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파이어>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순도 높은 로맨스이고, 가장 현실적/현대적이며, 그래서 가장 독해하기 어려웠던 영화다. 개인적으로도 플롯은 가장 쉽지만, 이해는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도 “지금까지의 페촐트 영화와는 사뭇 다른 영화”라고 평하는 걸 보니 모두 비슷하게 느꼈을지도.
그러니 이 질문으로 시작해봐야겠다.
첫째로 그간 페촐트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모티브가 되어온 ‘유령성’의 이미지와 먼, 속된 말로 땅에 발을 아주 바짝 붙인 현실적인 영화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페촐트의 역사 - 정확히는 ‘억압된 시대의 사랑’ - 3부작은 분단 국가의 연인(바바라),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피닉스), 전쟁 난민(트랜짓)으로 요약되는 역사적 유령을 불러내기 위하여 직접적인 상처와 파열의 음향과 이미지, 서로의 얼굴을 오인하는 사람들 등 일관된 소재를 두고 변주한다. 죽은 신이 연인을 위해 살아돌아오고(운디네), 죽어가는 여자가 마지막 꿈을 꾸고(옐라), 도망다니는 길 위에서 젊음을 소진하거나(내가 속한 나라) 남편과 연인 사이 사활을 건 사랑을 하는 여자(열망)에서도 이 유령들의 배회는 반복된다.
그러나 <어파이어>에는 페촐트의 역사와 낭만주의 연작이 강박적으로 유지한 음울함이나 유령성, 신비한 무게감이 없다. 대신 그 자리를 모던한 음악, 현실의 사운드와 현실의 사건들이 채운다. 이 비극적인 욕망,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죽음으로부터의 멀어짐이 어떤 속도나 방향을 의도하고 설계된 것인지는 앞으로의 페촐트 연작들을 통해 더 지켜봐야 할 테다. 물론 <어파이어>에도 결말엔 아주 비극적이고 끔찍한 죽음이 찾아들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그림자가 남는 류의 비극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 레온은 그 죽음으로 인하여 자기의 외피를 깨고 아브락사스처럼 가벼이 다음 페이즈로 도약한다. 이제 유령은 거의 제거되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둘째, 남성 관찰자 시점에서 관찰의 대상물로서 여성이 등장한다. <내가 속한 나라>, <옐라>, <바바라>, <피닉스>, <운디네>까지 페촐트의 대부분의 작품은 여성 인물의 시선을 통해 그의 내면적 욕망과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세계 간의 충돌을 다룬 영화였다. 다만 그가 이를 통해 ‘여성 서사’에 천착하고픈 의도가 있었다기보단, 페촐트가 늘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와 개인의 경합이란 주제에 더 치밀하고 적합한 장場이 여성(의 신체)이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앞선 영화들에 반해 남성 화자 시점으로 시작되는 드문 필모그래피인 <열망>과 <트랜짓>은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적어도 성적 함의를 내포한 메일 게이즈에 대한 긍정적 수용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열망>의 로라는 주된 화자였던 연인 토마스에게 남편 알리를 함께 죽이자고 말한 순간부터 그 서늘한 응시로 말미암아 주체성을 탈환한다. 니나 호스의 단단하고 곧은 얼굴에 의지하던 시절의 페촐트는, 다소 직설적이고 욕망을 위해 오욕과 수치를 무릅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 즉 연인에게 버림당한 여자, 매 맞는 아내, 남편 곁으로 돌아가려 애쓰는 여자들을 주로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트랜짓>의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롭고 속을 알 수 없던 여인 마리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페촐트의 파울라 베어 사용법은 니나 호스의 사용법과 달리 상당히 가녀린 미스터리에 그치는 듯하다. 페촐트의 메일 게이즈에 관한 미심쩍음이 극대화된 작품이었던 <트랜짓>에서 파울라 베어는 신원미상의 아름답고 지적인 여인, 왜 거기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어디로 갔고 앞으로 어디에 갈 것인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잠재적 연인으로 등장해 남성의 애를 태우다가 결국 영영 사라지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결말까지 생사 여부를 알 수 없고 애초에 진짜 존재했던 사람인지도 확언하기 어려운 존재다. 어느 나라로도 오도가도 못하는 교착 상태의 신분, 없어진 사람들, 복잡한 멜로의 틈으로 마리는 매번 바람처럼 왔다가면서 영화 전체의 긴장과 무게감을 관장한다. 김병규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트랜짓>을 필두로 한 페촐트 영화에 깔린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서로 다른 방향의 움직임” 즉 공기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인물은 그를 사랑하는 바이델이나 죽은 남편 게오르그가 아니라 마리인 셈이다.
