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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ug 18.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지금 우리가 뭘 하는지 보라

안네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들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은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어". 이 말들은 우리에게 '모종의 영감'을 주는데, 그건 그 말들이 우리 귀에 좋게 들린다는 뜻이다. 이 말들은 살해된 소녀들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이는 걸 용납하는 우리 문명의 타락에 대해 용서받은 기분이 되게 해준다. 그리고 만약 그 말들이 살해된 소녀에게서 나왔다면, 글쎄, 그렇다면 그 말들은 틀림없이 진실일 테니 우리는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게 틀림없다. 살해된 유대인이 내려주는 그런 은총과 사면이라는 선물이야말로(정확히 기독교 사상의 핵심에 자리 잡은 선물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안네의 은신처에서, 그가 쓴 글에서, 그가 남긴 '유산'에서 너무도 간절히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죄 없는 죽은 소녀가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었다고 믿는 것이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만족스러운 일이다. 안네가 '내면이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에 관해 쓴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기 전이었다. 그 문장을 쓰고 3주 뒤, 그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들이 살아 있는 유대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여주는 사실이 여기 있다. 그 사람들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이 사실은 안네 프랑크의 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되풀이해 말할 가치가 있다. 그의 일기를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집단 학살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것이 그의 일기가 집단 학살에 관해 쓴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약 그런 작품이었다면 그 일기는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이 생생하고 자세하게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쓴 글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기록들 가운데 어떤 것도 안네의 일기가 얻은 명성 같은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 그런 무언가에 가까이 갔던 기록들은 오직 은폐라는 똑같은 규칙, 자신을 박해한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예의 바른 피해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규칙을 준수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었다.

이디시어판은 <나이트>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자들에 대한 그리고 제목이 암시하듯 무관심으로(혹은 적극적인 혐오로) 그런 살해를 가능하게 했던 세상 전체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위젤은 후에 프랑스인이자 가톨릭 신자이며 노벨 상 수상자였던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도움을 받아 '나이트 La Nuit’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프랑스어판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젊은 생존자의 분노를 신학적 고뇌로 전환한 작품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속한 사회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떤 독자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신을 비난하는 것이 낫다. 이런 접근법은 위젤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에 이 책이 미국이 베푸는 호의의 전형인 오프라 북클럽 선정작이 되게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접근법도 일본의 십 대 소녀들이 안네의 일기를 읽었듯 이 책을 읽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려면 위젠은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은폐해야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주의: 참사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음.

현시점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기엔 너무 참여-미디어 아트의 영역으로 나아가 버린 것도 같다. 대부분의 글로벌 관객들에겐 영화보다도 먼저 사회적 책무를 인지하고 유의하는 행동주의 예술가의 수상 소감 영상이 전해져왔다.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오스카에서 유대계 정체성(Jewishness)과 홀로코스트를 또다른 전쟁/학살을 위해 오용하지 말 것을 촉구한 후, 곧장 전세계 시오니스트의 돌을 맞는다. 그 자신 역시 유대계이면서 이스라엘-가자 전쟁에 정면으로 반대한 그가 손을 덜덜 떨며 준비해온 ‘선언’을 수행할 때 우리는 일종의 경외를 느낀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가 선 곳에 가장 먼저 균열을 내며 우리 인간의 자격을 되묻는 모습. 그렇듯 순교를 불사한 지성인의 결기는 어떤 이에게나 강렬한 전율로 다가오니까.

한편 미디어 아트로서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흥미로운데, 우선 이 영화가 전시하는 풍광은 오프닝부터 경박하리만큼 경쾌하고 그늘 없다. 르누아르의 사랑 넘치는 가족 연작을 떠올리게 할 만큼 밝은 햇볕 속, 떼죽음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며 안전한 부귀를 누리는 가족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건전한 수용소 미관 조성’을 위해 라일락 관목을 꺾지 말라고 엄숙하게 공지 방송을 하고, 아이들은 곧 도살될 유대인들처럼 아버지 루돌프의 눈을 가리고 그를 정원으로 데려가 깜짝 생일 파티를 선물한다. 어머니 헤트비히가 정성껏 돌보는 아름다운 정원과 윤기 나는 검은 개와 건강한 5남매까지, 완벽한 소품을 둔 듯 잘 가꿔진 이 삶이 평범할수록 도리어 벽 너머의 - 어쩌면 이미 삶이 아닐 - 삶(들)에 대한 암시가 숨을 죄여온다.

헤트비히를 포함한 장병 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잔머리 하나는 대단한’ 유대계 희생자들을 비웃고, 그들로부터 갈취한 밍크 코트와 보석들을 두르고 힘을 과시하지만 이 과시는 절대 노골적이거나 공개적이지 않다. 다른 부인의 거대한 코트를 두고 다른 여자들과 “여제 같다”며 부러워하고 비꼬았던 헤트비히는 강아지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은 문 안에서 제게 떨어진 코트를 몰래 입어보며 만족해한다. 그러나 값비싸고 보드라운 코트는 헤트비히가 평소에 입던 평범한 원피스에 비해 너무나 어울리지 않고 어딘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또 헤트비히는 코트 주머니 안에서 나온 립스틱 - 그러니까 이것이 원래는 살아 있었던 누군가의 소유임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끔찍한 소품 -을 발라봤다가 이내 쓱쓱 문질러 지워버린다.

