어떤 면에서 이는 어차피 아무리 용을 써도 코끼리의 일부만 알 수 있는 인간의 생득적 한계 하에서 그 누구도 ‘진실만을’ 말할 수는 없다는 급진적인 역설처럼 느껴진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때로 약한 것들의 반격은 자포자기적이라 더욱 위험하다. 요리와 미나토의 서로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은 호리에게 명백히 해를 입혔다. 관객은 그 거짓말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 약한 아이들을 연민하고 이입할 수 있지만, 영문 모르는 호리 입장에서 사오리가 들은 미나토의 거짓말이나 요리가 교무실에서 증언한 거짓은 어쩌면 성적인 추문 이상으로 치명적이다.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요리의 억압된 욕구로 인한 방화는 그와 무관한 몇십 명의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일반적인 남자아이와 다르단 이유로 요리를 따돌리고 호리의 신뢰도를 깎아내린 남자아이 무리마저도, 실은 마초적 남성성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호모소셜의 ‘관습’을 학습했을 뿐이며 자주 언급되는 ‘아이들의 순수한 악의’ 따위에 지배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그 애들이 걸즈바니 몸 파는 여자니 하는 말을 자연발생처럼 그냥 알게 되었을 리는 없으니).



인간은 자신이 보는 만큼만 믿는다.

자신이 상처받는 일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남을 주저없이 상처줄 수도 있다.

더 잘못한 사람과 덜 잘못한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타인에게 평생 잘못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괴물>이 인정하자고 들이미는 인간의 마음이란 결국 그런 것들.


그렇다면 결국 답은? 너무 늦기 전에 고백하고 바로잡는 것뿐. 미나토가 교장 선생님에게 “남한테 말할 수 없어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날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며 털어놓고 호리가 태풍을 뚫고 미나토의 집까지 찾아와 “선생님이 오해했어, 정말 미안해”라고 울부짖은 것처럼.

인간은 그런 바로잡음 역시 가능한 존재다. <괴물>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마음’은 빛과 그림자를 모두 갖고 있는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림자를 직시하지 않고서는 빛을 지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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