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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Sep 29. 2021

<내가 속한 나라>,
페촐트의 어른됨과 아이됨 ②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바라>, 페촐트의 어른됨과 아이됨  에서 이어집니다.



'책임져야 할 후세대를 자신이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책임지면서. 어른 되기에서 영원히 도망 다닐 수는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정확히 이걸 못하고 몸만 자란 게 <내가 속한 나라>의 어른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속한 나라>는 어쨌든 장르상 멜로 드라마인 <바바라>보다 훨씬 분명하게 어른-아이를 대비시키며, 아이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성장 드라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바바라>와 정반대로 철없고 이기적인 부모와 너무 일찍 철들어야 했던 아이가 반목한다. 도망 다니는 정치범 부부가 낳아 (아마도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고) 기른 아이가 아는 건 늘 침범하고, 숨고, 정찰하고, 훔치는 삶뿐이다. 상영관을 나와 되짚어 생각해 보니 주인공 잔의 얼굴에서는 부러움이나 초조함 이외의 감정을 잘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한스와 클라라는 물론 양육자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무척 애쓰고 있고 잔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하지만, 영화 말미에 잔이 소리 질렀듯 '하면 안 되는 일을 해놓고' 그걸 15년 동안 수습하려고 애쓰고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그들은 애초에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실패한 좌파 정치범 부부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궤도 안의 삶을 포기하고 이탈자가 되어 도망 다니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잔의 존재는 잔 자신에게조차 재앙이 된다. 아이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는데 모든 걸 포기해야만 하는 처지다. 아이는 심지어 온갖 작전과 생계유지의 도구로 쓰인다. 얼굴이 팔린 자신들 대신 연락책으로, 공급망으로, 정탐병으로, 스페인어나 프랑스어 따위의 통번역까지 직접 가르쳐 가며. 다른 삶의 가능성을 출생부터 몰랐던 잔은 지인 카타리나의 집으로 보내 제대로 학교를 다니게 하겠다는 부모의 (나름대로 마음 아팠을) 결정에 반발하며 '엄마 아빠랑 같이 있게 해줘'라며 애원하고, 그게 내겐 이 영화 내내 최고의 비극이었다. 물론 또 다른 비극이라면 잔과 하인리히의 거짓으로 시작해서 밀고와 배신으로 끝난 관계고, 그보다 더한 현실적 비극은 사실 클라라와 한스의 관계겠지만.



영화에서 잔은 끊임없이 남의 것을 모방한다. 취향(파울리나의 패션, 하인리히가 듣는 음악)과 습관(어른들의 담배), 공간(하인리히가 언급한 강가의 주택)과 시간(길에서 만난 여학생을 따라가 들은 학교 수업), 자기 배경에 대한 거짓말까지 모방하는 건 부모가 줄 수 있는 '정상 궤도 안의' 삶에 대한 명확한 상이 없기 때문이다. 결핍과 과잉을 다 경험하고 그로써 중도의 감각이 뭔지 알 수 있는 삶이었다면 잔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절히 선택할 수 있었을 테지만 잔의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잔에게는 극단의 결핍이나 극단의 과잉밖에는 없다. 그는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유기되고, 부유하고, 배신당하는 약자의 삶을 존재 자체로 증명하고 있다. 잔이 '사회'에 포착되는 유일한 순간은 그가 부모의 은행털이 계획을 위해 은행을 정찰하러 갔을 때 찍힌 흑백의 저화질 CCTV 영상 속에만 존재한다.


게다가 부모는 자식에게 자기 유년기와 공통된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가장 기초적인 과제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자신들은 '적어도 잔보다는' 편안히 살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부터 15년 이상 신분도 없고 정규 교육의 기회도 없이 숨어다니며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나도 남은 돈을 (부모님께) 돌려주지 않고 책을 사곤 했어"라고, 한스는 "나도 부모님 섹스하는 소리 들으면 짜증 났는걸"이라고 말하며 나름의 노력을 전한다. 하지만 그들이 잔과 나눌 수 있는 공감대라곤 겨우 그게 끝이다. 얄팍하기 짝이 없는 공통분모. 그래서 아이는 서로를 향한 육체적 정열 말고는 보여줄 게 없는 부모를 따라, 당연하고도 그래야만 하는 일이라는 듯이, 자신의 안전을 위협할 게 분명한 이방인과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




그나마의 희극이라면 사거리 교차로에서 전후좌우 모든 차들이 세 가족을 쫓는 줄 알았던 씬에서 관객이 함께 느낀 고도의 긴장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뒤 차에서 험상궂게 생긴 운전자가 내려 그들을 이유 없이 노려보는 순간, 급습당한 줄 안 한스는 잽싸게 차에서 내려 손을 들고 무장해제 상태를 알리며 항복의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알고 보니 교차로의 모든 차들은 그냥 지나가는 중이었을 뿐 경찰이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과 실소가 함께 터져 나오는 블랙 코미디다.


이 의도적 허무감을 통해 페촐트는 세 가족, 특히 아빠 한스의 뼈에 새겨진 불안이 얼마나 자의식 과잉적인지를 슬프게 조소한다.

