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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Nov 21. 2021

구병모, 박탈당하는 것이 우리 운명이라면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리뷰

※ 2019년 7월 작성


나는 평소에 길거리에서 싸움이 종종 붙는 편이다. 휘말리거나 피하지 못한 것보다는 내가 들이받아서 싸움이 시작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내 성미가 깔끔하지 못한 것은 인정하나 단 한 번도 이유 없는 시비는 아니었던 것이, 내가 들이받는 대상이 보통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근처에 서 있는 젊은 여자들의 다리를 대놓고 훑어보거나 때로는 저들끼리 품평까지 해놓곤 따지면 '예뻐서 볼 수도 있지 어른한테 버르장머리 없게 뭐하는 짓이냐'라며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늙은 남성들.

대중교통에서 바로 앞에 체념한 표정으로 서있는 임산부를 보고도 이죽이듯이 임산부석에서 일어나지 않는 남성들.

마찬가지로 대중교통에서 무슨 자랑스러운 것이라도 달려있는 마냥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선 옆 좌석의 내 불편은 안중에도 없는 남성들.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해도, 그래봤자 카드를 조금 느리게 찍거나 하는 정도의 아무 잘못도 아닌데도 덩치 좋은 젊은 남자에겐 찍소리 못하다가 여자만 눈에 띈다 하면 쥐 잡듯 잡는 남성 버스/택시 기사들.

나이는 노력해서 먹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만 있으면 먹는 건데, 나이에 걸맞은 교양과 예의는 전무한데도 오직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반말로 화를 내고 어린 캐셔나 알바생들을 괴롭히는 사람들(나와 지인들의 경험만 놓고 보자면 백 명 중 99명이 남자였다).


하지만 이런 싸움이 무슨 대단한 정의감이나 원칙주의적인 성향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몰지각하고 무식하고 무례한 사람과 한참 떠들고 나면 늘 그렇듯이, 명백한 자기 잘못에도 불구하고 감히 어린 여자가 저를 지적했다는 점에 버튼 눌려서는 꼰대짓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남성들과의  실랑이는 내게도 엄청난 기력과 시간의 손실을 초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피해의 구도가 확실한 사소한 사건들에서 되도록이면 못 본 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런 남자들이 앞으로는 겁을 먹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어린 여자라 해도 그중에 나 같은 폭탄이, 소위 '미친년'이 몇 명이나 섞여있을지 모르니 공공장소에서 망신당하는 게 두려워서라도 함부로 굴지 않기를. 전적으로 그 이유뿐이다.

나는 운 좋게 말을 잘하고 잘 쫄지 않고 화낼 때 이성을 잃거나 눈물부터 터지지는 않는 성격으로 태어났지만, 내 주변의 많은 여성 지인들이 공공장소에서 '따지기엔 약간 애매하고 괜히 더 욕먹거나 진짜로 맞을까 봐 두려워서' '말싸움하고 따지고 들어서 사과를 받아낼 자신이 없어서' 매번 그냥 참고 넘어가기를 택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내 동기는 영웅 심리나 분노가 아니라 그런 지인들과 다른 모든 여성들을 고려한 일종의 연대감에서 출발한 것이며, 아무도 고마워하거나 도와주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이 먹은 남성이 어린 여성을 부당하게/지나치게 공격하는' 일에는 언제나 최고로 예민한 나더라도, 언제나, 예외 없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도덕적이고 공익을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덤빌 때도 상황을 봐가며 덤비는지라 젊고 사지 건강한 남자들에게는 솔직히 아무리 '빻은' 짓을 해도 눈앞에서 대거리를 하진 못한다. 진짜로 맞아 죽을까 봐. 직장이나 학교에서 만났다면 다행히 문제 제기할 창구와 미약한 보호막이라도 있지만 길거리에서 무리 지어 낄낄대는 남자들 앞에서는 정말 화가 났대도 조심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앞에 줄줄이 열거한 나의 싸움을 정의가 아니라 늙고 힘없는 (그렇다 해도 늘 입에는 걸레 문 것처럼 무례하게 굴지만) 남성들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라고 이야기해도, 나는 별로 반박할 수가 없다. 일면 사실이라고 느낄 때도 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나의 정체성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일련의 범주에만 민감하고 담대하게 반응하며, 그마저도 가해의 주체를 본능적으로 살펴가며 뛰어들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보다는 내 집단의 피해가 사회적 발전의 저해와 긴밀하고 시의적절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얼렁뚱땅 운 좋게 맞물렸단 식으로 용감하게 구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검열할 때가 있다. 내가 가진 관념으로서의 정의는 선택적이지 않은데 정의의 실현은 분명 선택적이다. 내 안위와 직결된 일이기에 어쩔 수는 없지만.



