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트>,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

by 유해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라트>의 결말 즈음 루이스가 지뢰 깔린 사막을 안전히 건너는 장면은 구약성경의 롯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대도시의 타락에 지친 신이 천사를 보내 마지막 기회를 주려 했지만, 이방인 나그네로 변장한 천사들을 환대하기는커녕 유린하려 한 도시 사람들은 결국 통째로 유황과 불에 구워지는 형벌을 받는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가족들은 유일하게 신의 전령을 보살핀 덕으로 탈출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절대 도시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기고 온 사람들에 미련을 둔 롯의 아내는 뒤돌았다가 즉시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만다.


전형적인 구약 식의 단죄, 부끄러운 인간의 구원을 은유하는 롯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이를 보통 ‘롯 이야기’가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로 칭한다는 지점이다. 떠나서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그들이 떠나온 부패한 도시를 우선하는 인지는 그 이야기의 수용자인 우리가 어느 편에 서있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쉬이 입증한다. 트럭 두 대를 불태우고도 안전한 길을 알아내지 못해 주저하던 일행 앞에 돌연 나선 루이스는 아무 망설임 없이 지뢰밭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른다. 루이스는 절대 머뭇대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딸을 찾으려다 아들마저 잃었으므로 더이상 일생에 기대할 것이 남지 않은 무목적의 방랑자다.


두 친구를 잃은 다음날 깨어난 일행 눈에 보인 건 이미 두 구의 시신을 멀리서 수습해 와 무덤까지 만들어준 루이스의 등이었다. 순진한 비기의 눈엔 루이스의 덤덤한 뒷모습이 경이로운 묵언 수행자와 같을 것이다. 마치 천사의 가호가 함께 하는 것마냥 그는 폭탄을 피해다닌다. 루이스가 바위까지 도착하자, 100m 가량 뒤에 남겨진 일행 중 비기는 루이스를 성급히 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에 폭사한다. 타락한 인류세에서 남은 삶을 포기하지 못한 그는 롯의 아내와 같다. 나머지 두 친구는 소리쳐 묻는다. 루이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멀쩡한 거죠? 비기는 당신 뒤를 그대로 밟아갔는데 지뢰가 터졌잖아요. 루이스는 답한다. 나도 몰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걸었어. 그 말을 들은 스테피와 조쉬는 서로의 팔을 부여잡고 눈을 감은 채 조심조심 나아간다. 그 둘은 눈을 감았기 때문에 산다.

에스테반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 젊은 히피들은 망연자실한 루이스를 찾아내 물을 먹이고, 그를 중심에 두고 감싸 옹기종기 잠에 든다. 혼자 죽게 하지 않을게, 브라더(<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퍼뜩 놀라 일어났다가 다시 새로운 유사가족 사이로 웅크리고 잠드는 루이스의 모습은 잠깐의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목적 없이 지옥으로 전력질주하는 세상에서는 똑같이 목적 없고 눈 먼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살고 싶은 강렬한 욕망, 누군가를 위로하려는 알량한 유대감, 상실한 것을 되찾으려는 끈덕진 미련 따위는 시라트 - 이승과 지옥을 잇는 다리 -위에서 피차 의미가 없다.

자드는 상심한 루이스를 위해 앰프를 연결하고 그들만의 레이브 파티를 열자고 제안한다. 그런 자드가 춤추다가 무리 중 첫번째로 지뢰를 밟게 된다. 가장 어리고 다정한 사람의 죽음은 왠지 불합리해보이지만 제3차 세계대전이란 종말론적 은유부터가 죽음의 불합리한 공정성을 강력히 주장하며 밀어붙인다. 게다가 영화는 이미 자드보다도 어리고 무고한 자의 끔찍한 죽음을 보여준 바 있다. 식량이 부족한데도 누나, 형들과 초콜릿을 나눠먹으려던 살가운 에스테반의 오랜 죽음을.



딸을 찾다가 아들을 잃는다. 근거가 다소 희박한 인상평을 내놓자면 <시라트> 전체가, 그 중에서도 이 구절이 어딘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희생>과 성경의 욥기를 기묘하게 뒤섞고 뒤집어놓은 듯한 느낌을 갖는다. 욥은 잘 알려졌다시피 아무런 죄 없이 신과 사탄의 내기에 휘말려 모든 자식과 재산을 잃은 의인이다. 그가 비가역적 훼손을 입고도 신을 저주하지 않는 ‘시험’을 통과하자 신은 “새 부인과 새 집, 새 자식을 '돌려주면서' 속여넘기려” 한다(<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대체 왜 지속하며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질문하는 신정론은 욥의 고난을 대표적 예시로 삼는다. 가난한 병자가 된 욥은 계속해서 신에게 항의하고 질문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선하고 의롭게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루이스도 사막을 하염없이 걸어갈 때 비슷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내 아들인가? 그는 심판의 다리 위에서 어리거나 착하거나 순정하거나 한 인간 관점의 좋은 자질은 별 쓸모가 없다는 진실을 이내 알아버린다. 늙고 불퉁한 남자는 고맙게도 자신을 찾으러 온 레이버들 앞에서 되뇌인다.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방법이 없어. 애초에 여길 오면 안 됐어. 여기서 내가 뭘하는 거지? 우린… 길을 잃었어.”