이 은근함, 이 비밀스러움은 회스 부부를 포함한 독일인 전범 가족들이 그 시점 도달한 삶이 절대 처음부터 그들 소유가 아니었단 사실을 제시한다. 그들이 부유했었고 똑똑했던 유대인들을 멸시하거나, 장모가 과거의 유대인 고용주를 떠올리고 “그 여자도 지금 저기 있으려나?” 상상하며 어딘지 고소해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이전에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갖고 있었던 이들에 대한 질시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상위 계층을 ‘몰아냄’으로써 계급 이동에 성공한 하위 계층의 승리감, 도취감 내지는 자족과 뿌듯함이 이들의 얼굴에 부드럽게 퍼져있는 것이다.



“그이는 저보고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래요”라며 수줍은 듯 의기양양한 듯 말하는 헤트비히, ‘불합리한’ 전출에 항의하다가 결국 “이런 ‘희생’을 감수하는 게 삶이란다”라고 애마에게 말하는 루돌프. 우습고 불쾌한 기분이 정점을 찍는 것은 부부가 강가에 서서 발령 소식에 대해 논의하는 씬에서다.

난 죽어도 여기 안 떠나.
우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온 삶이잖아.
총통도 그렇게 연설하셨잖아.
동쪽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찾으라고.”


즉 헤트비히와 루돌프는 “그동안 꿈꿔왔던 삶”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여왔으며 그 삶을 ‘부당하게’ 뺏기지 않기 위해 더한 노력도 불사할 거란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 노력이란 건 물론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탈취하고 강간하는 일에 일조하거나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고”의 반복을 직접 설계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돌프의 ‘일’은 사람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정하게 먼 거리에 고정된 다중 시점의 카메라를 통해서만 그려지고 있는데, 헤트비히가 일궈온 꽃밭과 온실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손만 까딱하면 네 명의 하녀들이 벌벌 떨며 궂은 일을 대신해주고 전시 중에도 케이크와 비싼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벽 뒤에서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든 나머지 가족들이 알게 뭐란 말인가.

“초콜릿 같은 거 있으면 꼭 챙겨줘”라며 남편에게 당부하는 씬을 통해 공범임을 입증한 헤트비히의 몸과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루돌프의 그것에 비해 비인간성의 일상화에 더 깊게 일조한다. 루돌프는 수용소장이고 헤트비히는 그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사람을 죽이고 처리하는 효율적 프로세스를 직접 설계하는 자고 헤트비히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 그럼으로써 당시에 침묵하거나 적극 가담한 일반적인 독일인 전체를 대표하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돌프가 참석한 나치 장교들의 회의보다도 헤트비히의 신경질적 짜증이 극 전반에 긴장감 도는 중력을 더한다. 그는 결코 상냥하거나 일관된 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제 기분이 상하면 “너 하나쯤 재로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라며 하녀를 위협하는 여주인이다. 무의식적인 듯해서 더 공포스러운 무시. 힘을 제대로 다루는 법도 모르고 뒤따르는 책임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갑자기 쥐어진 타인의 생사여탈권. 성실한 군인이고 좋은 아버지였던 루돌프가 창녀를 사는 위선이나, 헤트비히가 남편보다 집을 선택하는 자기중심성은 그래서 놀랍지도 기이하지도 않다.



상실 없는 상실과 공포 없는 공포, 무게감 없는 무게를 전달하는 작품을 ‘보며’ 관객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시각적 정보에 의존하는지를 계속 의식하게 된다. 벽 뒤에서 무언가 가동되는 소리. 간헐적인 총소리와 희미한 통곡과 비명 소리. 게르만 아기의 울음과 유대인 아기의 울음은 기묘하게 뒤섞이고 개들은 담장 안팎에서 하울링을 주고받는다. 헤트비히의 어머니처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이 모든 불길한 소리를 못 견뎌 말없이 떠나버릴 정도지만, 내부인들은 백색소음 정도로 치부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우리 눈에 푹푹 박혀오는 풀꽃의 선명한 빛깔, 새빨갛고 예쁜 수영복과 희디흰 게르만족 피부의 조화, 맑은 강물 앞 단란한 가족이 노니는 풍경이란 얼마나 아름답게 다가왔을 것인가.

눈과 귀의 기이한 간격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며, 눈을 극적으로 속이고, 클로즈업 없는 원경으로 눈이 해석하는 정보값을 어긋나게 하길 의도하던 영화는 돌연 마지막 5분간 오류 없이 명확한 장면을 송출하니, 바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관을 열심히 쓸고 닦는 현대의 풍경이다. 80년의 간극을 뛰어넘게 해줄 통로는 암전 속 빛이 새어 들어오는 좁은 바늘구멍이다. 이는 원시적인 카메라를 즉각 은유한다.

루돌프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돌연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찍는 카메라를 직시하고, 블랙박스가 ‘보여준’ 미래를 감지한다. 이 응시는 영적이고 마술적이다. 루돌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루돌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그날 밤 자기 공적을 치하하는 파티에서마저 ‘이 사람들을 가스로 몰살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전화 너머 헤트비히에게 즐거이 말한다. 즉 그는 ”당신은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란 필사의 합리화로도 보호받지 못할 괴물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붙잡혀 구타로 앙갚음당하고 결국 교수형을 당할 자신의 운명을, 악인 하나를 징벌하는 것으론 복구되지 않을 수십만의 생명을, 시원하게 토해내지도 못할 만큼 무거운 죄악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짊어진다.

드문 고요 속 루돌프는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아우슈비츠의 집에서 온 방 불을 끄고 문을 잠그며 침실로 올라갈 때와 같은 속도로.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의 우릴 반성하고 직면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그때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뭘 하는지 보라'.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걸 보여줍니다.

조나단 글레이저

그때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과, 지금 여기에서 내 눈앞이 아닌 곳에서 담장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다고 말할 사람들. 어쩌면 이미 늦어버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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