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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Nov 07. 2023

<플라워 킬링 문>, 어떤 눈동자

불태우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모두가 스콜세지 - 드 니로 - 디카프리오 트로이카를 극찬했고 나 역시 그들의 협업을 경애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켈리 라이카트의 <어떤 여자들>부터 눈길을 끌었던 릴리 글래드스톤의 연기가 돋보였던 영화. 어떤 배우는 상실, 특히 억울하게 빼앗긴 것, 손에 제대로 쥐지도 못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만 같다.


<어떤 여자들>에서 릴리 글래드스톤이 분한 제이미는 또래를 찾아보기 힘든 시골 마을 벨프리에 갑자기 찾아든 기간제 강사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마주한 후부터 생에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설렘을 느낀다. 제대로 된 일자리나 좋은 기회로부터 소외된 여자 간의 연대가 피어나고, 오가는 눈빛 속에서 기묘한 정념도 엿보인다. 하지만 베스는 변호사가 됐음에도 보잘것없는 커리어와 경력단절을 겁내느라 이미 너무 지쳐버린 여자다. 미처 확고한 고백을 나누기도 전에 떨떠름한 표정의 베스로부터 거절당하는 제이미. 8시간을 운전해 베스를 보러 갔다 허무하게 실연당한 제이미는 멀고 먼 벨프리로 돌아오면서 잠깐 피로를 이기지 못해 위험하게 정차한다.


5년 전 릴리 글래드스톤의 이 연기를 봤을 때, 이 휴지休止가 영화사적으로 기릴만한 순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디언 여자로 등장해 ‘찌르레기 수다’를 떠는 백인 남편을 맞는다. 유약하고 부족한 남편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는 바람에 몰리는 어머니와 자매들을 모두 잃는다. 잘생긴 코요테 같은 얼굴. 그러나 도덕관념이 희박하고 무식한 데다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인지능력이 없는 남자. 제가 직접 의뢰해 폭발시킨 집에서 죽은 처제와 죽어가는 동서를 보고서야 죄의 무게를 깨달은 멍청한 남자. 그러고도 삼촌의 권위와 제 자신의 탐욕을 거스르지 못하는 긴 긴 세월 동안 부인과 아이들을 말려 죽인 백인 남자.


처제 리타의 집이 터진 잔해를 목격하고 현실을 처음 직면한 어니스트의 멍한 얼굴은 계단 밑의 몰리로 향한다. 몰리는 절규하고 흐느끼지만 어니스트는 그 바닥으로 내려가지 않고 위에서 그저 쳐다본다. 다시 둘의 첫 만남, 어니스트가 모는 택시 뒷좌석에 몰리는 품위 있게 앉아있지만 어니스트는 돌연 일어나 시정잡배처럼 자동차 경주에 환호하고 날뛴다.

“당신 돈을 걸었어요?” 몰리가 묻자 어니스트는 시선을 낮추어 자기 차에 앉은 몰리를 다시 쳐다본다.

“아니요.”


내려다보는 시선. 처음엔 사랑 때문인 줄 알았는데 결국 “멍청한 계집이 남자들이 하는 중요한 일을 망쳐놓는”단 말로 그 순간에 끝나버린 그런 결혼. 결국 극복되지 않은 낙차. 둘이 다시금 서로를 동등한 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니스트가 구속되고 그들의 막내딸이 폐병으로 죽어 작은 묘 앞에서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처음이자 마지막 응시였을지도.




지구상 가장 부유했던 부족이지만, 상상을 초월하게 높은 인당 소득이나 백인 하녀와 일꾼을 두는 것만으로는 ‘전복적인’ 게토를 이루기에 부족했던 걸까. 그들의 선천적인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지 않았더라도 백인들은 이 돌출적인 ‘홍인’ 부족을 언젠가 반드시 다종다양한 방법으로 제거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다수가 알콜중독과 당뇨를 갖고 있으니 더 쉽고 신속해졌을 뿐.


오세이지 족이 태양을 할아버지로, 달을 어머니로, 불을 아버지로 부른다고 영화는 처음부터 소개해둔다. 너무 이질적인 인종/문화권에서 받아들이는 바람에 선뜻 이어지지 않는 이 비유는 윌리엄 ‘킹’ 헤일이 부러 자기 집에 불을 질러 보험금을 수령하려 한 씬에서 다시 수수께끼로 살아 돌아온다. 이유를 알 수 없게 긴 그 씬은 스콜세지의 ‘시네마틱’한 면모가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씬이기도 한데, 바깥에서는 불길을 정반대 방향에서 바라보는 빌 헤일과 FBI 요원들이 교차되고, 방 안에서는 죽어가며 헐떡이는 몰리와 망연자실해 누워버린 어니스트가 교차하며, 불길 속에는 인부들의 그림자가 허수아비처럼 넘실거린다.

오세이지 족의 은유는 어머니는 고요히 잠재우고 할아버지는 불태울 때 아버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잡아먹기만 했다는 신화적 암시였을까. 모든 가정폭력범이 그랬듯 어니스트도 역사상 가장 쓸모없고 하찮은 가해자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찮은 이도 함께 사는 연약한 이들에겐 가장 위험한 재앙이 될 수 있었다.


