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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Mar 02. 2021

'미스 아메리카나' 테일러를 존중하라

지옥에서 돌아온 페미니스트, 세기의 아이돌, '음악산업 그 자체'


2020년 3월 넷플릭스에서 <미스 아메리카나>를 본 날로부터 2009년 3월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린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You belong with me 뮤비를 보고 그를 처음 알게 되었던 순간 이후 지금까지의 세월을 되돌아본다. 그의 노래들 중 많은 것들에 대해 너무 좋다고, 내 스타일이라고, 내 마음을 읽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재능과 섬세한 마음과 애티튜드를 동경하면서도. 어째서인지 테일러의 팬이라는 '선언'은 좀체 하지 못했던 긴 세월.

다른 가수들에게서 아주 약간의 동질감이라도 느끼면 단박에 그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좋아하는 팬인 것처럼 열렬한 애정을 바치고, 그 사랑을 전시하고 자랑스러워하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어쩐지 '10대 소녀 취향의' 가수, 그러니까, 숨기고 싶고 유치해 보일까 걱정되는 취향이었다. 그래서 테일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내 길티 플레저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그에게 너무나 부당한 대우였단 걸 안다.


그를 부끄러워하고 '어린 여자애들이나 좋아하는' 가수라고 생각하게 만든 건 대체 누구였을까? 아니 애초에 '어린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가치 없다고 믿게 만든 그 힘은 뭐였을까? 이제는 그 답을 알지만, 우리 모두가('어린 여자들' 그 자신까지 포함한 모두가) 어린 여자의 성취나 능력 혹은 취향과 언행을 별 고민 없이 폄하해왔던 역사는 아직 끊기지 않았다. 그렇게 되게 만든 힘, 그 힘의 근거가 된 언어와 문법들 역시 절멸하지 않았다.



라나 윌슨 감독의 <미스 아메리카나>는 테일러가 쓴 동명의 곡을 제목으로 붙인 다큐멘터리이자 철저히 테일러에 대한, 테일러를 위한, 테일러에 의한 발언의 장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편파성'마저도 다 테일러의 약아빠진 공작인 것처럼 얘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테일러가 미디어와 대중으로부터 두들겨 맞아온 강도에 비해 그가 해명할 수 있는 지면이 너무도 적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해명한다 한들 이미 다들 답을 정해두고 그를 마음껏 비난해온 일을 생각하면. 테일러는 더더욱 말하고 설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럴 자격은 물론이고 그럴 필요가 있다. 사실 고소를 하든 토크쇼에 나와서 자길 비웃고 깔보았던 동료들 한 명 한 명 이름 불러가며 저격을 하든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텐데, 묵묵히 작업물로만 말하겠다는 듯한 점잖은 태도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칸예 웨스트-킴 카다시안과의 오랜 분쟁은 결국 그 부부가 노이즈 마케팅을 위해 테일러를 음해하고 통화내역을 날조한 것이었단 사실이 밝혀지며 마무리되었다지만, 그간 그 사건을 위시한 여러 싸움과 사생활에 대한 여성혐오적 보도에 의해 테일러가 겪어온 모든 말들은 너무 모질었고 인격 말살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심지어 테일러가 피해자였던 성추행 사건에서조차 그녀를 믿지 않았고, 법원 판결이 확실하게 그녀의 손을 들어준 다음에도 '관심이 또 필요했나 보지' 따위의 말들로 테일러를 조롱했다. 그 말들이야말로 '편파적'이지 않은가. 솔직히 물 건너 방구석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내가 지겨워질 정도로 들들 볶이고 의심받고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10년 넘는 수모의 세월 동안 그녀가 미치지 않은 데에 감사해야 할 정도다.