순도 높은 방황의 언어 끝에 그는 자신이 어떤 목적을 갖고 사막에 진입한 줄 알았으나 실은 처음부터 길 잃은 상태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애초에 루이스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딸이 실제로 실종된 건지 생존이 위험한 상태인지 확신할 수도 없다. 앞서 에스테반은 사연을 궁금해하는 히피들에게 ‘누나는 나이가 찰 만큼 찼다’고 왠지 체념적인 태도로 얘기해준다. 즉 실종이 아니라 또 하나의 히피의 자발적 가출에 가까웠단 뜻이다. 결국 딸과 재회조차 하지 못한 루이스가 그 여정에서 이루고자 한 가족적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딸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꿈이나 망상처럼, 다시 말해 고난 당한 욥 앞에서 끝내 침묵한 신처럼 존재한다.


선악의 인과응보가 확실한 구약 성서에서 잘못 없이 징벌받은 욥은 대단히 논쟁적인 주제다. 테크노와 쿠란의 애호가라 밝힌 올리베르 라셰 감독이 이슬람의 아이디어를 전면적으로 차용했단 점은 이 작품에 엮인 신정론의 딜레마를 더욱 야릇하게 만든다. 이슬람에서 예언자는 본질적으로 신과 같이 무오無誤적 존재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쿠란에서 예언자로 분류되는 욥(아유브) 역시 완벽한 인내(사브르)의 화신으로 묘사되어 그의 ‘질문’은 완전히 생략된다. 쿠란의 욥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신을 비난하지 않고, 쿠란은 그에게 재빨리 신의 ‘보상’을 줘 사태를 수습해버린다.

무신론자 입장에서야 불행도 죽음도 랜덤하게 일어나는 세상의 법칙이 너무나 당연하게 납득되지만, 신자에게는 죄도 선행하지 않고 보상도 따르지 않는 극강의 고난은 신이 옳지 않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므로 근원적 공포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단 하나 남은 소중한 자식을 - 그것도 아들을 - 잃은 루이스가 사고 이래로 마치 선지자와 같은 아우라를 두르게 된다는 점, 또한 더이상 딸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는 랜덤한 세속의 법칙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신(딸)을 버리고 죽음으로부터 보호받는다. ‘그 덕에’ 죽음으로부터 보호받는다고 부연한다면 유치한 사타니스트나 한심한 운명론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루이스의 불가해한 발걸음은 완전히 운에 의한 것이니, 그의 살고 죽는 일, 그 유예까지도 모두 ‘어쩌다’ 일어나는 일일 수밖에.


<희생>의 나약한 단독자 알렉산더는 사실 성서학적으로는 롯이나 욥보다도 아브라함의 재연에 훨씬 가깝다. 불가해한 신의 명령(“네 독생자를 죽이라”)에 순종하고, 그로써 인간적 윤리를 따르는 사회와 분리되며, 믿음의 도약을 이루는 아브라함을 두고 키에르케고르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를 거행했다고 명명한다. 알렉산더 역시 ‘모든 것을 바치겠다’던 거룩한 서원에는 한참 못 미치더라도 자발적 다짐대로 집 한 채를 불태우고 신의 전갈대로 하녀와 동침하며 종내엔 정신병원에 잡혀간다. 그리하여 세상은 회복되지만, 그가 세상과 맺은 관계는 영영 회복되지 못한다.

<시라트>에서도 <희생>에서도 3차 세계대전이란 ‘외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명백히 설명되지 않는다. 전파 방해가 심각한 라디오에서 몇 개의 단어가 전해져올 뿐이다. 군인들이 레이브 파티를 중단시킨 현장에서 도망쳐와 사실상 사막에 고립된 와중, 착한 비기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종말이 온 거냐고 묻자 운전하던 토냉은 ‘종말은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났다’고 시니컬하게 대답한다. 레이브 문화는 기본적으로 ‘No Future’를 전제한다. 그들이 희구하는 집단적 엑스터시는 ‘계시’라 표현된다. 레이버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애초부터 묵시록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인간과 신과의 관계는 비매개적이고 공유 불가능한 1대1의 거래에 가깝다고 정의한다. 아브라함과 알렉산더처럼 신이 부여한 초월적 희생의 의무를 실행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의 공동체와 단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이버들이 추구하는 것은 반대로 초월의 집단화된 형태다. 그들은 신에게 올리는 기도 대신 반복 가능한 비트를, 금욕 대신 감각의 과잉을, 또렷한 자아 대신 경계의 붕괴를 즐기며 비목적적 소모의 의례를 창조한다. 이 집합적 황홀은 초월의 수평화 혹은 희석으로 선해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취가 끝난 후에 어떤 숭고함이 남는 것은 아니다. 집을 뼈대 하나 남지 않게 불태우는 광기를 전시하고도, 결국 한낱 범부마냥 아들에 대한 사랑을 구구절절 쓴 엔딩롤로 마무리된 거장의 부박한 유고작처럼. 조명과 음악으로 제단을 세웠던 새벽의 약 기운이 가시면 레이버들은 각기 텐트로, 트럭으로 흩어진다. 동기화된 리듬 하에 가졌던 ‘우리’라는 감각은 미약하고 파편적이다. 올리베르 라셰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보잘것없음이다. 영적인 것의 해체 후의 잔여물이다.


