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비행, 평화, 자연. 지난 40년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휘한 지브리 세계를 집대성하는 키워드다. <붉은 돼지>처럼 소녀 대신 비인간 성인 남성이, <벼랑 위의 포뇨>처럼 비행이나 질주 대신 유영하는 물의 이미지가 등장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죽음 그 자체가 두드러지는 등 한 조각씩 변주된 적은 있어도 기본 뼈대는 항상 같아왔다. 그렇기에 소녀 대신 소년 주인공을 두고, 막연한 가상의 시공간 대신 세계대전 시기의 일본이란 배경을 명시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상당히 낯설게 다가오는 신작이다.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몹시 사랑받았던 전작들의 향기를 느낄 만큼 기존의 하야오 연출작과 흡사하기도 하다.
마히토가 하는 모든 행동의 동인은 ‘이모를 찾아 집에 돌아간다’는 것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족을 찾아 신들의 세계를 빠져나가려는 치히로와 통한다. 말하는 짐승이나 의지를 가진 종이인형들 역시 여러 작품과 겹치고, 태어나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와라와라는 <모노노케 히메>가 보여준 숲 속의 혼들이나 토토로를 떠올리게 하며, 신성을 지닌 돌과의 계약이 언급되는 순간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캘시퍼가 처음 하울과 계약을 맺던 장면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무수한 오마주들이 자가복제가 아닌 거장의 회고적 시도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각자 지브리 세계관이나 창시자와 쌓아온 애틋하고 친숙한 시간의 두께 덕일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영화 외적으로도 어딘지 불길한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것을 품고 있다. 할 말은 많고 시간은 없는 이의 초조함이 자꾸 화면 속으로 스며들어오기 때문일까.
전작 중 <그대들…>과 가장 비슷한 모티브를 가진 작품을 딱 하나만 고르라면 내겐 아마 <벼랑 위의 포뇨>일 듯하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라퓨타와 마법 소녀 키키와 원령공주까지 폭넓게 뻗어나갈 수 있는 ‘원본’인 것처럼, 포뇨 또한 <그대들…>의 전신 혹은 습작으로 재의미화되는 영화다. 비교적 최근작인 포뇨 역시 개봉 당시에 난해하고 서사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다소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대들…>은 한술 더 뜬 난해함과 산만함 그리고 불친절함을 지향한다. 포뇨가 그랬듯 <그대들…>도 이야기 대신 이미지로, 목적으로 말미암아 구체화되는 영화다.
극 중 마히토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그에게로 범람하고 적시는 물은 포뇨가 생명 에너지를 폭발시켜 일으킨 쓰나미와 유사하다. 돌과 계약을 맺고 탑의 세상을 관장하던 큰할아버지는 포뇨의 아빠 후지모토의 기인/마법사 같은 비주얼을 닮았고, 그들은 둘 다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상태에 머물며 세상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맡은 (그리고 언젠가는 세계를 파괴할 숙명을 스스로에게 지운) 반-전능한 경계인이다. 아이를 낳아주는 여성은 자연 그 자체를 표상하고, 나츠코와 그란 만마레(바다의 어머니 신, 바다 그 자체)는 세계의 가장 중요한 금기와 닿아있다. 포뇨와 마찬가지로 그대들에도 젊어지는 할머니들, 그리고 왜가리와 앵무새들을 매개로 해, ‘변형되는 몸’의 이미지가 빈번히 등장한다.
두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견지하는 철학을 거의 원본 그대로, 다시 말해 이해를 돕고 기름칠을 해줄 이야기적 기교와 편집 없이 보여주는 것만 같다. 15년의 틈을 두고 쌍둥이 같은 두 영화를 만든 82세의 하야오는 그저 초조해 보인다. 무엇이 그리 초조하냐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재창조해줄 후세대를 확인받고 확언하고 싶어 다급하다. 이전 세계에 대한 파괴 없이 무질서와 비상식을 현상 그대로 받아들일, 정반합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와 화해해 주는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그는 여전히 온 마음을 다해 하고 싶어한다.
