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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May 06. 2024

귀먹고 눈멀고 입다문 여자들

2024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1)



<예쁜 영화는 아니야>

마사 쿨리지, 1976

할리우드 전설적인 제작자 마사 쿨리지의 첫 장편 데뷔작. 페이크 다큐, 오토 픽션, 액자식 구성 기법을 차용한 메타 영화를 경유해 마사 쿨리지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실제로 당했던 강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속 마사를 연기하는 배우 미셸 역시 기숙사 시절 강간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오프닝부터 밝혀진다.

마사의 기숙사 룸메이트 앤은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데, 미셸과 앤-마사의 나이 차이가 10살 이상 나기 때문에 미셸과 앤 둘이 고등학생으로 함께 있는 영화 속 영화 장면은 보는 즉시 이질감을 준다. 미셸과 4년 이상 알고 지낸 (어쩌면 애인으로 보이기도 하는) 남자 배우 짐이 마사를 강간한 21살 유급생 컬리를 연기하는데, 짐과 미셸의 인터뷰 다이얼로그가 영화 속 영화 촬영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그야말로 오토픽션의 모범 같은 흥미로운 작품일 뿐만 아니라, 비동의 강간죄 논의가 시작되기 한참 전 이미 그 의미와 필요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던 당사자 여성들의 생생한 발화 - 눈빛의 아카이브라는 점에서 더 의미 있다.

‘비동의 강간죄 논의가 시작되기 한참 전 이미 그 의미와 필요를 이해하고 있던’… 이 서술은 근본적으로 틀려먹었다. 현상 이전에 이해가 신기하게 선행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와 필요와 절규가 있었기에 그 논의가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속 영화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 마사, 미셸, 짐 각자의 섹스와 폭력에 대한 경험과 해석에 따라 매 컷 촬영마다 판본이 달라지는 - 강간을 볼 때마다 그 선후관계를 즉각 이해한다. 그들의 피해 경험에 대한 나의 이해에는 부수적인 설득이나 차근차근 주어지는 합리적 이입의 여지가 필요하지 않다. 나는 <이제야 언니에게>와 <김지은입니다>와 바네사 스프링고라의 <동의>와 학내 성폭행 사건 르포 <미줄라>를 읽을 때처럼, 에메랄드 펜넬의 <프라미싱 영 우먼>을 볼 때처럼 아무 설명 없이도 그 피해가 어떤 것인지 보는 순간 이해하고 만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 앉았던 이름 모를 여자가 나와 똑같은 순간에 조용히 한숨을 쉬고 나처럼 제 살을 꼬집고 물어가며 버티고 있음을 감지하고, 그 역시 이 영화를 나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안다. 살인보다 더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안 되고 끔찍한 수준의 인격 살해가 바로 강간이며, 반드시 구타와 위협에 준하는 명시적 폭력이 반드시 있어야만 강간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슬픈 안도감.

그런데 오늘 만석이었던 영화관에서 못해도 1/3은 채웠던 남자들, 끝나고는 어리둥절하거나 참담한 얼굴로 황급히 관을 빠져나간 남자들, 이 영화의 ‘형식적 실험’이나 ‘교란적인 문제의식’ 따위만을 점잖게 논할 수 있는 남자들은 과연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너희가 어떻게 감히 다 이해할까?