구병모가 이 책에서 내놓는 인물들은 대부분 이런 미흡하고 이기적인 정의, 혹은 박탈당한 다정을 표상하는 사람들이다.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라고 제언한 이 소설가의 인물들은, 근래의 한국 소설이 대부분 몰입해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혹은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 힘들다는 사실이 현재의 가장 큰 고통이자 실존적 고민인' 그리고 대체로 '최선을 다해 다정한' 인물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잘 익은 애정은 고사하고, 정의감이나 연민 같은 좀 더 날 것의 감정, 또는 섣부르고 알량한 배려심까지도 불가능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인간들이 등장하고 구병모는 그들을 냉담하게 관망한다. 독자에게 동정을 일으킬만한 안타까운 내러티브는 거의 목격되지 않고, 정말 처절한 상황이라 해도 자기와 자기 식솔들이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린 그들의 '합리적' 선택을 더욱 조망한다.


구병모 소설 속의 정서는 대부분 이런

1) 자기 존재가 선행先行해야 타인에게 베푸는 선행善行이 가능하다는 합리성

혹은 2) 찝찝하지만 결국 무시되고 마는 죄의식과 직결되어 있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의 '나'가 친구 '하이'의 끝없는 등반을 그저 구경하며, 내심 하이가 '인신공양'처럼 자기의 대리만족을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 바란 것은 애교 수준이다. 저 옛날의 우물 설화의 구병모식 재해석인 <파르마코스>에서는 '루'가 타당한 이유를 들어가며 외지인 노파에게 물을 나눠주지 않았다가 그 자신이 한 사회의 집단 이기주의에 당하게 된다. 자기 가족의 생존을 위해 동생 '수'를 학대했다가, 마을 전체를 위한 학대의 피해자로 위치가 전복된 것뿐이지만 그녀는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폭력의 똑 닮은 형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수의 일에 있어서는 자신이 그럴만했다는 변명으로,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완전한 악인으로 묘사한다.

<이창>에서는 화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과 그녀의 남편마저도 '내 아이가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하에 화자를 이질적이고 별난 사람으로 몰아가고 이러한 부모상 혹은 시민사회의 모습은 <식우>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니은'의 부모가 그냥 그대로 죽는 것을 택하지 않고 힘겹고 가망 없는 피난길에 나선 것은 그들의 자식, 그들의 재화와 그것을 수호하는 정신을 계승할 분신, 그러므로 또 다른 그들 그 자체인 니은을 위해서다. 그들이 그렇게 키운 '니은'은 자기가 당하던 학교폭력을 방조하던 친구 '디귿'의 불행을 목격하곤 유치한 보상 심리와 찝찝한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자기 가족의 생존을 위해 디귿을 방치한다. 그리고 O시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식우에서 도망친 G시의 피난민들을 차벽까지 세워 저지하고 국가는 'G시는 곧 국가이므로' '어느 한쪽이 녹아 없어져야 한다면 그건 O시의 사람들'이라는 경제적·정치적 판단에 따라 O시 시민들을 폭력 제압한다.

<이물>에서는 아예 '나의 공간으로 침입한, 나의 소유에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타자'를 분명하게 형상화하는데 그 와중에도 천성이 '돌보는 자'인 양선을 제외하곤 그 타자 - 방 안의 생물이든, 마을의 질서를 깨는 정신 질환자든 -에게 연민 섞인 관심을 제공할 만큼 한가한 인간은 전무하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는 사회의 감정적 먹이사슬에서도 가장 밑단에 위치한 서비스직 노동자들이 인면수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그들이 인간이었을 때의 천대받던 역사와 한때 인간이었던 그것들을 톱으로 베고 불태우고 쓸어내는 '아직 인간인' 사람들을 병렬 배치해 보여준다.