하지만 마리를 바이델의 관심, 바이델의 관음, 바이델의 집착 속에서만 살아 숨쉬는 인형이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그는 바이델의 눈이 떠나는 순간 움직임을 잃는 정물이다. 화면 속의 마리가 내면적 발화의 기회를 얻지 못했기에(혹은, 거부했기에) 화면 밖의 마리가 취할 선택지를 그 어떤 관객도 짐작할 수 없다. 니나 호스가 페촐트 영화에서 끝까지 (시신으로든 살아서든) 극의 엔딩 장면을 점유하는 것과 사뭇 다른 <트랜짓>의 엔딩은, 기다리던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 극 내내 마리가 반복한 행동 - 바이델의 미소다.
남성의 로맨스적 시선에 처한 여성. 이렇게 아주 단순하고 거친 인상평만 남긴다면 <어파이어>는 <트랜짓>을 일부 계승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사실상 6일밖에 되지 않는 만남 속에서 레온이 강렬하지만 느리게 나디아라는 외부 세계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는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욕망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간 페촐트 영화의 여성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내부와 외부 세계의 충돌을 생생히 느끼게 되고 거부반응으로 모든 인간적 교류, 자기 시간을 할애하는 일에 대한 회피를 택한다. 그렇다면 페촐트가 ‘왜’ 나디아가 아닌 레온을 주인공이자 화자 삼아 이 재해 속의 로맨스를 그렸는지가 다음 질문이 되어야 할 테다.
그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첫 장면, 숲 속에서 펠릭스의 차가 퍼져버리기 전 ‘차가 뭔가 이상해(It’s misfiring)’라는 펠릭스의 말에 레온은 시큰둥하게 ‘난 잘 모르겠는데(I can’t hear it.)’라고 답한다. 이 말은 후에 나디아가 레온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You see nothing)”라고 화낸 것과 짝을 이루게 되면서 통렬한 자기고백으로 재의미화된다. 그는 자꾸만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알지 않기’를 선택하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겉돈다.
‘겉돈다’는 서술은 비물질적인 관계 속에서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첫 장면 차가 고장나 밖으로 나온 순간의 레온은, 희한하게도 돌출적인 구도와 무게를 점함으로써 화면의 전반적인 질감 혹은 톤과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배경은 사진처럼 가만히 있는데 레온이 그 위에 오려붙인 콜라주처럼 희미한 ‘절취선’ 같은 빛을 띠고 어색하게 움직이는 듯하다. 배경의 색감과 레온이란 인물의 색감은 일부러 달리 보정된 것 같은 착시가 인다. 아무래도 그는 남들과 같은 시간 안에 살고 있지 않다. 관념적으로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의심케 한다.
그와 필릭스가 발트해 별장에 처음 도착한 날 레온은 나디아의 이름을 알게 되고, 둘째날에는 멀리서 그의 휘파람을 먼저 듣고 그다음 나디아의 실체를 멀리서나마 ‘보게’ 된다. 이미지보다 앞서서 도착하는 소리, 심지어는 이미지가 끝까지 도착하지 않고 혼자만 선행하는 소리로 가득 찬 페촐트 영화에서 이와 같은 접근법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셋째날이 되어서야 레온과 필릭스, 나디아는 비로소 서로의 정면을 보고 인사하게 되고 오후에는 레온이 나디아의 연인으로 오인한 인명구조원 데비트가 해변에서 그들 사이로 개입한다. 정확히는 펠릭스가 레온의 소극적 항의에도 불구하고 데비트의 공간(해변에 높이 솟은 감시탑)을 침범/방문해 그를 ‘무리’ 속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저녁 식사에서 레온은 자기만 이유를 모른 채 데비트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다 펠릭스의 분노에 찬 일갈을 듣고 일종의 낙오를 경험한다.