관객과 평론가들이 페촐트의 작품들을 주로 '역사성'과 결부시켜 선해해주는 그 방식을 이 영화에만큼은 적용하기 힘들 것 같다. '한스의 과도한 불안을 야기한 도망의 세월, 그 근원인 체제가 얼마나 강렬하고 깊은 힘을 가졌는지 고발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띈 게 한스의 불퉁하고 감정적인 태도였을 정도로 한스는 상당히 철없고 이기적인 가장이다. 그는 어쩌면 잔만큼도 자제와 포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이런 성품에는 아마 그가 스스로를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 의미 있는 이념에 투신하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비대한 자의식이 큰 영향을 끼쳤을 테다.


영화에선 그의 대단한 신념이 대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한스가 아마도 68혁명 세대의 끝물에 양성된 마지막 운동권, 퇴락한 독일 적군파의 막내 세대인 것 같다고 유추해 볼 수는 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려 찾아간 옛 동료들은 죄다 그를 외면하고 한심해하고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는 없다'라고 선언하며 한스의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를 통째로 부정하고 만다. 자격지심과 열패감에 찌든 남자는 동료를 때리고, 궁지에 몰릴수록 더더욱 명분으로서의 정치적 신념에 매달린다. 여기서 이 작품이 (페촐트의 최근작이 받는 상찬과 같이) '역사성'을 갖는 영화가 되려면, 독일의 운동권 후세대가 하던 고민이나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통찰이 마땅히 한 번쯤 나와주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페촐트는 그러한 방법 대신 새 인물 클라우스를 내세워 역사성 대신 개인성으로 방향을 약간 비튼다.



극 중에서 파편적으로 제시된 정보만 갖고도 클라라가 나이 든 클라우스의 어리고 귀여운 애인이었던 시절이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대체 왜? 페촐트의 초기작은 여성을 죄다 이런 관습적으로 피학적인 위치에 놓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클라라는 한스를 따라가느라 클라우스를 떠나지만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안온하고 유복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 클라우스는 대기업 임원진에서 좌천됐을지언정 옛 연인 클라라를 위해 거액을 마련해올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자산을 유지하는 사람이고, 여전히 클라라를 귀애한다. 클라우스와 한스 중 누구의 딸인지 삽시간에 불분명해진 잔의 존재 역시 엄마의 운명을 따랐을 것이다. 클라라가 클라우스 곁에 남아있었다면 잔의 친부는 클라우스가 '되었을' 것이고, 클라라가 한스를 따라갔기에 한스의 딸이 '된' 것이니까. 어쩌면 이념/체제 간의 경합이라는, 전통적으로 남성적이었던 갈등 구조에 대한 여성들의 모계유전적 저항이라는 코드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러티브의 주체가 잔이라는 성장기 여성이기 때문에 아빠의 옛사랑이 아닌 엄마의 옛사랑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스는 현재 가장이고, 클라라와 잔을 보살피는 남성이고, 그에게 여자라곤 클라라뿐이지만 클라라에게는 클라우스라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그 선택지를 버리고 한스와 함께 정치에 투신하고 도주함으로써 이 가족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의 운전자가 클라라였던 것이다. 시작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끝을 내야만 하기 때문에. 은행털이 당시 한스가 치명상을 입은 것 또한 가장의 추락, 즉 절대적이고 전통적인 권위(국가권력/남성권력)의 몰락을 뜻한다. 이어 그것은 그들의 도망이 곧 막을 내릴 것이며 잔의 유년기 역시 가족의 상실과 함께 끝나버릴 것을 예고하는 복선이다.



비교적 초기작인 <내가 속한 나라>에서 페촐트는 통일 후 독일 시민사회가 겪은 정서적 내상 혹은 스러진 운동권 이후 세대의 초라한 방황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보다는, 그 후세대(남성)가 이룬 가족이라는 소재를 통해 개인적이고 미시사적인 불행으로 천착하고 만다. 그리고 도망자/여성/아이인 잔은 결부된 모든 권력구조에서 가장 약자인 존재로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삼중의 한계 상황 속에 놓이는데, 이조차도 (적어도 3개 국어 이상을 하는 청소년의 놀라운 지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연애사로 해소하게 만드는 설정마저 그를 기만한다. 잔은 아이에게 허용되었어야 할 애착과 자유는 얻지 못하면서도 (그를 살아 숨 쉬게 한) 감독에게조차 순진무구한 여자아이다움, '아이됨'을 강요당하는 인물이다.


결국 <내가 속한 나라>는 단순히 독일이란 국가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잔이 그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요소 - 국가, 성별, 나이, 가족까지 - 와 불화하고 종국에는 영원히 '속하지 못하는' 자에 남겨지는 아이러니를 뜻한다. 제목에서 '여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말이 연상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페촐트 감독이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까지 꾸준히 끌고 가다가 <운디네>에서 노골적으로 폭발시키는 '난민성/유령성을 지닌 여성'의 이미지가 <내가 속한 나라>에서 이미 태동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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