레이버 대다수는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는답시고 식민 지배와 내전으로 얼룩진 아프리카 북단 사막에 멋대로 침투한 유럽계 백인들이다. 토냉과 조쉬는 상이군인인지 팔다리 한쪽이 없다. 즉 이미 도처에 설명되지 않은 죽음과 전쟁, 착취와 추방이 도사린 지 오래다. 세상의 고갈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은 파괴적인 비트의 테크노와 약물에 영육을 맡겨 충만을 찾고 싶어한다. 다만 영화는 이들의 황홀경을 향한 욕망을 만능의 대항문화나 책임감 없는 도피 중 한쪽으로 판정하지 않는다. 신의 자비도 형벌도 작열하는 태양에 녹고 모래바람에 쓸려가버린 현장에서 올리베르 라셰는 영적인 것의 껍데기만 남은 영성을 기가 막히게 묘사해낸다. 끝끝내 유러피안 아웃사이더의 에고를 확고히 하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영화의 마지막, 기적처럼 살아남은 루이스, 조쉬와 스테피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열차의 지붕에 앉아 있다. 단 세 명의 생경한 이방인을 현지의 피난민과 노동자들이 빽빽히 에워싸고 있다. 더이상 놀라울 일도 화날 일도 없다는 듯한 무수한 체념의 얼굴. 방금 생사의 기로를 몇 번이고 넘어온 이들 코카시안 - 두 레이버와 더이상 아버지가 아니게 된 아버지- 들은 그제야 생존의 문제가 어쩌면 일생일대의 드라마틱한 이벤트가 아니라 별 일 아닌 일상의 사건일지 모른다는 진리를 생생히 ‘보게’ 된다. 깨달음에 앞서는 급진적 증거의 범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던 거룩한 말씀이야말로 지극히 공평해진 현실 앞에선 아무런 힘도 없다. 지옥과 삶을 구분하는 다리 따위야 무슨 의미 있으랴.


그렇게 비극의 세 잔여자(remnant)들은 비로소 겸허해진다. 라셰 감독의 말처럼 인생은 노크 없이 쳐들어와 내 앞에 놓인 길과 같나니. 영화가 사막에서 탈출하는 순간이 아니라 여전히 기약 없는 여정 중에 있는 순간으로 끝맺을 때 다시 떠오르는 건 롯의 두 딸들이다. 아버지는 천사가 분한 이방의 전령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강간하려는 마을 사람들에게 손님 대신 미혼인 두 딸을 내어주겠다 약속한다. 후에 소돔에 불벼락이 내리고 소금 기둥이 된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아버지와 동굴로 도망간 자매는 “이 땅에 남자라곤 남지 않았으니” 아버지를 술에 진탕 취하게 해 잠든 사이에 그의 아이를 배자고 공모한다.


멋대로 제물 되기를 제안한 아버지를 엄벌한 회복적 정의인지 기이한 근친상간적 착취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언제나 기억에 남았던 건 세상이 죄다 망한 줄 알았던 그들의 협소한 시야와 거기서 유래한 기함할 만한 결기다. 인류의 존속에 대한 책무를 등에 지고 자매는 아버지를 강간하는 '희생'을 치른다. 우스운 건 그들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적대국의 시조가 될 두 아이를 낳았단 사실이다. 압도적 맹목이 초래한 압도적 혼란. 어찌됐든 중동사는 그런대로 울퉁불퉁 영속해왔으므로 눈 감고 사막을 건넌 현대인들도 타락하고 길 잃은 채 당분간 잘만 생존할지도 모른다. 다만 롯의 동굴에서 나와 다른 남자가, 그것도 이교도가 아닌 남자가 아직 ‘바깥’에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자매의 얼굴이 언제까지고 궁금했었다. 어디까지 나아갈지 모르는 기차 위의 망연한 얼굴들을 보며 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탈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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