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밸류>, 메데이아는 집을 떠나

by 유해


구분을 잘 못하겠어요. 그게 이 모든 일의 원천인지 아니면 더 깊은 것의 증상인지를요…


벽난로에서 들려오던 아래층의 말소리처럼 우울이 대를 넘어 유전된다. 가끔은 내 피에 무언가 검고 무겁고 거대한 물질이 딱 붙어 있는 것만 같아 답답하다. 자살했다던 누군가의 쇠약한 신경과 안으로 향하는 눈물과, 그런 지질하고 망령된 게 혈류에 언제까지고 흐르고 있는 것처럼.

반나치 저항군이었던 카린에겐 남들이 납득할만한 명확한 고난이라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떠났단 투정 정도야 2년간 고문당한 수용소의 경험에 비하면 한 번의 물장구로 흩어질 얕은 핏방울인 걸. 그러니 내 뺨을 때려다오, 무대 뒤에서 과장되게 옷을 찢고 숨 못쉬는 나를 멸시해다오, 다가오면 달아나고 물러나면 낚아채려 드는 내 비겁을 잘근잘근 밟아다오. 나에게는 더 깊은 상처가 필요하다.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카린과 노라의 삶은 ‘집’이 제공한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꽤 겹쳐보인다. 상담사 어머니, 언니를 귀애하는 강단 있고 사랑 넘치는 동생을 둔 여자들. 그러니 중간에 끼인 구스타브로선 딸의 멍한 눈빛이, 분노에 찬 말들이 얼마나 심장 떨어지는 ‘증상’이었을 것인가. 어릴 적 난로에 귀를 대고 이야기를 엿듣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만으론 아비 노릇이 충분치 못했다는 걸 그는 어렵사리 인정한다. 아빠가 할머니를 떠올리며, 다시 말해 또 한 번 아빠 자신만을 위해 쓰였다고 생각한 각본을 노라는 거부한다. 그런데 아그네스는 말한다. 아무래도 이건 언니를 위해 쓰인 것 같아. 이상하지, 아빠가 어떻게 알았을까? 꼭 그때 아빠가 언니 곁에 있었던 것만 같아…


어쩌면 노라가 예대를 지원하며 배우의 길에 들어선 건 아그네스를 아역으로 썼던 아빠의 옛 영화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촬영장의 주인공으로 아빠의 사랑을 함뿍 받은 줄 알았던 동생이 돌연 역사학자가 되고 가정을 이룬다. 혼자만 실재하는 것들의 세계로 훌쩍 나아가버린다. 그 사랑을 의식한 나는 무대 위에 남았는데도. 벼락처럼 내려치는 허구와 외롬을 온몸으로 버티며, 첫 공연을 보러 오지 않는 아빠를 영원히 미워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아빠는 연극과 여배우를 싫어하니까. 아빠는 연극을 하는 여배우인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아빠는 다른 영화배우를 칭찬하고 그 여자애와 날 비교하면서도 내게 진짜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니까.

오프닝에서 노라가 어렵사리 무대에 올린 역할은 체호프 <갈매기>의 아르카디나로 보인다. “내 집에 너를 들였는데 너는 나를 배신하고 나에 대해 위증했다”고 늙은 남자들을 규탄하는, 반항적이고 거친 기세의 귀부인은 노라의 지난 삶을 초장부터 조심스레 예고하고 있다. 한편 영화제에 초청된 구스타브는 자신을 동경하는 젊은 배우 레이첼과 밤새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애를 마차에 태워 귀찮은 에이전시 직원들에게서 탈출시켜 준다. 환하게 웃으면서 추격을 벗어나는 레이첼은 후에 구스타브가 노라에게 언급하는 또다른 역할인 메데이아를 연상시킨다. 아버지와 첫 번째 남편을 위해 망설임 없이 대여섯 건의 살인을 저지른 희대의 악녀. 결국엔 버림받고도 분연히 일어나 종내엔 아들이 제 이름을 딴 왕국을 세우게 한 전설적인 책략가. 콜키스와 코린토스에서 비극을 뒤로하고 제 운명을 찢은 채 도망친 바로 그 메데이아. 그런 탈출이 구스타브가 노라에게 주고 싶었던 마지막 선물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에리크가 아홉 살이 된 날, 에벤을 놀려먹고 담배를 피우며 노라와 구스타브가 보인 공모의 눈빛 뒤편에서 구스타브는 노라를 산산이 무너뜨린다. “분노에 찬 사람은 사랑받지 못해. 넌 뭔가 돌볼 걸 찾아야 해, 자식이라든가… 자식은 후회할 수가 없잖아요.”