이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1) 아직은 인간에 대한 긍정을 놓지 못했거나 2) 연민이든 배척이든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사회에서 배제되고 유리되어 너무 지쳐버린 인물들이다. 1)에는 <이창>의 화자와 <이물>의 양선이, 2)에는 <관통>의 미온과 <어디까지를 묻다>의 화자 그리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 등장시킨   이유 모를 병자들이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1)은 모두 2)와 같은 완전한 좌절을 향해 완성되어가고 있다. 과거엔 발목 잡는 부모에, 현재는 독박 육아와 답 없는 남편에, 그리고 평생을 빈곤에 시달린 미온이나, 어렸을 적 꿈은 성우이지만 카드회사 콜센터 직원으로서 단 하나의 재산이고 꿈이었던 목소리마저 잃어가는 <어디까지를 묻다>의 '나'는 정말이지 너덜너덜해져 나가떨어진 사람들이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서 괴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위로 더 위로 아파트를 오른 하이처럼, 그들은 모두 '이곳을 벗어난 어딘가로' 탈출하려는 욕구를 나눠가진다. 미온은 결국 그림을 관통해 그녀가 바랐던 모든 가볍고 속물적인 행복이 존재하는 이세계로 넘어가고, 콜센터 직원인 '나'는 택시 기사에게 불러준 목적지를 지나쳐도 계속 계속 가기를 주문한다.


그렇다면 <이창>의 주부인 화자와 <이물>의 양선은? 나는 이 소설집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공익적 욕심을 갖고 남을 자의로 돌보는 인물이 이 둘이라고 읽었다. 물론 몹시 자기만족적인 <이창>의 화자와 몹시 이타적인 양선의 성질을 해석하고 나면 이들의 의도에는 상당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구병모는 질적 차이가 있거나 말거나 그들에게 공평하게 불행과 불신을 선사한다. 이웃의 아이를 돕겠다는 의도로, 거의 활활 타는 정의감으로 이웃집을 계속해서 훔쳐보며 동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던 화자는 결말로 갈수록 편집증이나 과대망상을 의심받고 남편에게 정곡을 찔리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양선은 선한 천성의 집약 같은 인물이지만 현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할 만큼 자기 자신의 선행에 질려있다. 결국 그 다짐마저 그녀가 방구석의 출처모를 털투성이에게 동정 섞인 관심을 가지는 순간, 그래서 결국 그것을 만지는 순간 깨졌고 단편의 결말은 어떤 종말을 상징하듯 끝나버린다.



하나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닮아 있는 이 인물들을 구병모는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저 관조한다. 인간은 그저 이런 꼴이라는 사실에 대한 나열과 함께 보일 법한 회의도, 환멸도, 비소도 분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시점에는 동정이나 비정이 질척하게 묻어있지 않고 오직 껄끄러울 만큼 담담한 관찰만 있을 뿐이다. 최근의 문장가들이 흔히 하듯이, 거대한 보편자나 재앙에 스러지며 똑같이 나약한 타인에게 화풀이하는 인간들을 간단히 '소시민'으로 호명하고 사이다 같은 징벌을 내리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그 관조. 너라면 어쩔래? 하고 곤란한 질문을 받아 어느새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고 있던 나를 발견하게 되면 그가 놓은 덫에 걸린 기분이다.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에 청소년 성장소설로 데뷔한 작가라 그런지 오랫동안 가까워지지 못했다. 구병모의 첫 책으로 이 소설집을 접한 지금은 그를 몰랐던 지난 10년의 시절이 아쉬울 정도다. 이 비상한 천재성이라니. 파과, 아가미, 네 이웃의 식탁, 버드 스트라이크, 단 하나의 문장도 얼른 차례로 읽고 싶다.






1.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있어서 놈이 특별한 까닭이었다. 놈의 머리 위 궁륭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본 사람은 우리 중 누구도 없었다. 누구나 마음이란 걸 갖고 있기에 간과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내면으로 침잠하기가 허공으로 뻗어 오르기보다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깊이를 재기도 불가능하며 거기 도사린 짐승의 야만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동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따라서 거기서 뭐가 튀어나오더라도, 아무리 큰 배신감과 충격에 휩싸이더라도 열 길 물속 한 길 사람 속 같은 말로 무마하며 염세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반면 사람의 신체 - 즉 외곽은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모눈 한 칸을 깨뜨리는 사람을 보면 그 이변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똑같은 삶을 사는데 나와는 다른 행동 범위를 갖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2. 파르마코스

