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소년이 온다, 한강
<토니 타키타니>의 토니 타키타니가 반려자의 죽음 후 늘상 쓰던 분사식 잉크펜을 들다 말고 멈칫거리는 순간은 가슴에 긴 진동을 남긴다. 앞치마를 입은 아내, 모든 옷을 공기를 두른 것처럼 가볍게 소화하던 그 젊고 아름다웠던 여자가 호스를 들고 세차를 하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는 남은 평생 화분에 물을 주다가도, 작업용 펜을 쓰다가도, 무언가를 분무할 때마다 그 평범하기 그지없던 그러나 다시는 겪을 수 없는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너와 나>의 남겨진 이는 발을 다쳐 제주 수학여행을 따라가지 못한 하은. 그가 테이블에 아슬하게 걸친 컵을 볼 때마다 세미를 생각하게 되듯이.
잃어버린 순한 눈의 흰 강아지, 너 어디야 걱정돼 미안해 보고 싶어, 거울이 만든 빛무리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첫사랑, 갔다 오면 말해준댔는데 야속하게 몇 번이나 나 진짜 간다! 하더니 진짜 가버린 그애, 너무 보고 싶어, 울고 따지고 싸우며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던 그애들.
내게서 멀어진 네 모습이 흐릿하게 보여 눈물이 나나 봐, 널 많이 그리워할 것 같아,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만 남아서 슬픈 사람에서 너만 없어서 슬픈 사람들로의 진입. 그런 성장은 아무래도 너무 잔인하다. 영화로만 평가하자면 얹을 말이 꽤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던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때 나도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우리 몸에 새겨진 상실의 나이테를 나도 아니까.
인생에 처음 해보는 내 또래의 조문은 너무 갑작스러웠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기에 우리 제대로 인사도 못했지. 빈소 앞에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 또 하고 또 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또 돌아오는 아이처럼, 늘어지는 이 영화의 시간은 마치 처음 해보는 이별의 순간을 오래오래 나누면서 인사하라고 마련된 것만 같다. 애도는 원래 서툴러도 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더 오래 시간을 가지라고 엄마한테도 아빠한테도 내 사랑하는 친구와 반려동물에게도 안녕 사랑해 나 진짜 간다, 하고 가라고.
자주 잊고 살던 나 대신 누가 끈질기게 울어주는 덕분에 피안의 뿌연 안개는 걷히지 않는다. 체념조차 못한 어른들은 인스타와 인생네컷과 인플루언서 없던 그 시절을 다시 여기로 불러온다. 그렇게라도 내가 너 되고 네가 나 되었으면 좋겠어서. 엄마가 찾으러 가지 못한 흰 개들처럼, 우리가 넘어가지 못할 저쪽에 아직 남아있는 이들 종종 생각해달라고.
나중에 후회할지 모르겠지만, 영화로서의 이야기를 까먹기 전에 단 몇 마디만 붙여두자.
왜 이 사랑이 반드시 퀴어한 풋사랑이었어야 했나 아쉬움도 들고, 이 퀴어함과 저 사회적 애도의 유의미한 접점을 탐구하려는 영화가 아니면서 왜 꼭 이어붙어야만 했나 궁금키도 했다. 최근 몇 년 한국 독립영화계의 특정한 유행을 탄 남감독들이 <미성년>과 <죄 많은 소녀> 그리고 <길복순>에서 그랬듯, 그저 자기의 아트를 위해 소녀들의 순수를 대상화하고 박제하고 소진해버렸을 뿐인 그런 사랑의 전철을 밟으려 한 건지 조금 의심도 했다.
이미 여러 번 얘기한 대로 내가 경험한 한국 미성년 여성 간의 / 학교에서의 관계란 대체로 매우 번잡하고 집요하고 이례적인 역학을 만들어냈었는데, 그 복잡하고 분류되기 전인 마음들을 ‘진짜 이야기’로 풀어낼 역량이 없는 남성들이 (주로 백합 장르물 베이스의) 느닷없는 로맨스, 섹슈얼한 스킨십과 미적인 비주얼 정도로 우회 또는 유화해버린다고 느낀 적이 많았기 때문.