모두가 끝을 예감하는 이야기에서도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또 기대와 다른 결말을 맞는다. 끝내 이혼당한 어니스트가 바이런과 죽을 때까지 오클라호마 외곽에서 오손도손 살았단 얘기는 이 이야기 최고의 코미디이고, 몰리는 인디언 보호지구에서 같은 오세이지족인 두 번째 남편과 살다 죽었단 이야기가 그다음 가는 비극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카메오로 등장해 직접 읽어야만 했던 몰리 카일-버크하트의 부고. 신문에는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진짜 이름’ 역시 영화를 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영화에서 유일하게 오세이지 식의 이름이 노출된 사람은 몰리와 어니스트의 죽은 막내딸뿐이다). 반 세기 전부터 영화의 거장이었던 창작자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무대의 음향을 만드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는 이 씬은 3시간 반 동안 극도로 몰입했던 오클라호마 오세이지 마을로부터 관객을 저 멀리 현대의 영화관으로 던져버린다. 갑자기 벌려진 거리만큼 이것이 ‘진짜’ 일어났던 일이고, 우리 중 그 누구도 - 저기 지금 무대에 나와서 몰리의 비극을 마무리 짓는 감독마저도 그녀의 ‘진짜’ 생을 다 알 수는 없었으며, 다만 이야기로서 최대의 존중을 했을 뿐이라는 비정한 현실이 파고든다.


오세이지 족의 역사를 처음으로 대중문화 시장에 소개한 원작 소설 작가 데이비드 그랜조차 이들의 이야기를 스콜세지 감독이 다룬 대로 - 그러니까 몰리와 어니스트가 사랑을 정말 하긴 했다는 강력한 증언을 담아서 - 풀어놓지는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FBI의 전신인 수사국의 신임 국장이 된 젊은 에드거 후버가 이 오세이지족 연쇄 피살을 어떻게 연방수사국의 성장 기회로 삼았는지에 쏠려 있다.


영화에서도 언뜻 티가 났듯 그의 시선 속 FBI는 불명예를 아직 뒤집어쓰기 전, 순진할 정도로 인간적이고 선의를 가진 개개인들의 집합처럼 묘사된다. 만인에게 호감형인 배우 제시 플레먼스를 수사관들의 리더로 내세운 캐스팅이라든지. 그들이 몰리를 구출해 병원으로 옮기고 아이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는 장면이라든지. 조직에도 생명이 있다면 어쩌면 그때는 FBI 요원 개개인에겐 정말로 ‘선의’랄 게 더 있는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훗날 흑표당 프레드 햄프턴을 잔혹하게 암살하거나 반전주의 히피, 배우들과 페미니스트들을 집요하게 감시하면서 오명을 얻기 전 세대에게는. 어쨌든 데이비드 그랜은 어떤 ‘가치’보다도 ‘제도’의 예찬론자에 가까워 보이고 제도를 사수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후버를 (다소 망상주의자였음은 인정하면서도) 경외하는 듯하다.



그러나 스콜세지는 그 백인들의 ‘선의’나 ‘제도’ 역시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스콜세지는 대본을 처음부터 새로 고쳐 쓰기를 감행하면서, 촬영기간 2년을 더 미루면서까지 FBI 대신 몰리(와 어니스트)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이 선택은 그가 라포를 쌓은 오세이지족의 한 여인이 “그 둘은 정말로 사랑했어요. 정말로 사랑했다고요”라고 강조해 이야기해 준 덕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재연은 어디까지나 재연이다. 그러나 기왕 머물 거라면 원죄에 대한 윤리적 복수를 위해 온전한 재연이 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어떤 감독들의 장기인 법정 씬이나 FBI가 수사망을 좁혀간 방식에 대한 깊은 역사적 탐구가 전제된 영화였다면 3시간 반을 이만치 잘 버티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직접 만드는 데에 능한 감독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나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리란 기대도 충족됐다. 물론 극에 긴장을 불어넣고 굴리는 건 부정할 수 없게도 빌 헤일과 어니스트다. 빌은 조종하고 어니스트는 갈등한다. 드 니로와 디카프리오 두 배우의 협연은 숨 막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몰리-릴리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자리에 앉아 죽어가면서도, 아이와 자매의 죽음에 오열하면서도 폭풍우가 오던 밤의 무게감 있는 평온을 유지한다. 몰리는 그 자신의 비극 때문이 아니라 어니스트의 허둥대는 종횡무진을 넘어 전해지는 독백의 강건함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켈리 라이카트, 마틴 스콜세지 두 거장이 택한 릴리 글래드스톤(그는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이다)의 눈동자는 거스러미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곧고 발성 역시 직선적이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고 기록된 역사의 뒤편으로 숨어든 몰리는 말년에 어떤 후회를 했을까.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되돌아온다면 다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을까, 혹은 언제 떠나야 할지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어떤 쪽이든 자신의 외피를 단단히 지키는 여자의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전적으로 릴리 글래드스톤의 연기 덕분이다. 코로나 시기 생계 때문에 영화를 거의 떠날 뻔했다던 그의 다음 작품이 정말 많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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