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혼자 살아남은 마녀
세계사에 굵직한 한 획을 긋거나 자기 몫의 신화 속에서 불멸하는 영웅은 언제나 리들리 스콧의 흥미를 끌었다. 역사 기반의 설화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로빈 후드>부터 창작 설화에 가까운 <블레이드 러너>, <에이리언>, <마션>까지 그는 언제나 철저한 고증을 목표하는 역사가보다도 출중한 이야기꾼을 자처해왔다. 그는 우직한 이야기와 장엄한 비주얼로 ‘새로 쓰인’ 거물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데에 능하다.
그렇기에 영화의 오프닝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이 단두대 앞에서 교차하는 ‘허구’가 전시되더라도 관객은 스콧 식의 은유를 여유로이 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160분짜리 나폴레옹 연대기는 발칙한 상상의 운만 띄우더니 그 후 내내 표류하며 찝찝한 의문만 여럿 남긴다.
<글래디에이터>보다 20년 더 노쇠한 호아킨 피닉스의 육중한 몸을 빌어 그려진 심약한 나폴레옹의 초상은, 사실상 배우의 전작인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재림 같다. 어떤 이들은 영국 감독이 프랑스 성웅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분노하지만, 나폴레옹 사후 200년 동안 무수히 덧입혀진 야사의 ‘재미’를 고려한다면 겨우 이 정도 각색이 용서 못 할 금기는 아니다. 영화적 스펙타클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익히 알려진 전쟁광이 출전 자체를 두려워하는 낯선 모습은 의도된 재해석의 묘미를 곱씹게 만든다.
하지만 이번 ‘재해석’은 결국 변죽만 울리고 결론을 짓지 못한다. 변방의 코르시카 건달, 정치범 집안의 오명을 벗기 위해 자원한 툴롱 전투에서 그는 미숙한 군인의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동생에게 비장하게 기습 없이 정공법으로 돌파하겠다고 선언하더니 바로 다음 순간 야습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오고, 성을 향해 돌진하려던 순간 포탄에 맞아 즉사한 군마에 깔려 우스꽝스럽게 바닥에 나뒹구는 식이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구사하는 겁쟁이 나폴레옹이라니, 영웅의 인간미를 꾸준히 파고드는 극이 되려 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왕당파 시위를 진압할 때 나폴레옹은 권력의 정점에 가닿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집행자가 되더니, 막상 1799년의 결정적인 쿠데타에서는 동생의 일장연설과 거기 선동된 병사들의 결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목적을 달성한다.
이집트 피라미드에 대뜸 포를 쏠 만큼 즉흥적인 나폴레옹은 생각 없이 호기심과 충동만으로 살아가는 어린애 같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얼음 호수를 부수는 나폴레옹은 감탄을 자아내는 전략가다. 다시 워털루, 생의 마지막 대전투에서 자신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병사들을 버리고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나폴레옹은 별 볼일 없는 비겁자다.
나폴레옹의 30년을 아우르는 동안 매 전투마다 색색의 다른 면모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보는 이는 이것을 정석적인 영웅의 성장 서사로도, 인간 보편의 다면성에 대한 탐구로도 읽을 수 없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나폴레옹의 50가지 그림자만 남을 뿐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플라워 킬링 문>으로 착취적 역사와 착취적 스펙타클을 동시에 고발하고, 제임스 카메론은 아예 무대를 지구 밖으로 옮겨 블록버스터-비주얼-친환경 에세이를 쓰는 시대다. 관객은 물을 수밖에 없다. 거장 스콧이 고른 이 시대의 이야기는 왜 하필 18-19세기의 통치자 나폴레옹이어야 했는가? 이 이야기는 왜 이렇게 혼란스럽게 그려져야만 했는가? 야망에 찬 정치가이자 근대적 법전의 고안자이기도 한 나폴레옹을 두고 다른 답이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영화는 오로지 그의 전쟁, 그리고 그의 여자 조제핀과의 불건강한 관계에만 몰입해 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이리저리 휩쓸린 것처럼 자기 부인과의 전쟁 같은 사랑에 있어서도 일관된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차라리 나폴레옹이라는 ‘상징’을 제대로 이용해 남성 영웅 서사 이면의 허구에 대한 완벽한 스케치를 해냈다면 어땠을까. 차라리 조제핀이 안전을 위해, 사치하기 위해 나폴레옹을 붙들어매고 멋대로 조종하는 희대의 전략가처럼 묘사되었다면 어땠을까.