다시 짚어보는 나우시카부터 지켜온 미야자키 하야오만의 공식. 불로 일으킨 전쟁, 홍수나 그에 비견하는 짐승/벌레의 범람 등 인간 공동체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한 주체는 그 현상을 억지로 끄거나, 막거나, 아무튼 이성적이고 상식적이고 통념에 반하지 않는 진단을 내놓은 어른들이 아니었다. 그 모든 합리성에서 멀리 떨어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조리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고 아이들만의 시선으로만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이해한다.
나우시카는 파괴된 숲에서 떼거지로 몰려오는 오무 무리의 분노를 이해하기에 그들을 막지 않는다. 치히로는 주변 영을 모두 집어삼키는 신의 아픔을 이해하기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동행이 된다. 원령공주와 아시타카는 저주받은 악귀가 된 멧돼지 신과 사슴 신을 경애하고 연민해 그들을 쏘지 않고 자기 살을 내어주며 승천을 돕는다. 소피와 하울은 국가의 전쟁에 귀속되길 거부하고 시간을 거슬러 최초의 계약으로부터 세계와 화해할 방법을 찾는다. 이 선택지들은 명쾌한 공통점을 갖는다. 죽음을 불사한 공감. 세계-어른의 관습법에 얽매이지 않는 비합리성.
소스케의 엄마 리사와 할머니들, 원령공주와는 반목하지만 인간들의 완벽한 연대적 공동체를 이룬 에보시 등 드물게 주어지는 어른들의 믿음과 지지는 이 아이들의 힘이 된다. 특히 포뇨와 소스케 주변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터무니없는 주장 (“물고기가 기적을 쓸 줄 알아”, “물고기가 포뇨가 돼서 날 만나러 왔어”)을 경청하고 심지어 믿는 것처럼 반응한다.
이 할머니들 중엔 특히 괴팍하고 현실적인 한 명의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포뇨의 토키 할머니와 그대들의 키리코 할머니다. 이 둘은 말도 안 되는 아이들과 그에 저항 없이 공감해 주는 ‘이상한’ 어른들의 세계를 즉각 따라가고 감응할 수 없는 보통의 어른인 관객이 영화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련한 이입의 여지, 영화적 안전지대 같은 인물이다. 그들은 어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상식을 굳게 믿기에 처음에는 아이들의 규칙 없음에 동화되기를 거부하지만, 결국 젊어지거나 치유되면서 아이들과 살을 맞대고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합계출산율 세계 최저인 국가에서 노키즈존이 불쌍한 어른 자영업자를 위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옹호받는 현실. 대부분의 무례는 무지에서 비롯되고, 모진 배척은 그 존재를 직접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누군가를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진실로 ‘아는 존재’가 되면 혐오는 어려워진다. 즉 앎은 이해를 부른다.
토키와 키리코가 잠시 몰랐던 아이의 세계, 아이들의 무질서적 질서를 진정으로 마주할 때, 그들은 자신이 잊었던 유년기를 되살리고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들의 사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 그래서 결말에서 토키는 바다 신의 시험을 통과한 소스케를 가장 먼저 끌어안아주는 할머니가 되고, 키리코의 인형은 마히토가 피안의 기억을 잊지 않게 지켜주는 강력한 부적이 된다.
포뇨는 이 어른들의 이해와 소스케의 ‘알아봄’을 통해 금기를 탈출하고, 바라던 대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인간 여자아이 포뇨가 소스케를 ‘다시’ 만나러 가는 순간, 포뇨가 세상의 존속에 대한 ‘어른다운’ 고민 없이 제멋대로 벌려둔 시공간의 틈은 완전히 봉합되고 뒤틀렸던 시간축은 바로잡힌다. 마찬가지로 마히토와 히미 역시 ‘틈을 뛰어넘어’ 자기 세계로 돌아온다. 이렇듯 아이들은 서로의 본질을 즉각 감지할 줄 알고 세계의 껍질 안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볼 줄 알며, 같은 처지의 어른들이 감내하는 것과 같은 부담도 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다.
