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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Oct 29. 2023

<무빙>, 철 지난 토종의 휴머니즘

좋은 창작물은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추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극중 시점상 2020년대라고 주장하는 장면에서 1990년대를 느끼게 하고, 90년대를 그린 회차에서 70년대의 감성을 발견하게 하는 강풀의 <무빙>은 대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일까.


디즈니플러스가 무려 500억을 들여 제작한 <무빙>은 홍보부터 ‘한국형 히어로물’이란 문구를 내세우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구호에 충실할 것을 약속한다. 창작자로서 특정 장르를 새로 써보겠다는 야심은 돋보이지만, 이 시리즈가 정의한 ‘한국형’에 뾰족한 타격점은 보이지 않는다. 숏폼의 시대를 거슬러 무려 20회를 편성한 만큼 다양한 ‘한국형’의 논제를 기대했지만, 결국 남은 건 시대착오적인 가족주의와 강풀 식 휴머니즘에 대한 지리한 예찬뿐인 듯하다.



휴머니즘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강풀이 사람 냄새 나는 휴머니즘이라 주장하는 그림이 대체로 이런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는 점이다. ‘바보 같고 못생겼고 어딘가 모자라지만 한 여자만 바라보는’ 남자들과, 그 남자를 예뻐하고 어르고 달래며 어머니 같은 자애로움을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남자의 물리력에 기반한 도움을 갈구하는 여자들. 이 로맨스를 보는 이에게도 설득시키기 위해선 그 남자들의 귀여운 ‘무해함’을 극적으로 강조하며 끈질기게 미화하는 작업이 필수다.

2023년에 드라마화된 <무빙> 역시 이 공식을 벗어나지 않아서, 극중 희수와 봉석, 윤영과 재만, 지희와 주원이 만드는 로맨스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관계성을 그대로 갖다놓은 듯하다. 물론 그 ‘사랑밖에 몰라서’ 더 끈덕진 남자들이 현실에서는 스토커가 될 위험이 가장 큰 집단이란 진실은 가볍게 무시된다. 강풀이 거의 모든 만화에서 이 특정한 유형의 남성 인물을 경애하고 그 가치를 상찬하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다 보면, 사실상 그 남성들이 널리 사랑받게 하는 게 강풀 만화 세계의 궁극적 목적은 아닐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굳이 연애 관계까지 가지 않아도, 고등학생 장희수가 아빠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학교로 전력질주하다가 울고 있는 북한 공작원 권용득을 발견하는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는 급한 발길을 멈추고 덩치 큰 (그리고 당연하게도 '순박한') 남성을 한가히 토닥이며 위로한다. 강풀은 고통을 모르는 능력을 가진 후세대가 전쟁 세대의 어른의 상처에 공감하는 이 장면이 꼭 필요했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피 흘리는 남성을 "아저씨, 많이 아프죠?"하며 안아주는 여고생이란 건 역시 기이하고 과하고 비현실적인 숏이다. 어린 여성에게서 따스히 위로받는 남성을 그리고 싶은 (혹은, 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기어이 화면을 뚫고 나온 장면이라고나 할까.


심지어 장주원의 부인 황지희는 원작에 없던 뒷이야기를 갖게 된 인물인데, 그에게 허락된 서사란 조폭 일을 그만두고 숨어있던 주원이 자기 길을 찾게 도와주는 ‘다방 레지’가 되는 것이다. 원작에서 하숙집 딸이었다는 설정을 굳이 바꿔 밑바닥 인생끼리의 상호 구원을 표현하는 건 지겹고 낡은 선택지일뿐더러, “내가 그런 일(성매매)을 해서 애가 안 생기는 것 같다”는 대사를 지희의 입으로 직접 하게 만드는 것 또한 뻔뻔하기 그지없다.


이것이야말로 박경리 작가가 일찍이 ‘히말라야의 노새’*에서 꼬집은 ‘토종’의 정수 아닐까. 일찍이 정치적 노선을 확실히 한 강풀 작가를 자칭 보수 진영의 남성들은 극도로 미워하겠지만, 적어도 혈연가족의 신성함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나 부족한 젠더감수성에 한해선 좌우 구분없이 서로 똑 닮아있단 걸 ‘무빙’으로 하여금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제작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리즈 후반부, 남파된 북한 공작원들이 연신 읊은 “인민은 죄가 없다. 죄는 희생을 강요하는 자에게 있다”가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념에 휩쓸린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만으로 끌고 가기엔 20화는 너무 긴 분량이다. 체제에 대한 저항 의식은 분명하지만 ‘그래서’ 만들고 싶은 세상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대체 그 저항의 끝에 사랑받는 남성과 위로하는 여성이 이루는 가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기는 한지 <무빙>은 한 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게다가 선별된 특수부대라는 북 공작원들의 차림새는 더럽고 너절하기 짝이 없다. 이념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인류애를 표방하는 체하지만, 그간 미디어에서 지겹게 재현되어온 빈곤과 동정 어린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에 그칠 뿐이다.


진실된 인류애를 그리고 싶었다면 그에 충실하면 될 것을, 넷플릭스의 인기 공식을 모방한 듯 쓸데없이 잔인한 슬래셔가 여기저기 투입되어 이 ‘아름다운 휴머니즘’의 가치를 해치기도 한다. 내장이 터지고 목을 부러뜨리는 액션 활극의 어떤 부분을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극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버스의 추격전처럼 인기 있는 여러 장르의 이곳저곳을 찔러보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많은 시청자들이 지적한 ‘사연팔이’는 시즌제인 드라마 특성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감안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연이 10년 전 연재된 원작 웹툰보다도 더 뒤떨어졌다면 세태만화가 강풀을 두고 시류를 선도하는 창작자라고 평하기는 어렵다.

강풀은 이번 연작으로 말미암아 일종의 작가주의 창작자로 발돋움하길 염원하는 듯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가족뿐이란 현실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한창 K콘텐트에 열광하는 글로벌 무대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았을지는 몰라도, 언제까지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가족주의로 승부할 수 있을까.



히말라야의 노새 –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中)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23/10/29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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