영화 속 감독 마사와(40년대 후반 출생) 마사를 연기한 미셸(70년대에 대학을 다닌 것으로 추정되는) 사이에는 어림잡아 10년 정도 되는 간극 즉 세대차가 있다. 그리고 마사는 자기 이야기를 원본 100% 정확도로 구현하기보단 배우들의 경험을 덧대어 계속 새로운 구간을 재창조하는 과정을 선호하는 듯하다. 마사 쿨리지에게 이 촬영의 전과정은 촬영이라기보단 오히려 사고 실험이나 재연에 가까운 치료다. 이 세 가지를 전제한 그 실험적/치료적 촬영 현장에서 미셸과 마사 각각의 강간 피해 경험에 대한 해석은 종종 어긋난다. 마사는 컬리가 자신을 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느꼈고, 미셸은 자기 사건의 강간범이 ‘무엇을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를 ‘동정’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더 저항했다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약간씩 다른 경험과 해석에서 자기 것과 동일한 위계의 폭력성, 폭력의 과시성, 남성 호모소셜 내의 고질적 서열놀이와 그 수단으로서의 (‘당연히 해야만 했다’고 짐이 천명한) 섹스에 비자발적으로 동원당한 희생양의 분노와 억울함, 그 순간 자기들의 영혼이 실시간으로 파괴되고 있었다는 비극적 징후를 발견하고 이해한다. 동질감을 아득히 넘어서는 일체감이 생기고 만다. 그렇기에 이들의 눈빛 교류만큼이나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남배우 짐의 여러 반응 또한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마사와 미셸 - 그리고 촬영장에 있던 전원 여성인 스탭들 - 이 별도의 ‘설득되려는’ 노력이나 열린 마음 없이 서로에게 즉각 다가가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짐을 위시한 남성 배우/스탭들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단계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강간 재현에 들어서자 짐은 처음에는 “내 친구들을 연기하게 되는 꼴이라 난감하다”고 둘러간다. ‘사춘기 섹스’를 하던 남자애들은 여자가 거부 의사를 밝혀도 어떻게든 밀어붙여서 하기 마련인데, 그랬던 남자애들이 다 이상한 변태여서는 아니었고 “오히려 걔들은 다 평범한 애들”이었다고. 물론 우리는 이 주장의 진위를 의심하고 짐이 그 ‘친구들’ 무리에 속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고 반쯤 확신한다. 짐은 계속 이야기하다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게 (상대가 동의하지 않았지만, 너도 곧 즐기고 동의하게 될 거라면서 일단 ‘자빠뜨린’ 것이) 다 강간이었던 것 같다”고 얼떨결에 혼자 진실에 도달한다.

짐은 다음 씬을 촬영할 때 다시 유보적인 태도로 “어른 남자 입장에서 사춘기 섹스는 지루하고 우습다. 해봤다는 사실만이 중요해서 성적 흥분이나 쾌감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배역에 너무 집중하자 돌연 “(미셸-마사가) 계속 거부하면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놀라운 고백을 하기도 하는데, 강간의 목적이 성적 쾌감이 아닌 굴복시키는데에 있다는 진실을, ‘평범한’ 남자들이 얼마나 쉽게 거기에 공명할 수 있는지를 (역시나 얼떨결에) 증명해버린 셈이다. 또 짐이 학창 시절 이야기를 풀며 “매력 없는데 섹스를 해본 여자애들을 ‘돼지’라고 불렀다. 돼지의 리스트를 만들었고 걔네랑 하는 걸 목표로 했다”는 대목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마사와 미셸의 눈빛… 끔찍하지만 웃긴 순간들.

마사와 미셸이 아마 바로 그 돼지였을 것이다. 승은 입은 창녀. 주제 모르는 걸레. 고마워할 줄 모르는 공공재, 못생긴 인형, 줘도 안 먹는 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 덫에 걸려, 인생의 가장 빨리 변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같은 자리에 매인 채 허비했을까.



직접적인 강간이 재연되는 컷마다 입을 틀어막고 고요히 버티던 마사는 끝내 이겨낸다. 강간당하는 순간을 끝없이 연기하던 미셸을 관찰하다가 “포기와 체념 단계로 들어섰으니, 이제 ‘그 선’에 도달했고 더는 안 찍어도 된다”며 담담히 통보한다. 이 여자는 결국 자기 상흔보다 큰 존재가 된다. 미셸도 그랬기를 바란다. 또 마사를 조롱하고 소문을 퍼트렸던 번과 신디 같은 여자들이, 언젠가 같은 일을 당해서 마사를 이해하기보단 차라리 계속 해맑을 수 있기를 바라고 아마 마사도 그것을 바랐을 것이다. 내게 일어났던 일이 네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를 이 복기를 십수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나눠보면서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있기를. 그 소망이 이미 파괴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최후의 고결함이란 사실까지도.