그러니까 하야오는 늘 하던 방식대로 늘 하던 말을 했을 뿐이다. 반전과 평화. 자연과 균형. 비행과 질주. 범람과 침습. ‘나를 아는 자는 죽는다’는 금장과 무덤 앞의 펠리컨은 개화기 일본을 침범한 서양을, 펠리컨처럼 사람을 먹으려 들고 사람처럼 총칼을 들었지만 묘하게 얼빠진 앵무새는 침략자 서양을 모방하고 대동아공영을 꿈꾸던 시기 일본인들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하야오의 ‘반전’에 대한 일관된 믿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그래픽의 엄청난 질량에 압도당하다 보면 은유적인 상징물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따지기보다도, 하염없이 질주하는 소년 소녀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강렬한 의도를 갖고 그려졌는지 곰곰 반추하게 된다.
하야오도 직감했듯 이 아이들의 가능성 역시 차차 흐릿해지고 있다. 그가 기원한 바와 달리 현실의 후세대는 너무 빠르게 때 묻는다. 공존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각자도생의 가치를 더 가까이 느끼는 아이들이 되어간다. 마히토는 엄마의 상실 이후 세계와 자신의 불일치를 겪고 있으며, 누군가 자기를 알아봐주고 돌봐주기를 바라는 아이다운 욕구 때문에 스스로에게 상처를 낸다. 그렇게 벌어진 상처는 마히토가 사실대로 말하며 진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아물었지만, 하야오의 다음, 다다음 세대들에게 그럴 용기나 의지가 있는지는 불분명하다(바로 그 때문에 그가 다급하고 초조하게 할 말을 하고 또 하는 노인처럼 구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반전’과 ‘직시’를 말할 자격이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충분했는지는 각기 판단이 다를 것이다. 이 영화는 가해국가를 정확히 지목하지 않고 자기연민을 전시한다거나 반성은 부족하고 가르침은 섣부르단 이유로 지적받는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보다도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는 구호가 훨씬 와닿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의 흐릿한 책임의식이나 외면이나 자기연민(을 규탄하는 말에는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등등이 대죄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간 설정을 부러 어지럽혀서라도 민족과 국가를 뒤섞은 공간을 발명함으로써 기묘한 아나키즘을 공고히 한 하야오였는데 그가 굳이 전시 상황의 일본을 부정할 수도 없게 못 박아놓은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엄마가 불타 죽은 아이의 슬픔은 공감하되, 그 애가 살상무기의 부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경탄하는 장면에서는 되려 냉정한 거리감을 가질 수 있다. 나츠코와 히사코 자매가 살던 울창한 자연 속 고풍스러운 저택에 절대 어울리지 않는 그 부품들이 군수물자로 돈을 버는 아버지의 탐욕인 것은 모두가 안다. 그것들이 어디로 출정 가서 누구를 죽이게 되었는지도 안다. 누구는 징용되어 굶어 죽던 시절에 그 소년이 어떻게 통조림에 쌀밥을 먹으며 맛없다는 투정을 할 수 있었는지도 우리는 안다.
하야오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말은 왜가리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하나의 단서를 더 제시한다. 왜가리는 대놓고 진실과 거짓의 패러독스를 상징하는 존재다. 모든 왜가리가 거짓말쟁이란 명제에 마히토는 ‘거짓’을, 왜가리는 ‘참’을 대답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은 잊어, 너도 잊어야 해”라는 메시지는 과연 거짓인가 참인가? 이를 왜가리의 패러독스 식으로 뒤집으면 “모든 사람들은 잊지만, 너는 잊지 말아야 해” 혹은 “잊지 않는 사람도 있어”라는 당부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쟁 막바지에 태어난 일본인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세대 일본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던지는 질문이라고 느껴지는데(다만 지브리와 하야오의 ’이름값‘이 그 전파에 압도적인 역할을 해버렸을 뿐), 피해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로서 감히 가해국에서 호의호식했던 이가 ‘훈계’를 하려 든다는 점에 도의적 분노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까.
다시, 역사의식보다는 성차별에의 저항 의식이 훨씬 강한 사람이라 사족을 달자면, 오히려 내가 거슬린 쪽은 히미의 마지막 대사 “너를 낳는 건 멋진 일이잖아”였다. 이 한 줄이 최근 하야오 세계에 대해 갖게 된 옅은 의심을 짙게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늙어가는) 그의 여성관이 이제는 여성을 임신 출산의 캐리어로 보는, 모성이란 기능을 성역화하는 쪽으로만 너무 치우친 것 아닌가 하는 의심. 하야오 연출작 중 거의 유일하게 이견 없이 소년이 단독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여성 인물들은 소년을 위해 존재하는 가이드 격으로 주변화되고, 그의 특장점이었던 에코페미니즘은 퇴색되는 듯하다.
