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May 13. 2024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진보

2024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2)



<헨리 폰다를 대통령으로>

알렉산더 호르와스, 2024


드물게 지적인 영화들이 있다. 풍부하게 부어주는 텍스트를 정신 없이 읽는 것만으로 충만해지고, 책 한 권 읽고 신난 사람처럼 우매함의 봉우리에 단번에 오를 수 있게 해주는 영화들. 유려한 지성과 감출 수 없는 덕력으로 쓴 3시간짜리 완벽한 논문 같은 <헨리 폰다를 대통령으로>가 바로 그런 영화다. 어린 시절 히치콕의 <오인>을 본 이래로 헨리 폰다에게 푹 빠졌던 씨네-팬 알렉산더 호르와스 감독의 헨리 폰다 배우론이자, 외부(독일)인 입장에서 고전 명배우를 매개로 미국의 이주, 노동과 영화 산업, 정치, 그리고 ‘미국적’ 정신에 대해 인류학자의 정신으로 탐구하는 민족지다.


헨리의 ‘폰다’라는 성은 네덜란드계 시조들로부터 이어진다. 17세기 말 헤스터르 폰다와 그의 남편, 세 자식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이주하고 100년 후 그녀의 증손자 다우 폰다는 선주민 인디언들과의 전쟁에서 머리가죽이 벗겨져 죽는다. 다시 100년 후 다우 폰다의 후손 텐 에이크 폰다가 네브라스카 오마하로 이주하고, 그의 손자 헨리 폰다가 1905년 그곳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중서부 남자’로 성장한다. 과묵함, 완벽주의, 내향성, 그리고 좌절의 분노로 인한 욱하는 성질을 모두 갖춘 그런 남자.

헨리는 그의 세번째 부인이 표현한 대로 “American Gothic”의 현신 같은 남자였지만 이주민의 혈통을 타고난 남자기도 했다. <모호크족의 북소리>에서 선조 폰다를 모델로 한 성실한 개척자 길버트를, <황야의 결투>에서 ‘나쁜 인디언’을 소탕하는 양아치 보안관 와이엇 어프를,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충격적으로 사악한 총잡이 프랭크를 연기한 그의 모순적 양면성은 여기저기서 두드러진다.

전생애를 통틀어 헨리 폰다는 언제나 유명세에서 도망가고 싶어하는 유명인이었다. 그는 무명의 도망자(<분노의 포도> 톰 조드)에서 무명인들의 대통령(<젊은 링컨> 에이브 링컨)으로 나아가는 자, 현실주의자이나 유령에게 말 거는 자, 어두운 감옥에 갇혀있으나 빛을 두려워하는 자다. 그렇기에 그는 구원자이자 가해자로서의 미국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였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러나 감독이 말했듯 “명암법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 사이의 공간을 연구할 기회”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주는 필연적으로 (원주민의 영토로의 침범을 의미하는) 확장과 (수목, 비버 가죽, 은, 기름 따위 자원의) 적출을 동반한다. 백인 침략자가 황야를 개척하며 정착과 승리의 달콤한 역사를 쓸 때 선주민 사회에서는 죽음의 행진, 유격전, 장기 동화, 그리고 결국 대학살이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헨리 폰다의 화려한 필모그래피 중 <퍼스트 카우>, <고스트 스토리>, <퍼스트 리폼드>를 연상시키는 여러 씬을 차용하고 재연하며 감독은 이렇게 표현한다.

역사는 끊임없이 각광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재연이 경의를 표하는 것은 아니다.때로는 아주 성공적으로 억눌렀던 것들이 좀비로 돌아오기도 한다.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에서 드 니로가 연기한 택시 드라이버 - 이미 그 자체로 ‘미국적인’ 무명인들의 상징 - 가 모호크 족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한 것이 이 ‘좀비’의 일종이라고 해석한다.


에머슨, 소로와 같은 ‘초월 클럽’의 창시자였고 그들 중 가장 급진적인 학자였던 마거릿 풀러(그가 난파 사고로 사망한 후, 뉴욕 트리뷴 유럽 특파원 역할을 승계한 것이 바로 칼 마르크스였다)는 위와 같은 ‘미국적’ 행적을 관대하게 봐주지 않았다. 미국은 ‘진보’를 끊임없이 지향하고 차근차근 이뤄왔다. 하지만 미국의 아버지들이 약속한 정직한 헌신과 근면한 노동의 가치는 이미 돈에 팔려나간지 오래고, 정치적 지도자들은 인민을 속이고 있을 뿐이라고 강렬한 비난의 저술을 남긴 풀러에게 그것은 혐오스럽고 부정하고 싶은 ‘진보’였다.