채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칸예에게 마이크를 뺏겼던,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으면서도 직후의 인터뷰에서는 "칸예를 싫어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누구와 싸우고 싶은 게 아니에요"라고 말했던 착해빠진 소녀는 이제 그녀 나름의 방식대로 전사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가 상처받은 채 두문불출했던 젊은 날의 시간을 누가 보상할 수 있을까. 원치 않게 휘말린 사건들과 구설수에 대해 담담히 심경을 고백하는 것을 넘어, 현실 정치의 유의미한 스피커가 되고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행동가로 변화하는 과정까지 담은 이 솔직한 영상이 갖는 의미가 정말 크다. 흡인력이 강한 영상이었다. 그리고 테일러의 삶은, 덧대거나 변명할 것 없이 그 자체로 이미 드라마였다.


다큐를 시청하며 요즘 영미권의 셀렙 페미니스트 중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자밀라 자밀이 "we're toxicated to hate other women without any reason"이라 썼던 일을 계속 떠올렸다.

자밀라는 "그들(미디어)이 젊고 능력 있는 여성을 다루는 방법은 간단하다: 계속해서 위로, 위로, 위로 올려 보내는 것. 그건 오직 그녀가 추락할 때 그걸 바라보며 기쁨의 춤을 추고 조롱하기 위해서일 뿐이다."라고 지적한다. 이유 없는 hatred의 지난 희생자들로 호명당한 여성들은 제니퍼 로페즈, 앤 해서웨이, 메간 마클, 테일러 스위프트, 오프라 윈프리 등이다. 자밀라가 아카이빙하는 일련의 기사들을 보며 죄지은 것 없는 여성 연예인이 '여우 같다' 혹은 '재수 없다' 혹은 '그냥 기분 나쁘다', '성격이 나쁠 것 같다' 등등 터무니없는 이유로 평판이 추락하고 억울하게 몰이당했던 한국의 사례들이 연상됐다. 성공한/자립적인 여성상이 여성혐오에 의해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끌어내려지는 일은 역시 만국 공통의 스포츠인가 싶어 입이 썼다. 혹여 그녀가 정말로 어떤 죄를 지은 경우라고 해도, 짧은 자숙 후에 '음악/연기/작품으로 보답하겠다'라며 뻔뻔히 기어 나오는 남성 연예인에 비하면 여성 연예인은 절대 회복할 수 없을 수준으로 욕을 먹고 영구히 '나쁜 년'이 되고야 마는 세태는 확실히 기이한 구석이 있다.


자밀라가 '독소'와도 같다고 표현한 이 여성혐오는 너무 보편적이고, 너무 강력하고, 너무 자연화되어서 심지어 같은 여성끼리도 아무런 이유 없이 서로를 싫어하고 질투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으로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잘 나가는) 여자가 '이유 없이' 고깝게 보이고 싫어질 때마다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게 자밀라 자밀의 메시지다. 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후 그런 말도 유행하지 않았나. 여자가 욕 먹고 여자가 싫어질 때는 우선 끝까지 참아보자고. male gaze가 세상의 지배적인 담론이고 시점이고 서사일 때, 여성들이 박탈당하는 것은 개개인의 주체성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연대와 이해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누구도 자신을 비호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온몸으로 혐오에 대항하며 연마된 이 당당한 미소를 보라. 시상 직후 악의로 가득 찬 30대 남성 동료에게 발언권을 탈취당하고 '이 상은 비욘세가 받았어야 해' 따위의 (비욘세도 제발 그러지 말라며 경악한) 모욕적인 언사를 그대로 들어야만 했던 무력하고 어린 여성 아티스트에서. 자신을 성추행한 라디오 dj를 고소하고도 '테일러가 또' 뭔가를 잘못했고 관심을 받고 싶어서 쇼하는 중이라는 말들이나 들어야 했던 성폭력 피해자에서. 끝내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법정 공방에서 승리하고, '피해자 됨'을 용기 있게 직시하며 다시 일어서고, "어린 세대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며 청소년을 위한/청소년에 의한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적 스피커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기까지. 테일러가 소화했던 진통을 함축한 듯한 최근의 태도가 정말 임파워링 되었다. 그녀는 비로소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아래는 보면서 메모해뒀던 문장들.