넷째날, 시내에 다녀오던 레온과 나디아가 숲길에서 만나고 레온은 실랑이 끝에 결국 한 수 접어 나디아에게 원고를 주지만 혹평을 듣고 마음이 상해버린다. 레온은 또 한 번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혼자 해변에서 넋을 놓는다. 그날 밤 레온은 펠릭스와 데비트가 어느새 연인이 되었단 사실, 그러니까 아주 오래도록 친구였던 펠릭스가 게이라는 사실을 혼자만 뒤늦게 알게 된다.
다섯째날, 레온의 책을 관장하는 출판사 사장 헬무트 베르너가 방문하자 역시 레온을 뺀 모두가 평온하고 다정한 식사를 나눈다. 데비트와 펠릭스가 고장난 차를 견인하러 간 동안 헬무트는 통증으로 쓰러지고 그를 병원에 데려간 나디아와 뒤따라간 레온은 복도에서 밤을 지새운다. 여섯째날 헬무트는 암 병동에서 목격되지만 레온은 여전히 그 의미를 모르고 자기 책 생각뿐이고, 이 자기중심성이 나디아의 화를 (드디어) 돋운다. 레온은 뒤늦게 사과하며 연정을 고백하지만, 뒤이어 전날 숲에서 산불로 사망한 펠릭스와 데비트의 소식이 전해지며 나디아는 슬픔에 젖어 떠나버린다.
60일은 경과해야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듯한 격정과 분란을 압축한 6일. 이 얄궂은 숫자는 천지창조를 암시하는 페촐트식의 불경한 주문일지도 모른다(그리고 7일째, 레온은 아무도 없이 혼자가 되어 그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 엿새는 하루하루를 곰곰이 따져보지 않고서야 곧바로 알기 어렵다. 날짜의 오고감을 정확히 인지하기 어려운 영화적 특성 탓도 있지만, 레온이 그 모든 밤에 제대로 된 잠을 잔 적 없어 제대로 된 ‘끊김’이 없었고, 또 앞서 말했듯 그가 자꾸만 남들의 시간으로부터 유리되어 혼자만의 지연을 겪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온이 혼자 있을 때, 자꾸만 어떤 시간의 단절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는 같은 구도로 담은 인물인데 갑자기 인물만 시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움직여 있다. 전환’되는’ 중간 과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이미 전환이 ‘완료된’ 인물의 자세나 표정을 담은 이 점프컷은 매우 여러 번 삽입되어 ‘공간의 주인(공)을 내버려두고’ 혼자 멀리 달려나가버린 (남들의) 시간을 은유한다.