히미는 불을 다루는 소녀였지만 그가 성인이 되어 마히토를 낳고 기를 때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전혀 단서가 없다. 임신한 몸으로 활을 쏘는 동생 나츠코를 통해서만 그 소녀들과 나우시카-산-포뇨-아리에티 등을 이어주는 전사의 면모를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츠코 역시 충분히 자립이 가능한 지역 유지 가문의 아가씨였는데도 굳이 누군가와 결혼해 아이를 가졌다는 점이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언니의 남편이었단 점을 이해하더라도) 다소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가문의 예언이 그를 홀리지 않고서야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이에 더해 탑 속의 세상에서 마히토는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순수함을 가졌을 뿐이지만 큰할아버지를 승계할 지도자로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히미는 불을 쏘고 와라와라를 구하는 진짜 영웅인데도 큰할아버지에게서 후계 자리를 제안받은 정황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혈연으로 이어지는 돌과의 계약이 굳이 남자아이를 통해서만 이뤄져야 하는지 의문이다. 히미와 나츠코의 역할은 ‘진실로 나아가는’ 남아를 낳고 기르는 데에 국한되어 있는 걸까.
(그런 ‘사소한’ 디테일만 의아해하고, 전쟁 때 태어난 전범국가 창작자가 제대로 된 자성 없이 감히 건방진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는 상대적으로 분노가 일지 않는 사람을 반민족주의자로 보겠다면 나는 그냥 그렇게 불려야겠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그대들…>은 전시 군수공장의 아들로서 유복했던 유년기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이야기다. 그는 전쟁 한참 전 메이지 유신, 일본에 중앙정부가 들어서고 제국주의와 막 태동하던 시기에 홀로 약육강식이란 시대정신 반하는 ‘다른 이야기’를 해냈던 지식인 요시노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거창한 무게감을 감수하고 던져진 ‘어떻게 살 것인가’란 질문은, 훈계보다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한 전쟁 세대 영화인의 마지막 호소에 가깝지 않은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히토를 자기 어린 시절의 페르소나 삼았다기엔 영화의 시선이 소년과 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어 위화감은 더 커진다. 하야오는 여전히 소년이나 그의 주변 남성들 - 아빠, 큰할아버지, 앵무새 군단과 대왕 -에 이입하기보단 히미, 나츠코, 키리코 같은 여성들에 훨씬 더 다정하고 온정적인 시선을 취한다. 반목하고 거절하고 절단하고 서로 잡아먹으려 드는 남성형 인물들과, 세계를 봉합시킬 능력과 의지가 있는 여성 인물들. 자기 세계에 있던 초반부에 소년은 아버지 남성들을 모방하려 하지만, 탑의 세상에 들어올 때부터 일은 마음처럼 되지 않고, 아버지들로부터 금기를 깼다고 비난받거나, 그들의 방식을 거부해서 세계를 영영 파괴하고 만다. 그래서 거기서 그는 시종일관 어머니를 되찾아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는 일념에 충실할 뿐이다.
진실을 지나치게 둘러가는 낭만주의자의 순진함이 아쉬울 수는 있으나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영화에서 자기고백했듯 “이런 세계가 싫다”고 투정하던 냉소적인 도련님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평생 사로잡은 것 중 모성에 대한 밑 빠진 독 같은 그리움이나 비행-기기를 향한 애착 외에도 평화와 반전에 대한 열망이 (희미하게나마) 있었다는 점 자체가 드물어 늘 놀랍다고 느낀다.
‘나의 이야기’이기에 주연은 소녀 아닌 소년일 수밖에 없었지만, 뚜렷한 목적 - 집에 돌아간다, 전쟁을 끝낸다 -을 지켜왔기에 자기 영화 세계의 시작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린이 세계에 대한 존중을 빼고는 그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온 비범함을 거의 갖추지 못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이상한 비장미, 총체성, 원점으로의 회귀에 대한 강한 열망은 반 세기를 풍미한 거장이 정말로 유작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점을 곱씹게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작품을 날카롭게 바라보기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