<플라멩코의 여왕, 싱글라>

팔로마 사파타, 2023

1940년대 바르셀로나의 철길과 바다 사이 판자촌 Somorrostro에서 집시 출신으로 태어나 며칠 만에 뇌수막염으로 청각을 잃고, 1965년 16-17세에 플라멩코 댄서로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지만, 30세에 완전히 잠적한 안토니아 ‘라 싱글라’에 대한 다큐멘터리.

싱글라는 전설적인 댄서 카르멘 아마야(역시 같은 마을의 집시 가족 출신)와 교류했고, 카르멘 ‘왕’의 후계자 ‘괴물’로 호명되기도 했다. 살바도르 달리, 후안 미로를 위시한 당대의 괴짜 예술가 집단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고 그중 일부는 싱글라만을 위한 곡을 쓰거나 그림을 헌정하기도 했다. 싱글라의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와 육남매를 버리고 프랑스로 떠났던 아버지가 돈 냄새를 맡고 돌아오면서 싱글라는 엄격한 통제 하에 놓이게 되고, 우울증과 신경성 질병이 찾아오며 댄서로서의 인생도 불행을 맞는다.


영화 보는 내내 싱글라의 자취를 추적하는 옐레나가 감독 본인인 줄 알았다. 때문에 화자 자신의 내면 묘사나 춤을 배우는 장면들의 분량을 덜고, 동어 반복하듯 이어지는 씬도 좀 덜고 안토니아 싱글라의 사실적 인생에 더 집중해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아버지가 대신 맺은 종신계약이나 아버지와의 비공식적 노예 계약에서 어떻게 벗어난 건지도 궁금했고, 스페인만큼이나 독일에서 플라멩코 아이돌이 된 과정, 아버지에게서 벗어난 이후 2년간 불태웠다는 싱글라의 진짜 꿈 - 재즈 플라멩코 - 시절에 관해서도 더 알고 싶었다. 무엇보다 싱글라가 춤추는 옛날 푸티지를 더 많이 보고 싶었는데…

엔딩 크레딧에 도달해서야 팔로마 자파타 감독이 다른 배우를 기용해 옐레나라는 페르소나적 가상 인물을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일면식 없는 젊은 감독이 이토록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싱글라를 왜 친구였던 기획사 사장 바기네스와 사진가 콜리타가 그 긴 세월 동안 찾지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어쩌면 과거의 상처를 돌아보기 싫은 안토니아의 의지를 존중해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바기네스와 콜리타 그리고 화가들이 이어준, 입이 떡 벌어지게 화려한 싱글라의 친구들 목록은 그 자신에겐 별로 영광의 흔적 같은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이 진정으로 교류하기에는 싱글라는 너무 어렸고 힘이 없었고 또, 듣지 못했으니까. 그건 우정이 아니라 신비로운 집시 뮤즈 - 에스메랄다 -를 향한 총애에 더 가까웠을지도.

옐레나가 처음 만난 (척한) 이미 섭외된 사람들, 부자연스러운 연출,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맺어진 결론은 다 ‘안토니아’ 싱글라를 지키기 위함이었을까.

전설이 될수도 있었던 젊은 여자의 눈빛과 춤이 길게 잔상으로 남는다. 10대 때 댄서들의 경연 프로그램이나 유튜브를 보며 처음으로 느꼈던 흥분감이 되살아온다. 누군가 말했듯이 ‘우린 죽어가는데 저 이는 삶을 사는구나’ 싶은 몸짓과 진동. ‘분노를 통해 춤춘다’는 명확한 언어까지.