처음은 레온이 고장난 차에서 내릴 때였다. 다음 점프컷은 남녀가 희락을 나누는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친 레온이 이튿날 아침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발생한다. 그다음엔 펠릭스가 나간 사이 나디아의 큰 방을 구경하고 음반을 듣다가 갑자기 시간이 흐름을 보여주듯 레온만 자세가 바뀐다. 이 음반 씬이 가장 기묘한데, 연주곡은 본래 점유했던 시점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끊기지 않고 나오는 중이지만 인물만 시간과 시간 사이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레온이 펠릭스를 따라 처음 가본 해변에서 갑자기 낮잠에 들었을 때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의 컷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엔 헬무트의 병동을 나와 바다에서 나디아와 언쟁을 하곤 인상을 쓰고 앞을 보던 레온이, 돌연 자기 행동에 후회를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듯한 모션이 끼어든다. “요즘 자꾸 이래요”란 민망한 해명처럼 자꾸만 넋을 놓는 레온. 관객인 우리나 영화 속 타인들은 모르지만 레온에게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가정하는 것. 시간의 가장 단순한 지표인 낮과 밤이나, 그 경계인 잠마저 무시할 만큼 강렬하게 눈길을 끄는 시간의 점프는 레온이 얼마나 남들의 시간으로부터 유리되어 홀로 선 존재인지를 조금 잔인하게 시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펠릭스는 천성이 다정하고 활발한 사람으로, 레온을 일면 걱정하고 일면 질려하면서도 그를 그 자신의 내면 바깥으로 이끌기 위해 끊임없이 초대한다. 부모님 소유의 발트해 별장으로, 아름다운 바다로, 작은 방 지붕으로, 레온의 ‘일’ 바깥으로, 또 바다로. 펠릭스는 한 번도 화답을 듣지 못한다. 상처받고 지친 그는 끝내는 새로이 집중할 대상 - 연인 -을 찾으면서 레온에게 아무것도 권하지 않기를 택한다. 그와 레온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다운 대화는 사실상 둘째날 장을 보러 다녀오던 길에 그쳐버렸다는 것이 가슴 아픈 점이다.
나디아와 데비트도 마찬가지로 다정한 환대의 흐름 속으로 레온을 초대하려 애쓴다. 맛있는 굴라쉬와 와인, 데비트가 풀어놓는 실없는 이야기(슬라브계 여자와 게이 낙인에 대한 것이기에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떠올리면 거의 우화에 가까웠던), 나디아의 상냥한 재청도 레온을 움직이지 못한다. 어쨌든 경계를 누그러뜨리려는 노력만큼은 알아줄 법도 한데 레온은 이 모든 것을 짜증나고 배려 없는 사람들 - 그의 기준에서는, ‘대중’ -의 정수 essence로 여기고 애써 내려다본다. ‘청소 아줌마’와 ‘아이스크림 판매원’이 자기 소설을 알아봐줄 리 없다 생각하고 ‘안전요원’을 무시하고 싶어하며 우베 욘존을 ‘우베 존슨’이라고 발음한 호텔 매니저를 비웃는 그의 자기방어적 우월의식이 환대에 응하고 싶은 아주 작은 마음을 이겼으리라.
혹은 우월감의 쌍둥이인 열등감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레온은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주로 쓰는 미형의 인물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남자 주인공이다. 특히 각 2편 이상 기용된 남성 배우 프란츠 로고스키, 로날드 제르펠트의 계보를 생각하면 더더욱 발탁 이면의 의도가 궁금해지는 상황. 누가 봐도 배 나오고 등 굽은 작가 체형인 레온은 절대 상의를 벗지 않고 그 더운 날씨에 오히려 몇 겹으로 꽁꽁 자신을 감싸면서, 집에서나 바다에서나 쉬이 탈의하고 그리스 조각상 같은 몸을 내보이는 펠릭스나 데비트와 완전한 대비를 이룬다. ‘내보일 것 없는’ 자기 자신의 외피에 대한 보호본능은 역으로 공격성을 띠게 한다. 데비트와 나디아가 사귀는 사이라 오해해 완전히 질투에 눈이 멀어 엄한 데비트를 비방한 것처럼.
게다가 그는 자기의 글쟁이로서의 실력이, 혹은 그 직업 자체가 실은 형편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내심 갖고 있다. “왜 항상 ‘일’ 얘기만 해? 지붕 고치는 것도 일이야. 차 수리, 요리, 설거지… 그것도 다 일이야.”라는 펠릭스의 진지한 항의에 레온은 갑자기 발작하듯 “그럼 글 쓰는 건 일이 아니란 거야? 그건 뭣도 아니란 거야?(Is it for weaklings or something like bullshit?)”라며 폭발한다. 심지어 펠릭스는 이 비약과 분노가 익숙한 듯 무시한다.