그들이 종교와 총포로 침략의 첫 발걸음을 뗄 때, Saint Kateri - 환경과 망명자의 수호 성인으로 추대된 이로쿼이족 소녀 테카퀴타 - 와 같은 선주민들이 무수히 죽어나갔음을 영화는 잊지 않고 호명한다. 재생산권을 쥔 여자들이 정치적 결정권까지 모조리 점유한 모계 사회의 대표였던 이로쿼이족의 정신은 이제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그들의 일부는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며 첫 유색인종-여성 지도자를 뽑는 정신적 개종을 이루기도 하지만, 과거의 영광스러운 자취는 숲속에서, 박물관에서, 그리고 몇 세기 지나 방영될 시트콤 <모드>의 ‘헨리 포드를 대통령으로’ 에피소드에서만 흐릿하게 발견된다.


물론 다우 폰다와 같은 참혹한 죽음을 맞은 백인들도 여럿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유관하지 않은 ‘모국’의 이기적인 정치적 결정으로 인해 진작 끝났어야 할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죽은, ‘모든 진영의 혁명 희생자’에 대해 <모호크족의 북소리>처럼 애잔한 인류애를 견지하는 영화도 많다. 하지만 <분노의 포도>의 케이시가 말했듯 “개인의 양심은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물, 모든 인간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헨리 폰다도 알렉산더 하워스도 따르는 듯하다. ‘무구한 개척자’의 원죄란 결국 그들 조상의 모국의 원죄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짓을 그들도 했다.

그리고 범죄자로 몰려 전기의자에서 무고하게 처형된 노동계급의 반제티를 기리는 <사코, 반제티>에서도 동일한 신념이 반복된다. 훗날 폰다가 이 출연작을 두고 “편견이 판단에 영향을 끼치도록 허용하는 법 체계”를 비판하는 영화라고 표현한 것은 ‘억울한 사람과 그를 만드는 사회’를 주로 무대 삼은 그의 배우-작가로서의 신념, 풀러의 정당한 분노에 대한 동의와 무관하지 않다.


알렉산더 감독이 말했듯 “배우 폰다는 작가다. 그건 본인이 부정해도 분명하다. 그가 좋아하는 이야기와 전달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 중 제작까지 맡은 유일한 영화는 <12인의 성난 사람들>로, 헨리 폰다는 만장일치를 저지하고 고집을 부려 하나씩 하나씩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배심원8로 분한다. 몹시 정치적이고 고집스레 도덕적인 이 영화를 찍을 때쯤 폰다는 이미 <분노의 포도>의 톰 조드 - 억울한 일을 당한 이민자 워킹클래스 가정의 장남 -에서 한참 멀리 벗어난 존재, 영화적 거물이 되어간 지 오래였다.

현실의 그는 아이젠하워에 대적한 후보 아들레이 스티븐슨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당선에는 실패했다), 배우로서의 그는 초창기 경력인 <젊은 링컨>에 이어 <핵전쟁 사령부>에서도 <베스트 맨>에서도 대통령 혹은 대선 후보를 여러 차례 연기(하고 역시 흥행에는 다소 실패)한다. 닉슨에 대적해 제3당의 무명 후보와 단일화하며 권력을 내려놓는 비-정치적이고 순진한 정치가를 연기한 <베스트 맨>을 찍고, 얼마 안 가 레이건을 새 대통령으로 맞이한다. 폰다는 그런 멍청이들이 자기의 대표자라니 믿을 수 없다며 공개적으로 격분한다.


하나씩 타협하고, 조금씩 부패하란 말”(베스트 맨)과 동일한 정신적 신체적 노화. 유익한 교훈이란 환상조차 품기 어려운 시대. 전쟁이 일어나고 40대 초의 헨리는 해병으로 자원입대한다.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돌아온 그는 연기 인생의 출발점인 연극 무대로 돌아가 6년간 영화 휴식기를 가진다. 다른 미국 시민과 마찬가지로 전후 시대의 자기 비판, 소외감, 의구심을 겪는다. 두 번째 이혼도 감행한다. 이쯤에서 헨리 폰다의 얼굴은 삶에 대한 피로와 고독으로 겹겹이 세운 성채와 같다.

