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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Nov 04. 2023

<너와 나>, 우리 강아지 잘 가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소년이 온다, 한강


조현철의 2022 백상 수상소감


<토니 타키타니>의 토니 타키타니가 반려자의 죽음 후 늘상 쓰던 분사식 잉크펜을 들다 말고 멈칫거리는 순간은 가슴에 긴 진동을 남긴다. 앞치마를 입은 아내, 모든 옷을 공기를 두른 것처럼 가볍게 소화하던 그 젊고 아름다웠던 여자가 호스를 들고 세차를 하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는 남은 평생 화분에 물을 주다가도, 작업용 펜을 쓰다가도, 무언가를 분무할 때마다 그 평범하기 그지없던 그러나 다시는 겪을 수 없는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너와 나>의 남겨진 이는 발을 다쳐 제주 수학여행을 따라가지 못한 하은. 그가 테이블에 아슬하게 걸친 컵을 볼 때마다 세미를 생각하게 되듯이.


잃어버린 순한 눈의 흰 강아지, 너 어디야 걱정돼 미안해 보고 싶어, 거울이 만든 빛무리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첫사랑, 갔다 오면 말해준댔는데 야속하게 몇 번이나 나 진짜 간다! 하더니 진짜 가버린 그애, 너무 보고 싶어, 울고 따지고 싸우며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던 그애들.

내게서 멀어진 네 모습이 흐릿하게 보여 눈물이 나나 봐, 널 많이 그리워할 것 같아,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만 남아서 슬픈 사람에서 너만 없어서 슬픈 사람들로의 진입. 그런 성장은 아무래도 너무 잔인하다. 영화로만 평가하자면 얹을 말이 꽤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던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때 나도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우리 몸에 새겨진 상실의 나이테를 나도 아니까.


인생에 처음 해보는 내 또래의 조문은 너무 갑작스러웠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기에 우리 제대로 인사도 못했지. 빈소 앞에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 또 하고 또 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또 돌아오는 아이처럼, 늘어지는 이 영화의 시간은 마치 처음 해보는 이별의 순간을 오래오래 나누면서 인사하라고 마련된 것만 같다. 애도는 원래 서툴러도 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더 오래 시간을 가지라고 엄마한테도 아빠한테도 내 사랑하는 친구와 반려동물에게도 안녕 사랑해 나 진짜 간다, 하고 가라고.

자주 잊고 살던 나 대신 누가 끈질기게 울어주는 덕분에 피안의 뿌연 안개는 걷히지 않는다. 체념조차 못한 어른들은 인스타와 인생네컷과 인플루언서 없던 그 시절을 다시 여기로 불러온다. 그렇게라도 내가 너 되고 네가 나 되었으면 좋겠어서. 엄마가 찾으러 가지 못한 흰 개들처럼, 우리가 넘어가지 못할 저쪽에 아직 남아있는 이들 종종 생각해달라고.



나중에 후회할지 모르겠지만, 영화로서의 이야기를 까먹기 전에 단 몇 마디만 붙여두자.

왜 이 사랑이 반드시 퀴어한 풋사랑이었어야 했나 아쉬움도 들고, 이 퀴어함과 저 사회적 애도의 유의미한 접점을 탐구하려는 영화가 아니면서 왜 꼭 이어붙어야만 했나 궁금키도 했다. 최근 몇 년 한국 독립영화계의 특정한 유행을 탄 남감독들이 <미성년>과 <죄 많은 소녀> 그리고 <길복순>에서 그랬듯, 그저 자기의 아트를 위해 소녀들의 순수를 대상화하고 박제하고 소진해버렸을 뿐인 그런 사랑의 전철을 밟으려 한 건지 조금 의심도 했다.