글 쓰는 일 자체의 사회문화적 효용을 스스로 의심하기 때문에, 불안감을 누르려 ‘예술인의 고결함을 알아채지 못하는 대중’을 설정해 제멋대로 폄하하고 그들이 시간을 하릴없이 죽인다며 생활양식 일체를 혐오하는 것. 레온이 택한 자기방어의 방법은 매우 오래된 엘리트식 위악이다.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가 보다 상냥히 그려낸 같은 주제, 즉 예술과 생활, 식자와 대중의 (늘 어느 정도 허구인) 갈등이 레온에게 가닿을 때, 그는 이 경합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숙고 대신 그저 자신의 ‘더 나음’을 믿고 밀어붙이는 자기중심적 해결책을 택한 사람인 것이다. 레온과 같은 문학도이면서도 세상에 상냥히 손 내밀고 재차 묻고 끝내 거절을 안타까워하는 이로 그려진 나디아와의 대비가 뚜렷해질 때마다 레온의 부박한 성정은 더더욱 가치 없어진다.
첨언하자면 영락없이 좋은 어른으로 보였던 헬무트 역시 레온과 어느 정도 죽이 맞는 사람이었음을 에필로그 즈음에 확인할 수 있다. 어느 요양 시설 넓은 방에 머무는 그가 한 신진 작가를 일컬어 ‘젊은 아이슬란드인’이라며 사실상 불필요한 정보인 국적을 무의식 중에 강조하거나, 자신을 돌보러 오는 의료인의 말투를 우스꽝스럽게 따라하며 농담하는 장면은 레온이 나디아를 직접 만나기 전 그를 계속 ‘러시아 여자’라고 부르거나 소설 얘기를 하는 나디아의 말투를 따라하는 심술 가득한 버릇과 겹쳐 보인다. 그들은 결국 한때나마 ‘닮은’ 인간이었던 것이다(비록 헬무트가 병과 나디아의 친절로 인해 감화되어 온화해졌다 생각하더라도). ‘우베 존슨’에 관한 유선상의 농담이 헬무트에겐 통할 거라고 생각한 레온의 기대도 마찬가지 맥락일 테다.
그렇다면 헬무트가 겨우 책 한 권 낸 신인 작가를 위해 발트해 시골 별장까지 직접 행차하는 정성이나, 악수할 손을 내민 헬무트에게 드물게도 먼저 다가가 포옹하려 드는 레온의 반가운 반응도 이해는 된다. 이렇게 고급 문학의 기름진 토양에 먼저 뿌리내리고 자신을 가르칠 수도 성공시킬 수도 있는 권위자 지식인의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귀하고 어려웠겠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더해 한정된 시간에 대한 초조함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듯 레온은 심리적으로 일에 붙들린 사람이다. 그에게 ‘지금, 여기’의 최우선 과제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발트해에서 여름휴가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집필 중인 소설의 마감이다. ‘일이 허락하지 않아요’란 피동형 표현은 그가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레온은 자신의 시간을 자유로이 쓰는 펠릭스, 나디아, 데비트와 달리 자기 시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그의 시간은 그를 쫓고 그를 주인/주체의 자리에서 몰아낸다.
그 이질성, 존재론적 불안, 수치심과 열등감, 쫓긴다는 감각이 레온을 극도로 괴롭히기에 그는 ‘혼자가 편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두꺼운 외피 - 옷, 집의 창문, 그리고 탈 것 -에 가둔다. 그래야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옷(탈의)이라는 장치뿐 아니라 창문이란 매개 역시 중요한데, 잠시 김예솔비 평론가의 22년 씨네21 이론비평 우수상 ‘창문과 풍경의 어긋남이 말해주는 것’을 인용하자면, “창문은 외부의 세계와 이어지는 통로”다. “세계의 일부로서의 풍경이 창문에 있고, 우리는 풍경 너머에 있는 세계의 전체를 짐작한다.” <어파이어>는 페촐트 영화 중 이 창문의 투사성을 가장 열심히 활용하는 작품이다. 나디아와의 첫 조우에서 레온은 집 안에서 그녀를 몰래 훔쳐보고 있고, 실질적인 첫 대면에서는 바깥에서 안에 있는 나디아를 쳐다본다. 창문 바깥으로 헬무트가 쓰러질 때나 흰 재가 날릴 때나 부고를 들고 온 경찰관이 지나갈 때나, 레온은 이를 꾸준하게 모르고, 나디아는 적시에 현상을 바라본다. 아름답게 발광하는 채를 들고 공을 치는 세 남녀가 창문 밖 움직이는 그림처럼 전시될 때 레온은 숨죽이고 이 예술을 바라보지만, 닫힌 창문 너머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집/벽/창문 안의 공간(이 유비하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갇힌 레온을 바깥에서 다가와 가만히 응시하는 것은 또 한 번 나디아다.