<Being the good girl>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도덕적 나침반 중 하나는 좋은 사람이 되자는 것(being the good girl)이었어요.'

‘칭찬을 많이 받으면 행복해지도록 교육받았어요.’ ('trained to be'라는 어구의 지속적인 등장)

‘제가 팬들과 함께 자라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어요. 제가 겪은 일을 써서 노래로 냈는데, 팬들이 그때 저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거예요. 마치 팬들이 제 일기장을 읽고 있는 것처럼요.’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나요. 그러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살고 그것을 통해서만 기쁨과 성취를 느끼게 되면, 나쁜 일 하나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이 갈채를 보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사람인 저로서는…’

‘함께 정상에 올라서 기뻐해 줄 사람이 없었어요. …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지금 당장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섭식장애와 언론의 공격>

‘항상 다다르지 못하는 아름다움의 정의가 있어요. 마르면 충분한 엉덩이가 없고 엉덩이를 위해 살을 찌우면 배가 나오게 되죠.’

‘아파 보이는 것보다 뚱뚱해 보이는 게 나아, 라고 생각하지만….’

(자료화면인 뉴스에서) ‘너무 완벽하고 너무 말라서 불편해요’, ‘무슨 버스 갈아타듯 남자들을 바꿔요’

‘백래시에 그토록 상처를 많이 받은 이유는 그게 내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에요.’

‘모든 것을 다시 설정해야 했어요. 내가 쌓아온 신념의 체계를 지킬 수 없었어요. 지키거나 미치거나였거든요.’


<‘공화당이 지난 몇 년 동안 공화당일 거라고 암묵적으로 생각해온’ ‘그 나이에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위험한’ 여가수가 트럼프와 고향 텍사스의 공화당 후보에 대한 보이콧을 공식 선언하다>

'사람들에게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 된다는 게 컨트리 가수의 불문율이에요. 그냥 그들의 삶을 살게 놔두는 거죠(let them live their own lives).'

'"don’t be like the Dixie Chicks."'

'착한 아이는 사람들에게 입장을 강요하지 않고, 착한 아이는 웃고 손을 흔들며 감사하다고 하면 되는 거죠. 착한 아이는 자신의 가치관으로 남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아요.'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려고 집착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내게 ‘끼어들지 마’라고 말하는데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지속적으로 전략을 짜고 그날 하루 욕먹지 않고 잘 버텨야 하는데, 그러면 전략적이고 계산적이라고 욕을 먹게 되죠.’ ‘루즈루즈 시추에이션이네요.’


<입마개를 벗은 기분이에요.>

'연예계에 종사하는 여성이 35세가 되면 이미 한물간 신세로 버려지는 사회에서는 아직 할 일이 많죠. … 누구나 한 2년은 신선한 장난감이고요. 내가 아는 여가수들은 남성들보다 20번은 더 변화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아니면 잊혀지거든요. 사람들이 관심 가질만한 반짝거림을 유지해야 되죠.'

‘입마개를 벗은 기분이에요.'

'글리터를 좋아하면서도 이중잣대를 비판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핑크를 입으면서도 정치적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 생각엔 이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물론 미국의 포스트페미니즘이 거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수준이라는 비판에 여러모로 공감하던 나로서는, 테일러가 다큐멘터리에서 스스로 페미니즘적이라고 선포한 실천들에 약간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이를 가지고 테일러 개인을 비판하거나 강박적 요구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테일러는 스스로를 미소지니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상업화되고 성애화된 육체를 전시하고 긍정하는(해야만 하는) 여성 가수로서 매우 다층적이고 혼종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이제부터 언급하는 '테일러'는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인간보다는 그가 내보이고 전시하는 상징, 시뮬라크르로서의 '테일러'라는 하나의 이미지라고 이해하면 더 정확할 듯하다. 여성으로서 받은 억압의 경험을 공통분모로 두고 동일시할 수 있는 훌륭한 롤모델인 테일러가 아니라, 육체/제스처/섹슈얼리티로 인해 혹독한 비난을 받고 삶의 위기를 겪으며 자기 자신을 정치적으로 재조정한 연예계 종사자인 테일러에 대한 (억지로 거리감을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한) 비평을 덧붙인다.