어떤 사람들은 상처가 클수록 파고들고 낱낱이 해부해서 가루로 흩어버리지만, 다른 사람들은 기어이 묻고 썩혀 잊는 데에 성공하기도 한다. 누가 더 강하거나 더 나은 것이 아니다. 이기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뒤바뀐 신부들>

키란 라오, 2023

Synopsis ::
인도의 국민 배우이자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아미르 칸이 제작하여 화제를 모은 <뒤바뀐 신부들>은 2001년, 인도의 시골 어딘가를 배경으로 한 유쾌한 가족 코미디이다. 자야와 풀, 두 여인은 신부가 된 날 밤, 빨간 결혼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남편을 따라 같은 기차에 몸을 싣고 각자의 시댁으로 향한다. 풀의 남편 디팍은 한밤중의 혼잡한 기차에서 실수로 자야를 깨워 자신의 마을로 데려가지만, 집에 도착해서야 실수를 알게 되고, 반대로 자야의 남편은 풀과 기차에서 내리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풀을 기차역에 버려둔 채 사라진다.
이제 두 여인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나야 한다. 좌충우돌 신부를 찾아 나서는 디팍과 덩달아 애가 타는 그의 가족을 오히려 위로하는, 자아실현을 위해 나아가려는 지혜로운 현대 인도 여성의 모습인 자야와, 수줍은 성격이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풀의 성격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아미르 칸의 꾸준한 여성 인권 영화 제작으로 입소문을 타긴 했지만, 아미르 칸의 전 배우자로 당갈을 공동 제작하기도 한 키란 라오 감독의 역량이 무엇보다 빛을 발했다. 전형적인 뭄바이 발리우드 영화답게 구조는 단순하지만, 적절한 끊어치기에 강약 조절로 맛깔나게 말아주는 여성들의 우정 너무 아름답다. 각자 이별을 맞을 때 인물들은 성숙하게 다음 페이즈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데 나만 그 장면에 남아서 그저 오열… 만주 마이와 풀, 푸남과 자야 꼭 연락하고 지내길..ㅜㅜ

자야와 푸남, 자야와 디팍, 자야와 군잔, 자야와 경찰 시암까지, 너무 똑똑하고 영리하고 기민한 자야가 자기 지성과 진심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쌓아가는 다양한 우정들이 참 뻔하지만 좋았다. 역시 사랑 위에 우정 있고 가족애 위에 우애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긴다.

바뀐 남편의 어머니에게도 연근볶음이 맛있다고 칭찬해주고 그이는 자기 어머니의 레시피였다 말하면서 자야 덕에 생애 처음으로 남편과 아들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메뉴를 요리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부분이 참 그리고 이어지는 시어머니-시할머니의 대화까지.

- 어머니,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 해보자.

그리고 아픈 손가락 풀. 자야보다 훨씬 어리고, 더 가난한 시골 마을 출신이라 고등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풀의 선택이 결국 제 남편 디팍(착하기라도 해서 다행..)을 계속 사랑하기로 귀결된단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 적당히 모든 성별 관객에게 흐뭇한 가족 영화로 소구되고 투자도 잘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뒤바뀐 두 신부가 다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건, 하루 아침에 살아오던 방식을 그렇게까지 많이 바꿀 수 없다는 건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해하기에 이제는 별로 아쉽지는 않다.

어쨌든 풀은 만주 마이와 쵸투를 만났고, 그애가 여자도 자기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 마음에 안 드는 남자는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데서 위안을 찾는다. 남편을 하늘같이 여겨서 이름도 함부로 못 부르던 애가 혼자 기차도 타고 (1차오열) 디팍을 크게 부르며 전력질주할 때 (2차오열)… 만주 마이는 덜렁대고 다정하고 물정 모르는 손녀뻘의 그애가 얼마나 걱정되고 기특했을까.

너 기만이 뭔지 아니? 여자들은 요리도 하고 밭일도 하고 애도 낳고 기를 수 있지.
여자들에겐 남자가 필요없어. 사실상 모든 걸 다 할 줄 알거든.
그 사실을 온 세상 모든 여자가 알게 되면 큰일 나니까 숨기는 거야.


OST까지 완벽하고, 할리우드 + 그 영향 받은 상당수의 발리우드 영화처럼 노란 흙칠 안해둔 예쁜 톤의 인도 지역을 보여줘서 더 좋았다. 추석 특선 가족영화로도 손색이 없다.

자야 역의 프라티바 란타 Pratibha Rantta, 풀 역의 니탄시 고엘 Nitanshi Goel, 디푸 역의 스파쉬 스리바스타브 Sparsh Srivastav, 경관님 역의 라비 키샨 Ravi Kishan 배우들 다 기억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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