이미 여러 번 얘기한 대로 내가 경험한 한국 미성년 여성 간의 / 학교에서의 관계란 대체로 매우 번잡하고 집요하고 이례적인 역학을 만들어냈었는데, 그 복잡하고 분류되기 전인 마음들을 ‘진짜 이야기’로 풀어낼 역량이 없는 남성들이 (주로 백합 장르물 베이스의) 느닷없는 로맨스, 섹슈얼한 스킨십과 미적인 비주얼 정도로 우회 또는 유화해버린다고 느낀 적이 많았기 때문.​


물론 앞선 충무로 출신 남자들보다야 조현철이라는 창작자를 (잘 모르면서도) 더 믿어보고 싶었다. 그 정도로 이기적인 창작자는 아니리라는 기대도 있었고, 질투를 음울하게 끌고 가는 것만큼이나 동화 같은 낭만을 추구하는 서사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마치 김보라 감독의 <벌새>처럼). 조현철 감독은 아마도 산 자와 죽은 자, 여전히 슬퍼하는 자와 이제는 그만 슬퍼하라고 종용하는 자들 사이의 간극을 메꿀 방법은 그런 순수의 사랑뿐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런 결심이랄까 성격을 그의 몇 줄짜리 수상소감으로부터 열심히 읽어내려 해본다.

결정적으로 그의 선택이 특별히 좋다고 생각하며 의심을 걷은 구간은

1) 진식이(똘똘이)를 찾으러 온 '엄마'의 긴 독백을 굳이 생략 없이 들려주고

2) 세미 가족의 수학여행 전야를 굳이 끝에 한 번 더 붙인 부분이다.

두 번의 '굳이'. 그럼으로써 이 영화를 소녀들의 시작되지 못한 아픈 로맨스로만 남기지 않고, 그 모든 소녀기에 대한 엄마들의 작별인사로 확장하려는 마음.​


세미는 하루 종일 사랑하는 하은이를 쫓아다니느라 엄마 아빠는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그 나이대 애들이 다 그렇듯이.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먼저 대학에 가고 그다음 돈도 벌고 이것저것 눈이 트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엄마 아빠와의 관계도 달라지고 깊어질 가능성을 가졌으니까. 우리에겐 함께 할 시간이 앞으로도 최소 30년 남아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 가족에겐 시간이 없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자기를 키운 어른들을 이해하게 될 시간도, 상실을 준비할 시간도. 그래서 조현철 감독은 그들이 같이 국수를 먹으며 엄마 내 태몽은 뭐였어? 하고 묻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걱정했다는 진식이 엄마의 깊은 사랑을 아이들이 듣게 해준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가 마지막에 아주 살짝 보여준 미래가 깁스를 풀고 혼자 버스를 타 세미를 그리워하는 하은의 시점이었음에도, 이 모든 얘기를 세미를 그리워하는 세미 엄마아빠의 목소리로 읽어내고 듣고 다시 말하게 된다. 세월호 엄마 아빠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그게 너무 걱정이면서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솟았고. 우리 강아지 잘 있길 바라는 그 마음을 누가 다 이해할까.



오디션 프로를 통해 데뷔한 주연 배우에게 빅마마의 체념을 부르게 한 씬이 많이 비판받고 있지만 내겐 정말로 괜찮은 씬이었다. 오히려 원곡에 익숙지 않아 가사를 곱씹다 보니 그 순간부터 조금 더 깊이 몰입했다.


그 순간 감독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고 노래 자체도 너무 길었다지만... 의도는 차라리 간단하지 않은가. 너 속풀이 겸 장기자랑해 보라고, 내가 보는 만큼의 너를 사람들이 알게 해주라고.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업계가 박혜수를 폐기하더라도 나는 그를 믿어주고 싶었다”는, 박혜수의 동료 조현철의 확고하고 잘 벼린 언어에서 발견되는 용기는 내가 늘 존경하는 류의 것. 그리고 이 전형적인 사랑 노래를 엄마가 아이에게, 죽은 이가 유족에게 불러주는 송가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어디 흔한가.


<너와 나>를 보고 돌아오는 걸음걸음 듣는 노래마다 모두 장송곡 같았다. 2014년의 플레이리스트가 갑작스레 내 폰 속으로 소환되었고, 슬프고 갈 곳 없는데 남이 묻는 다정한 안부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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