테일러는 분명 그의 성공과 자신감을 질투하고 그를 불신한 여성혐오적 사회 탓에 수년간 고통받았다. 자신에 대한 핍박을 부추기는 미디어나 무례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이유에는 그가 평생 ‘착한 아이(good girl)’가 되도록 교육받았던 전형적인 백인 기독교 가정의 딸이라는 배경이 큰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전 세계의 여성들은 대체로 이런 은근한 강박과 사회적 불신의 경험에 매우 쉽게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을 테다. 따라서 테일러는 자신의 풋풋한 사랑을 솔직한 가사로 풀어내 소녀들을 자신의 로맨스 판타지적 세계로 포섭했던 과거에도 소녀 아이돌이었고, ‘여성이기 때문에’ 부과된 고난을 통과한/통과 중인 현재도 ‘완전한’ 의미의 소녀 아이돌로 존재한다. 현시점의 그는 그 자신과 동료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적 선언, 실천, 반성적 고민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멋진 여성상이다.



하지만 테일러는 앤젤라 맥로비의 발광성 luminosities 개념이 이야기하는 ‘훈육 권력을 부드러운 형태로 유화하면서 극화하고, 가장하며’ 발휘되는 힘(푸코의 '통치 기술'과도 유사한 의미의 '힘')이 실제로 여성 신체에 어떻게 구현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과거에 식이장애를 겪었다고 털어놨고 "항상 다다르지 못하는 아름다움의 정의가 있"다는 여성혐오적 현실에 환멸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는 수년에 걸쳐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기검열과 백래시를 가한 끝에 "아파 보이는 것보다는 뚱뚱해 보이는 게 낫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테일러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쇼 비즈니스 안의 상품으로써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 자체는 개의치 않는다. ‘과자 포장지’ 같은 옷을 입고 팔이 잘 올라가지도 않는다며 투덜대기도 한다. 미국 쇼 비즈니스 세계의 정상에 올라 있는 테일러에게 자신의 신체와 패션이란 곧 활용도가 가장 높은 자산이자, 자신의 완성된 작업물을 전시하는 중요한 장이기 때문에 그는 그런 ‘매력적인’ - 다른 말로 하면 ‘지극히 성애화된’ - 옷들을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연예계에 종사하는 여성이 35세가 되면 이미 한물간 신세로 버려지는 사회에서 아직 할 일이 많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그의 내레이션 뒤로 보이는 자료 화면이, 무대에서 첫 번째 의상인 겉옷을 찢고 딱 달라붙는 두 번째 의상을 공개하는 퍼포먼스의 연속이었다는 점도 상당히 모순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그가 타고난 외모가 전 세계의 대중에게 주는 효과 역시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 팬미팅에서 테일러가 ‘당신은 마치 바비 인형 같아요’라는 칭찬을 들은 장면이 특히 뇌리에 남았다. (평소 테일러가 상대적으로 덜 의식할 수밖에 없는) 비서구 사회의 비백인 팬덤에게, 백인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극대화된 – 그렇게 보이도록 기획되고 관리받은 – 아이돌다운 외모는 상당한 문화적·미학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해당 장면을 지켜보며 아시아-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소녀 아이돌들이 가지는 문화적 영향력이 연상되기도 했다. 블랙핑크나 아이유와 같은 ‘예쁘지만 강단 있고, 걸크러쉬와 보호 본능을 동시에 유발하고, 큰 눈과 마른 몸과 매우 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 아이돌들의 이미지가 동남아시아로 유입되면서 어린 여성 팬덤의 모방이 숱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건 다들 잘 알 것이다. 나는 그런 소녀 아이돌 이미지의 지구적 통용이 상당히 유해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특히 10대-20대의 여성들의 신체에 규범적 이상향으로서 작동하는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테일러의 연예계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하필 ‘미스 아메리카나’인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소녀 아이돌인 동시에, 미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탑스타이기도 하다. 테일러는 지역민 대다수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시골에서 자랐으며, 미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규범의 피해자이자 향유자이고, 거대 스타디움에서 미국 국가를 불렀으며, 끝내는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발언의 자유를 드라마틱하게 실현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그는 청교도 정신, 근면과 자수성가, 독립심, 자유라는 미국의 핵심 가치를 온몸으로 구현해낸 소녀다. 테일러의 능력도 외향도 언행도 미국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 미국인의 상과 완벽하게 합치되니, '캡틴 아메리카나'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앞서 연구자 김예란은 그의 글 "아이돌 공화국: 소녀 산업의 지구화와 소녀 육체의 상업화"에서 신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지구적 상업주의, 그리고 포스트페미니즘의 공모적 관계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 바 있다. 김예란에 따르면, 아름다운 소녀라면 마땅히 ‘순결’한 동시에 ‘관능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소녀 아이돌의 신체에서 매우 수동적이면서도 과잉된 모순적 섹슈얼리티로 완성되고 이 섹슈얼리티는 다양한 팬덤 집단에게 맞춤형의 만족/규범을 선사한다. 특히 어린 여성들에게 소녀 아이돌의 신체는 동일시의 대상이 되어 그들의 자기주도적인 자기성애화를 유도하게 된다. 한 발 더 나아간 맥로비 등의 논의는 바로 이 모순된 섹슈얼리티와 동일시의 지점이 포스트페미니즘의 거대한 음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지적을 제시한다. 포스트페미니즘 하에서 '유능한' 여성이란 능력이 뛰어난 것뿐만 아니라 '잘 규율되고 관리되고 기획되는' 몸을 유지하고 전시하는 여성이다. 자신의 사회적/심리적 자원들 중 백인-이성애-신자유주의 이상에 따르는 글래머러스한 몸을 가장 우선시하게 되는 이 기획이 바로 포스트페미니즘의 핵심이다.