물론 앞선 충무로 출신 남자들보다야 조현철이라는 창작자를 (잘 모르면서도) 더 믿어보고 싶었다. 그 정도로 이기적인 창작자는 아니리라는 기대도 있었고, 질투를 음울하게 끌고 가는 것만큼이나 동화 같은 낭만을 추구하는 서사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마치 김보라 감독의 <벌새>처럼). 조현철 감독은 아마도 산 자와 죽은 자, 여전히 슬퍼하는 자와 이제는 그만 슬퍼하라고 종용하는 자들 사이의 간극을 메꿀 방법은 그런 순수의 사랑뿐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런 결심이랄까 성격을 그의 몇 줄짜리 수상소감으로부터 열심히 읽어내려 해본다.
결정적으로 그의 선택이 특별히 좋다고 생각하며 의심을 걷은 구간은
1) 진식이(똘똘이)를 찾으러 온 '엄마'의 긴 독백을 굳이 생략 없이 들려주고
2) 세미 가족의 수학여행 전야를 굳이 끝에 한 번 더 붙인 부분이다.
두 번의 '굳이'. 그럼으로써 이 영화를 소녀들의 시작되지 못한 아픈 로맨스로만 남기지 않고, 그 모든 소녀기에 대한 엄마들의 작별인사로 확장하려는 마음.
세미는 하루 종일 사랑하는 하은이를 쫓아다니느라 엄마 아빠는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그 나이대 애들이 다 그렇듯이.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먼저 대학에 가고 그다음 돈도 벌고 이것저것 눈이 트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엄마 아빠와의 관계도 달라지고 깊어질 가능성을 가졌으니까. 우리에겐 함께 할 시간이 앞으로도 최소 30년 남아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 가족에겐 시간이 없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자기를 키운 어른들을 이해하게 될 시간도, 상실을 준비할 시간도. 그래서 조현철 감독은 그들이 같이 국수를 먹으며 엄마 내 태몽은 뭐였어? 하고 묻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걱정했다는 진식이 엄마의 깊은 사랑을 아이들이 듣게 해준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가 마지막에 아주 살짝 보여준 미래가 깁스를 풀고 혼자 버스를 타 세미를 그리워하는 하은의 시점이었음에도, 이 모든 얘기를 세미를 그리워하는 세미 엄마아빠의 목소리로 읽어내고 듣고 다시 말하게 된다. 세월호 엄마 아빠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그게 너무 걱정이면서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솟았고. 우리 강아지 잘 있길 바라는 그 마음을 누가 다 이해할까.
오디션 프로를 통해 데뷔한 주연 배우에게 빅마마의 체념을 부르게 한 씬이 많이 비판받고 있지만 내겐 정말로 괜찮은 씬이었다. 오히려 원곡에 익숙지 않아 가사를 곱씹다 보니 그 순간부터 조금 더 깊이 몰입했다.
그 순간 감독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고 노래 자체도 너무 길었다지만... 의도는 차라리 간단하지 않은가. 너 속풀이 겸 장기자랑해 보라고, 내가 보는 만큼의 너를 사람들이 알게 해주라고.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업계가 박혜수를 폐기하더라도 나는 그를 믿어주고 싶었다”는, 박혜수의 동료 조현철의 확고하고 잘 벼린 언어에서 발견되는 용기는 내가 늘 존경하는 류의 것. 그리고 이 전형적인 사랑 노래를 엄마가 아이에게, 죽은 이가 유족에게 불러주는 송가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어디 흔한가.
<너와 나>를 보고 돌아오는 걸음걸음 듣는 노래마다 모두 장송곡 같았다. 2014년의 플레이리스트가 갑작스레 내 폰 속으로 소환되었고, 슬프고 갈 곳 없는데 남이 묻는 다정한 안부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