레온이 인물 중 유일하게 탈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란 점 역시 흥미롭다. 펠릭스와 헬무트는 차를 타고 왔고 데비트는 트랙터를 끌고 왔으며 나디아는 영화 내내 자전거를 타고 화면을 누빈다. 그들의 시간이 자유로울 때, 그들과 세계 사이에는 벽이 없고,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들의 거동도 자유롭다. 세계와 자신을 나누는 높은 바운더리를 친 레온은 다른 이들처럼 세계의/서로의 경계를 마구 넘어다니지 못한다. 레온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못한다’가 적확한 진단이다. 펠릭스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시내버스 안에 실려다니는 레온에게는 기동력이 없고 그걸 탈환할 용기도 없다(“면허 없어요.” / “그냥 운전해요.” / “그럴 순 없어요.” / “오, 레온!”). 후에 나쁜 예후의 암을 고백하게 되는, 즉 남은 생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헬무트도 나디아가 모는 차 옆에 실려 병원으로 운반된다.
탈 것이 있는 자/없는 자라는 간명한 대조는 <내가 속한 나라>에서 목격된 ‘운전대를 잡은 이가 주체’라는 페촐트 식의 주장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도망다니는 정치범 부부와 그들의 사정에 희생당한 10대 딸 잔이 탄 차는 시종일관 아빠인 한스 - 모든 일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독일의 마지막 운동권 세대 가장- 가 운전하는데, 결말 즈음 그가 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을 털다 총에 맞자 엄마 클라라가 운전대를 잡는다. 이는 사실 한스가 아닌 클라라가 이 가족의 시작을 야기했고 (옛 애인인 자본가 클라우스가 아닌 운동권 학생 한스를 택한 사람, 잔을 잉태한 사람으로서) 그렇기에 한스가 아닌 클라라가 모든 일을 끝낼 수 있는/끝맺어야 하는 주체임을 암시한다. 시작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끝을 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극 중 단 한 번도 자기만의 탈 것에 태워지지 못한, 자기의 운전대를 잡지 못한 레온이 이 여름, 산불, 사랑, 죽음의 서사 전반에서 애초에 제외되어 있었던 사람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단적으로 말해 레온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더라도 펠릭스, 나디아, 데비트의 여름은 무리 없이 나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더 빠르게, 더 야릇하게, 더 다정하고 더 뜨겁게, 욕망의 삼각관계로.
그러나 다시 한번, 레온의 두꺼운 벽과 닫힌 창문의 앞뜰을 자유로이 종횡무진하는 나디아, 펠릭스, 그리고 데비트는 레온을 ‘함께’ 목격하고 경험하는 주체의 자리로 초대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같이 가요’ 그리고 ‘올라와요’.
‘Come’이란 주문의 무한 반복 속에서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서로 다른 방향의 움직임’을 주로 직조하는 자가 레온의 관심의 대상인 나디아라면, 펠릭스는 나디아가 원을 그리며 휘젓는 공간을 비교적 단순하고 효율적인 일직선 동선으로 - 집에서 바다로(수평), 바닥에서 지붕으로 (수직) - 오간다. 그의 움직임은 공처럼 통통 튀고, 말하는 방식 역시 급작스러운 단절과 도약을 함축한다. (“안 좋은 소식이 두 가지야. 혹시 저거 라자냐? 나 라자냐 좋아하는데!”) 마치 그의 탈 것이 마지막으로 마주한 막다른 길처럼.