테일러는 '미스'이자 '아메리칸'이다. 두 강력하고 거대한 집단의 대표적 상징들은 그녀의 무기이자 장애물이 되며, 그녀의 신체는 '미스'와 '아메리칸'이 경합하고 공모하는 커다란 장이다. 그 신체는 결국 이성애규범성/가부장제 내에서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는, 그럼으로써 기존의 체계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이상화되는 형태로 완성된다. 여성혐오에 정면으로 부딪혔고 여전히 싸우고 있는 저항적 페미니스트로서, ‘사람들이 관심 가질만한 반짝거림을 유지해야 하는’ 운명의 여성 아이돌로서, 테일러의 수행적 실천은 영원한 딜레마와 혼란을 수반할 것이다.



다시 비판의 날을 조금 무디게 해 보자. 테일러가 2021년에도 여전히 여성혐오적 미디어와 그에 호응하는 여성혐오적 대중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이런 페미니즘 비평조차 너무 섣부른 일일지도 모른다. 앨범 <Folklore>와 <Evermore>를 연달아 발매하며 이젠 정말 아무도 그의 천재성을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화려하게 증명한 현시점에도, 일부 미디어와 대중은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성과를 평가절하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애쓰는 추악한 역할을 십분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Ginny&Georgia>(2021)에서는 "뭘 신경 쓰는 건데? 넌 테일러 스위프트보다 더 빨리 남자를 갈아치우잖아"라는 대사를, 또 다른 넷플릭스 시리즈 <Degrassi: Next Class>(2017)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기 전 남친들로 커리어를 다 쌓았지(Taylor Swift made an entire career off of her exes)"란 대사를 그대로 송출시켰다. 며칠 전 트위터 유저들이 두 드라마의 잘못된 대사를 고발하며 '#Respect Taylor Swift'를 트렌딩시키기 전까진 제작진 중 누구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은 것이다. 급기야는 이 트렌드를 발견한 테일러가 직접 트윗을 하는 슬픈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Hey <Ginny&Georgia>, 2010 called and it wants its lazy, deeply sexist joke back. How about we stop degrading hard working women by defining this horse shit as FuNnY. Also, @netflix after <Miss Americana> this outfit doesn't look cute on you. Happy Women's History Month I guess."