알렉산더 하워스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세계 신기록을 세운 동독의 높이뛰기 선수 베시히 Wessig의 버릇과 헨리 폰다 특유의 연기하는 버릇을 동치한다. 그 둘은 ‘성공할 때나, 슬플 때나 눈을 가린다’. 폰다는 국민을 지키는 데에 실패한 대통령을 연기한 <핵전쟁 사령부>에서도, 생애 마지막 작품이자 딸 제인 폰다가 연출한 <황금 연못>에 늙은 아버지 역으로 출연하는 시점까지도 이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 감정이 돌출되고 진심이 들킬 것 같은 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얼굴과 눈을 반쯤 가리고 고개를 숙인다.



사적인 삶에서 헨리 폰다는 순탄한 연기 인생과 상반된 그늘만을 밟은 듯하다. 세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그는 가장 오래 (14년간) 함께 한 두번째 아내, 피터 폰다와 제인 폰다의 어머니인 프랜시스 세이무어의 조울증이 심각해지자 이혼을 요구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지 1년만에 면도날로 자살한 프랜시스와 헨리의 관계는 히치콕에 의해 <오인> (한국 개봉명 ‘누명 쓴 사나이’)의 좋은 암시적 질료로 재활용된다. 폰다는 아직 어렸던 자식들에게 엄마의 죽음에 대해 ‘병원에서 돌아가셨다’고만 말했고, 그들은 다시는 그 주제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레이디 이브>, <데이지 캐년>, <아파치 요새> 그리고 <오인>까지. 로맨스 플롯을 포함한 출연작들에서 그가 연기한 남성 인물들의 어색하고 수줍은 예의차리기, 때론 폭력을 암시하는 언동이 반복된다. 이를 두고 영화는 ‘헨리 폰다의 남성학 연구’라고 명명한다. 꽉 쥔 주먹에서 드러난 열등감, 억압된 분노, 교양과 정력의 충돌 등을 헨리 폰다가 인지하고 의식적으로 연기했다는 주장이다.

부랑아, 이주노동자, 건달, 부패한 보안관, 극악무도한 총잡이, 제대한 해군, 슬랩스틱에 특화된 어리숙한 도련님… 알렉산더 하워스는 “상위 계급의 문화, 고급스러운 향을 남성성과 조화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헨리 폰다는 조화를 포기한다. 대신 그 부조화를 예술적으로 두각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니 동업자 중 하나의 말처럼 그는 “의미를 교란하며 알지 못하는 다른 고난으로 날아가기보다 지금 가진 고난을 견디게 만드는” 힘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간계, 용기, 익살, 인내로 버텨온 배우는 노년기로 진입할수록 정치적 결정에 휘둘리는 약자가 아니라 결정권자에 가까워진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엔 그의 다음 시대가 그의 영역을 침범(확장)하고 그를 적출해낸다.

다음 세대인 자식들 제인과 피터는 명확한 구분선이 있는, 가시화된 위협적 세력이 아니라 적이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한 테크노크랏 technocrat과 싸워야 한다. 멕시칸 이주 노동자(오키)들이 우경화되고, 노동자의 이동은 다시 금지의 대상이 된다. 즉 다시 한 번 미국적 과오가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

힙스터 인디 영화 <이지 라이더>를 제작해, 모성 부재에 신음하는 폭주족 약쟁이로 직접 출연한 피터 폰다는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역할이 ‘boy next door’이면 족하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 친근한 청년은 아버지인 헨리 폰다의 얼굴로 상상되고 있다고 조용히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아버지가 아니라 20년, 40년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즉 할리우드에서도, 미국을 통틀어 보더라도 근면성실하고 진실된 ‘시민’의 다음 모습은 아직 구상되지 않았다.

제인은 보다 똑똑한 전략을 취했다. 그는 아버지와 정신적으로 반목하되 그를 배우로 기용하기도 하며 딸들의 은밀한 투쟁을 이어간다. 제인은 아버지, 피터와 동반 출연한 저녁 시간 토크쇼에서 PG&E 등의 거대 기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본격적인 정치 액티비스트가 된다. 제인은 에코페미니즘적 의제부터 시작해 모든 ‘진지한’ 주제들에 성실히 임하는데, 이 시대의 활동가란 기계와 기술 관료를 잘 알고 대항해야 하기에 싸움은 쉽지 않다. 또한 모든 의제를 가벼운 유머의 자장에 넣어 무화시키려는 쇼프로 산업의 저지에도 영리하게 빠져나갈 줄 안다.