대신 그는 레온에게 계속해서 시간을, 정확히는 시간의 한계를 일깨운다. 처음 숲 속에서 레온에게 펠릭스가 한 말은 “마을까지 10km, 마을에서부터 집까지 2km. 최소한.”이었다. 지름길을 찾은 후엔 “길어봤자” 15분 걸린다고 말했고, 마트에서 돌아올 땐 불이 난 발트후트 숲이 ‘최소’ 30km 떨어져 있다고 알린다. 아스팔트를 덮는데는 ‘최대’ 2시간 걸릴 거라며 함께 하자고 간청하기도 한다. 이후 데비트와 그는 문제의 차를 견인하기 위해 출발하며 스크린 위 떠도는 마지막 육성으로 “얼마나 걸리지?” / “한 시간, 최대 한 시간 반”이라는 대화를 남긴다. 이렇게 수시로 시간의 리미트를 알리는 펠릭스는 어쩌면 정해진 이별까지 제한된 시간만이 남았다는, 그리스 예언 같은 비극적 생을 처음부터 암시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레온은 의도됐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그가 통제하지 못했을 뿐인 그의 분리, 고독, 위악은 언제나 그와 함께 했다. 그는 자기와 너무 다른 타입인 펠릭스, 나디아, 데비트 셋의 조합이 유달리 자기와 궁합이 좋지 않았다고 여겼겠지만 실은 늘 세상과 멀리 떨어져 ’현재‘를 감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는 그 사실 - “두려운 건 그들이 모두 옳았다는 사실” - 을 절친했던 친구와 그 애인의 죽음 앞에서,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지식인에게 성큼 다가온 죽음 앞에서 비로소 인정하고 조금이나마 ‘바깥’으로 나아온다.
레온은 벌레 소리와 헬기 소리, 불에 타며 쩌적쩌적 갈라지는 나무나 비명 지르는 짐승들의 소리를 번갈아가며 듣지만 그 이미지는 ‘진짜’가 되기 전까지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창밖을 내다보며 헬기 소리의 진원을 확인하려 하는 레온에게 헬기가 진짜 눈앞에 보인 건 다른 이들과 다같이 지붕에 올라갔을 때뿐이다. 혼자일 땐 확인할 수 없다. 다 함께 있어야만 알 수 있다. 합일을 지향하는 환대를 필사적으로 피해온 레온에겐 쥐약 같은 명제가 아닐 수 없다. 김병규 평론가의 문장대로 페촐트가 즐겨 그리는 “눈과 귀가 일으키는 오작동에 붙들린 주체들”이 다시 한번 재연되었다면, <어파이어>는 지금, 여기, 함께라는 - 막연한 캠페인의 언어 같지만 사실 인간과 불가분한 - 키워드를 경유해 그 오작동의 역재생을 제안하려는 영화인 듯하다.
그 역逆이란 구체적으로 이런 것이다. 바라보는 자가 비어있다. 서사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 자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생과 동으로 가득 차있다. 그들은 불러들이는 자와 초대되는 자. 운전하는 자와 태워진 자. 탄 자와 타지 않은 자.
마리는 살아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운디네는 몇 번이고 죽이고 죽었다 살아돌아왔으나 나디아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있다. 그는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고 자기 입맛대로 세계를 꾸미고 싶어하는 은둔자 남성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지나쳐가고 흘러다니면서 멈춰있고자 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이전까지 여성 주체의 시선으로, 그를 탈락시킨 세계(의 힘)와의 불편한 공존 혹은 환부의 봉합과 그 실패를 그리는 데에 주력했던 페촐트는 이제 스스로 주인되지 못한 남성 인물의 시선을 제시하고 그가 바라보는 여성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실험까지 나아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