낳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 앞에 조용히 가라앉는 레나테 레인스베의 얼굴은 경이롭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빙글빙글 돌다가 주저앉아 울어버리는 노라는 사실 방처럼 생긴 무대 위에 있었다. 인형의 집은 멀리 있지 않아. 도와주세요, 저 여기 있어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가끔은 집이 날 집어삼키는 것 같다고, 엄마 세실도 그런 말을 했을까.


상담사 어머니를 두고도 도움받지 못한 여자들. 언니를 귀애하는 강단 있고 사랑 넘치는 동생을 둔 여자들. 목을 매는 일에 한 여자는 성공했고 다른 여자는 실패했다. 카린의 여동생 에디트는 여자친구와 그 집에 들어와 살며 언니를 밀고했던 이웃들이 들으란 듯 매일 밤 파티를 연다. 아그네스는 발칙한 애도까지 나아가기를 택하지 않는다. 그애는 에디트가 그악스럽게 밀어붙인 드라마와는 어울리지 않기로 했다. 아그네스는 그전에 마지막 기회를 잡고 제때 언니를 구한다.

- 왜 같은 일을 겪었는데 나만 망가지고 너는 멀쩡할까?

- 내겐 언니가 있었기 때문이지. 언니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 여기겠지만 사실이 아니야.


성숙하고 현명한 아그네스의 힘은 ‘진짜’를 보고 만지고 돌보는 책임에서 기인한다. 카린을 알기 위해 아버지에게 묻는 게 아니라 도서관의 문헌을 신청해 읽어보는 그애의 감정적 프로세싱은 언니나 아빠와의 것과는 다르게 구성되도록 쌓여왔다. 그것 역시 선택이다. 침대에서는 혼자 울더라도 상담실에서는 우는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진단하고 도와주던 세실처럼.


그렇게, 레이첼이 겸허히 포기한 각본이 아그네스의 손을 타고 노라에게 가닿는다. 노라와 에리크가 등장하는 마지막 원테이크가 시작되기 직전 해체 중이던 ‘집’. 크랭크업을 준비 중인 현장은 사실 ‘집’이 아니라 그의 구조를 그대로 본뜬 세트장이었다. 유명 배우를 포기하고, 영어 대사를 포기하고, 제작자 친구 페드로를 기어이 데려왔으니 넷플릭스 투자는 거둬졌거나 최소한 축소된 게 분명하다. 구스타브는 ‘집’을 팔아 모자란 자금을 댔을지도 모른다. 구스타브의 영화는 레이첼을 홀딱 반하게 했던 등받이 없는 이케아 의자 대신 튼튼한 노란색 의자를 두고, 문이 닫힌 후에도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를 내지 않으며 마지막 숏을 마무리한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남편이 자기 잘못을 발견하기 전에 자살하려다가 그의 비겁한 처사를 보곤 마음을 고쳐먹는다. 연극을 싫어한다던 영화인 아버지가 노르웨이가 낳은 세기의 극작가가 쓴 가장 유명한 작품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름을 첫 딸에게 붙인 건 아무래도 얄궂다. 구스타브는 연극이 압도적 권위를 잃고 영화와의 관계가 전도된 60년대에 10대를 보냈다. 영화는 그랬던 영화조차 이제 틱톡과 숏츠에 밀려나고 있다며 조소하면서 연극의 막을 닮은 페이드아웃을 반복한다. 오랜 세월의 방황 후 아마도 마지막이 될 영화를 찍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구스타브처럼. 영화에서 남는 건 결국 이야기가 잡아두는 시간이고 무대라는 한계를 극복한 공간이다.


그러니 너는 죽지 말고 이 집을 빠져나가렴.

너를 위해 쓴 이야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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