제인의 작당은 시트콤 <모드>의 ‘헨리 폰다를 대통령으로’ 에피소드에서 대중과 영합할 수 있는 꼴로 의식화된다. 지성적이고 부유한 교외의 주부 모드는 이 시대의 다음 대통령으로 헨리 폰다 - 늙은 폰다 -를 지목하고 폰다의 동의 없이 (당연히 극중 카메오로 등장한 그는 모드의 목표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 그의 선거 본부를 자기 집 거실에 꾸민다. 실없는 농담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던 이것은 이미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맞이한 사회라는 점에서 자포자기적인 해학의 성격을 띄게 된다.

게다가 모드의 꿈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다. 알렉산더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모계 사회 이로쿼이 족의 전통처럼, 씨족을 위한 다음 지도자를 고르는 여성 발의자”를 자처한 것이다. 톰 조드에서 링컨까지, 개척 시대 총잡이에서 군 최고결정권자인 대통령까지. 가장 미국적인 주부-어머니에 의해, 가장 미국적인 아버지의 얼굴은 러쉬모어 산의 다음 석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이 모든 게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벌어진 일이라는 점까지 완벽한 미국적 코미디다.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전설>

낸시 뷔르스키, 2022

나이 든 존 보이트 (조 벅)


헨리 폰다의 '고르게' 승인받은 영화들과 달리, 1969년 X등급 개봉한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몇 장면만 덜어내면’ R등급으로 개봉할 수 있다는 심의위원회의 구슬림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는다. 당초 편집본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 선보인 존 슐레진저, 젊은 존 보이트, 젊은 더스틴 호프만의 이 작품은 제작비의 100배 수익을 벌어들이고 70년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다. 관객과 평단의 선택을 동시에 받은 후 작품은 어느샌가 R등급으로 바뀌어 있었다.


<헨리 폰다를 대통령으로>가 한 배우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논의를 보다 통사적, 거시적인 미국사로 끌어올린다면,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전설>은 타협 없는 예술가 존 슐레진저의 성적 지향이나 당시의 자유롭고 이단적인 히피-퀴어-서브컬쳐로, 60년대 말 뉴욕이라는 특정 시공간으로 초점을 좁힌다. 당시 대중매체에서 흔히 미국인들의 자부심에 최첨단의 예술/사상을 선도한 도시로 묘사되던 뉴욕을 아름답지 않게 더럽게 있는 그대로 그린 영화. 폭력적이지도 섹슈얼하지도 마초적이지도 않은 남성간의 성애적 우정이라는 미묘한 회색 지대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현대 퀴어-서브컬쳐 창작물들의 원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헨리 폰다를 대통령으로>,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전설> 두 영화 모두 1960-70년대 뉴욕의 리얼리즘적 풍경화 레퍼런스로 후배 격인 <택시 드라이버>(1976)를 호출했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건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배우들이 다리 저는 사기꾼 랏소 리조는 인간적 온정을 품게 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라고 자평하면서, <택시 드라이버>를 두고 ‘랏소가 없는 조 벅’의 이야기라고 표현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택시 드라이버>에는 유의미한 사회적 인물이 되고 싶다는 무명 남성의 욕망이 두드러지며 그것이 성착취 당하는 어린 여성을 매개로 결국 실현되고, <미드나잇 카우보이>와 같은 서정적이고 평등한 우정을 취득하는 데 실패한다. 그러니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전설>이 던진 제언 이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트래비스에게도 랏소와 같은 친구가 있었더라면?


작고한 존 슐레이저에 대해 함께 작업한 배우들과 각본가 월도 솔트의 딸이 회고하는 언어를 듣다보면 그는 판단 대신 포착하는 창작자였다고 느껴지지만, 포착과 관조가 반드시 건조하고 냉정해야 하는 건 아니란 점을 몸소 증명하기도 한 셈이다. 조 벅과 랏소 리조의 다사로운 우정, 연대, (어쩌면) 사랑에는 그만의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조나단 라슨, 토드 헤인즈, 좀 더 가볍게는 마이크 밀스,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이 승계한 ‘진짜 뉴욕’에 대한 낭만이기도 한 그것이.



매거진의 이전글 귀먹고 눈멀고 입다문 여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