3류 야사라는 비난은 들었겠지만 한 편으로는 사반세기 전 <델마와 루이스>로 여성영화의 진일보를 일궜던 놀라운 남성 감독이 80세를 넘겨서도 지켜온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재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폴레옹과 황후 조제핀의 복잡한 ‘사랑’에 압도된 스콧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던 듯하다.
리들리 스콧은 완전히 전복적인 다시 쓰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굳이 나폴레옹을 조제핀에게 자아를 내맡긴 전형적으로 유약하고 의존적이고 불안정한 남자아이처럼 그려내 일종의 연막을 생성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출정 동안 바람을 피우더니 뻔뻔하게 “당신은 나와 어머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선고하는 조제핀, 그것을 얼빠진 채 더듬더듬 따라 읊는 나폴레옹의 관계가 연상시킨 것은 한 오래된 격언이다.
세상은 남자가 다스리지만, 그 남자는 여자가 다스린다.
성경에서, 탈무드에서, 혹은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형태만 바꿔가며 생존해온 낡은 사상. 이곳이 결국 리들리 스콧이 말하고 싶던 총체적인 이야기의 종착점인가 싶어 아득해지는 순간이다. 남자들이 지겹도록 외는 이 문장의 요는 결국 ‘남자를 가정에서(혹은 침대에서) 잘 다루는 여자는 편히 살 것’이라는, 그러니 거기에 머물며 만족하라는 극강의 여성혐오를 함축하지 않는가.
이 한 줄이 얼마나 오랫동안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여자들의 손발을 묶고 눈을 가려왔는지 보라. 조제핀이 정말로 영웅의 하나뿐인 마음을 차지한 대단한 '요부'였다면, 왜 황제의 대를 이어줄 남자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자기 탓도 아닌) 이유로 내쫓겼는지 영화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했더라도, 연출법과 디테일의 각색을 통해서라도 어떠한 설득이라도 해내야 하는 게 영화의 역할 아니던가. 그러나 ‘그냥 그랬어야 하는 시대니까’ 그랬다는 힘없는 설명이 떠돌 뿐이다.
애처롭게 울부짖는 조제핀의 뺨을 때려 ‘우리의 관계는 국익을 해한다’는 이혼 서약서를 억지로 읽게 만드는 나폴레옹이란. 혹시 이 또한 ‘근대적’ 법전을 쓰면서 오히려 여성의 자유는 퇴보시킨, ‘여성은 지금도 너무 많이 가졌다’며 운신을 제한하고 편지 쓸 권한마저 남편에게 귀속시킨 여성혐오자 영웅을 조롱하려던 리들리 스콧의 큰 뜻일까.
<나폴레옹>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건 낡고 우스운 사랑의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배우 바네사 커비의 열연이다. 밑빠진 독 같은 영화를 오로지 연기력만으로 납득시키는 이 프로페셔널의 투지가 신기할 따름이다. 다시, 49살의 주연 남배우보다 14세나 어린 배우가 발탁되었다는 점은 어떤 의도가 있었을지 되묻게 만들지만. 사실 조제핀은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의 연인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가장 유명한 연인들 중 한 쌍인데다 단연 눈에 띄는 나이차였으니 더더욱, ‘정확한’ 구현 없는 제멋대로의 각색이 아쉬울 수밖에.
* 23/12/30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