(야, 2010년대에서 전화 왔는데 이 게으르고 완전 성차별주의자 같은 농담 자기 거라고 돌려달라더라. 이딴 걸 '재밌다'고 말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여자들 깎아내리는 건 그만하는 게 어때? 그리고 <미스 아메리카나>까지 나온 판국에, @넷플릭스 너랑 이런 거 전혀 안 어울려. 다들 행복한 여성의 달 되든가 말든가.)




10년이 훌쩍 넘어도, 최고 상을 아무리 휩쓸어도 결국 자기에게 사람들이 붙이고 싶어 하는 꼬리표는 '남자 갈아치우는 년'이란 점을 다시금 확인한 이 천재 아티스트의 분노와 허망함과 체념이 얼마나 깊을까. 지난 앨범에서 테일러의 지친 마음, 굳은 의지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곡이라고 느낀 건 mad woman과 the last great american dynasty였다. 특히 the last great american dynasty에서 테일러는 약 100년 전의 '미친년, 마녀, 남자 잡아먹는 년'이었던 레베카 하크네스를 소환하며 제 억울함을 승화시킨다.


레베카 하크네스 자신도 작곡가, 조각가, 발레의 후원자일만큼 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나, 단지 출신 계층이 달랐던 남편 사후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고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하나"가 되어 '남의 돈'을 제멋대로 '낭비'했다는 이유로 평생 남성들의 비하와 질시에 시달렸다. 그는 얼마나 외롭고 고단하고 또 단단한 사람이었을까. 연인이 죽은 후 자신을 물어뜯고 씹고 끌어내리려 하는 사람들, 자신의 사랑과 삶을 함부로 폄훼하려는 눈길들을 견뎠을 여자의 일생을 상상하면 아연해지는 동시에 존경심이 든다. 노래를 듣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인종, 다른 계급의 여자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레베카는 그 시대의 마녀였고, 돌팔매질을 두려워 않는 용기를 가졌고, 스스로를 기꺼이 탐미적 인생에 내맡겨 불살라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100년 후 그녀의 집과 악명을 물려받은 또 다른 마녀-예술가-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그 삶을 다시 풀어내 노래한다. 얼마나 시적으로 합당하고 완벽한 서사인지.


개인적으로 "We're the granddaughters of the witches you couldn't burn"이란 문구를 정말 좋아하는데, 레베카 하크네스를 동일시하고 그의 시련과 자기 시련을 겹쳐본 테일러도 이 노래를 쓰면서 저 문구를 종종 떠올리지 않았을까 상상해봤다. 테일러를 성추행했던 라디오 피디는 고발당한 후 "그녀가 내 커리어 전부를 망쳤다"며 지껄였고, 이후 칸예의 지겨운 괴롭힘까지 이어지며 그녀에게 남은 건 '교활한 악녀' 혹은 '잘 나가는 남자들의 인생에 제동을 거는 썅년' 정도의 멸칭이었다. 하지만 테일러가 끝내 완벽하고 우아한 승리를 거두고 뱀으로부터 나비로 부활해 노래하는 가사는 "i had a marvelous time ruining everything"이라는 게 정말 경탄스럽고 좋았다.


사람들은 이 젊고 능력 있는 여성 아티스트를 이미 너무 오랫동안 괴롭혀왔다. <미스 아메리카나> 이후 1년, 이제는 정말로 '리스펙트 테일러' 해야 할 때다.



*이 리뷰는 김예란의 “아이돌 공화국: 소녀 산업의 지구화와 소녀 육체의 상업화"(한국여성연구소 엮음(2014), <젠더와 사회>, 동녘, 391~410쪽) 글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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