파르마코스: 고대 그리스어로 속죄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염병이나 기근, 외세 침입, 내부 불안 등과 같은 재앙이 덮쳤을 때, 재앙의 원흉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기 위해 자체의 경비로 인간 제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파르마코스라고 칭했다. 소나 송아지 같은 동물들 이외의 인간 파르마코스는 대체로 희생을 당하더라도 보복의 위험이 없거나 연고자가 없는 부랑자, 가난한 자, 불구자들 가운데 선택되었다. (중략) 따라서 파르마코스는 어떤 불확실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는 속죄양이 아니라, 집단 내부에 잠재되어 있어 언제든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폭력을 상징적인 폭력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떠맡은 희생물이다. 일종의 '폭력을 속이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속죄양 제도를 통해 사회는 불순한 폭력(violence impur)을 응징하는 순수한 폭력(violence pur)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희생제의는 '해로운' 폭력과 '이로운' 폭력을 차별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폭력의 희생자인 속죄양에게 성스러운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하게 되는데, 이 성스러움은 바로 '이로운' 폭력의 폭력성을 감추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르마코스 [Pharmakos]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4. 이창

피아간 구별이 자기 자식만 물고 빠는 행위로 규정되는 세상에서 나와 1그램의 상관도 없는 남의 집 자식 안위를 염려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당신들은 옆집에서 누군가가 죽어 나간들 그게 나와 내 자식만 아니면 그만이라고 할지 모르나 사람이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적어도 사람답게 산다는 건, 정신은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비로소 정신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한다. 거기 존재한다고만 해서 그것이 정신이 될 수는 없다. 나를 비난하기 전에 부디, 당신들의 정신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부터 답하기 바란다.
그러니까 80명의 얼굴 모르는 이들은 지금 당신들이 내게 보이는 것과 거의 같은 반응을 나타냈다. 당신 자식이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모른 척 지나가면 될 일을 애써 파고드는 저의는 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한다는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내 아이가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이런 사람들이 길러내는 아이가, 훗날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아이로 자라난다는 걸 그들은, 당신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5. 식우

누군가 한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다. 옆자리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 자리가 비어 있다고만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품속에 몰티즈 한 마리나 무사히 지켜내는 게 정신적으로 남는 장사이며, 이 순간의 외면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문득 차창 너머의 디귿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친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눈 속에 담긴 혐오 내지는 공포 아니면 간구의 빛을 포착했다고 느꼈음에도 니은은 다만 불가능한 행운과 안녕을 비는 것이 서로에게 최선이라 믿으며, 디귿의 얼굴 거의 절반이 녹아내리는 이 순간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동등해진다.



6. 이물

이제 가능한 한 월급이 표시하는 만큼의 일을 객관적 절차에 따라서만 할 것이고 사명감 따위는 개나 줘버린 다음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밀한 지향보다는 표면적 당위로 변질되어 부질없기만 했던 선언 - 누군가를 구제한다는 착각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며 봉사는 나의 모자람을 타인으로 인해 채워가는 행위라는 - 도 남몰래 코를 푼 휴지처럼 변기에 던질 것이다.
(…) 그것의 온기와 감촉을 아는 순간 또다시 그것의 권리와 자격을 숙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핌을 받을, 옆에 살아 있어도 되는 존재. 이어서 그것을 방기한 이들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이유가 제 발로 사라져줄 리는 없으니, 사라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유를 품은 사람이어야 한다.



8. 어디까지를 묻다

고객센터라고, 계약직이라고 그 회사 사람 아니냐? 그래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걸, 아빠. H 택배 로고가 적힌 조끼를 입고 H 택배 운송장이 붙은 물건을 나른다고 아빠가 H 기업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적 있어? 트럭도 아빠 거고 본사에서 기름 한 방울 지원받은 적 있냐고? 거의 목구멍에 걸렸는데 막았죠. 그냥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놔뒀어요. 즐거워하시니까. 그동안 밑 빠진 독에 잠자코 물 부어 주셨는데 독을 아예 깨버린 딸이 그 정도 즐거움은 드려도 되니까…… 무엇보다 부모님도 웬만큼 알면서 나 기죽지 말라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시는 거라고 생각하면요. 회사의 명성이 높을수록 개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영세해진다는 사실을, 하청 택배 7년 차인 아빠가 모를 리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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