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Oct 05. 2021

<열망>과 <옐라>,
응시하는 여자들, 꿈꾸는 여자들


여러 아트시네마에서 동시 진행한 페촐트 기획전에 소개된 일곱 작품 중 마지막으로 본 두 작품. 1월에 본 <운디네>부터 차근차근 한 작품씩 페촐트 필모그래피를 복습해온 셈인데, 어쨌든 이제 국내에서 정식 상영된 작품들은 다 봤다. 영화 보는 사람으로서 올해의 가장 큰 성과는 크리스티안 페촐트를 알게 된 것, 국내 상영된 작품들을 다 본 것, 가능한 한 많은 평론을 찾아본 것, 한 편도 빠짐없이 복기하는 글을 썼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뿌듯하다.


페촐트는 물론 탄탄하고 뚜렷한 (거의 '사관'을 가졌다고 말해도 좋을) 역사의식과 공간성에 대한 강한 집착을 지닌 감독이다. 지난 7월 <피닉스> 개봉 당시 김소미 평론가는 "사랑과 정체성의 문제를 역사적 미로 위에 펼쳐내는 페촐트 영화의 묘한 아름다움"에 대해 쓰며 페촐트를 "제2차 세계대전과 베를린장벽 붕괴를 근거지 삼아 독일인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상실감에 천착하는 작가"라 표현했다(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8208). 페촐트 작품세계에 대한 내 호기심도 그 지적인 시공간성과 유령성(혹은 경계인성)에 기반하지만, 보다 핵심은 그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성에 있는 것 같다. 그가 전심을 다해 멜로 그 자체에 투철하다는 점. 그리고 이야기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무척 고전적인 스타일을 견지한다는 점 말이다.



그런데 최근작인 <트랜짓>과 <운디네>의 복잡하고 우아한 플롯에 비한다면, 페촐트의 초기작들은 상당히 간명한 서사 구조를 가진다. 사실 <열망>과 <옐라>는 동일한 모티프를 두고 거의 동일한 기승전결을 따른다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다. 한 여자가 자신에게 (사회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허용되지 않았던 것을 욕망한다. 여자는 겁내지만 담대하다. 근시안적이지만 최선을 다해 교활하다. 그의 남편/애인이 욕망의 추구를 저지해 위기에 처한다. 여자는 결국 욕망 그 자체에 발목 잡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좌절당한다. 이 단순한 비극, 역사성이 소거된 멜로가 <열망>과 <옐라>를 이루는 전부다. 굳이 부연하자면 주인공 여성이 아주 아름답다는 점이 작품 내에서 노골적으로 여러 번 언급되고 암시된다는 점 정도.



'페촐트의 초기작은 여성을 죄다 이런 관습적으로 피학적인 위치에 놓는' 듯하다고 저번에 쓴 <바바라>와 <내가 속한 나라> 리뷰에서 약간 불평했는데, 그때 느낀 꺼림칙함이나 의구심이 특히 이 두 작품에서 증폭됐다고 말해야만 하겠다.

<열망>의 로라와 <옐라>의 옐라는 둘 다 실패한 결혼 안에 갇힌, 스토킹 및 가정폭력(또는 선험한 해당 폭력들로 인한 환시)에 시달리는 여자들이다. 그들은 '몹시' 아름답고 젊고 관능적이며 이 성적 매력이 그들의 자의와 무관하게 주변 남성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기에 그들의 전/남편들은 더욱 집착적으로 변해간다. 페촐트의 후속작에 등장한 여성 주인공들, 바바라와 마리와 넬리와 운디네는 물론이고 2000년작인 <내가 속한 나라>의 클라라(바바라 오어)나 잔(줄리아 험머)만큼의 능동성도 부여받지 못한 이 '아름다운 여자'들의 목적은 오로지 이런 남편으로부터의 탈출에 있다. 옐라는 이혼한 남편 벤의 무능력과 집착, 그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의 속물성에 지쳐 고향 마을을 어떻게든 떠나려 하고, 로라는 나이 많고 돈 많은 터키인 남편 알리가 자기 빚과 과거를 청산해주기 때문에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자포자기해 좁은 마을 안에서 부정한 아내가 되길 주저치 않는 로라의 인생엔 아프간에 파병됐다가 불명예 제대한 토마스가 새 일꾼으로 나타나고, 옐라에겐 (전 남편이 파산하기 전처럼) 능력 있고 자신감 있고 그녀를 인정해 주고 그녀만을 아끼는 새로운 사업가 남성 필립이 나타나 새로운 일과 인생을 선물하려 한다.



구원자였던 남성으로부터의 탈출을 돕는 새로운 구원자(를 자처하지만 사실 전혀 도움은 안 되는) 남성, 그리고 예견된 실패.

반복되는 역사를 겪는 두 여자 중 누구의 삶이 더 기구하고 피폐한가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로라가 알리에게 폭행당하고 토마스의 무모한 계획과 폭력적인 침입에 노출될 때, 옐라는 아예 그 모든 탈주와 변신과 빛나는 새 희망이 죽음 직전 찰나의 마지막 발화와도 같았단 사실이 밝혀지니까. 기실 옐라의 꿈이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는 '능력 있는 남자의 사랑'보다도 '능력 있는 남자의 인정' 쪽이었다는 점이 더 안쓰럽다.


옐라의 파산한 전 남편 벤이 오프닝부터 위협하며 소리 질렀듯, 옐라는 '예쁜' 얼굴과 다리를 내놓고 남성의 환심을 사 '예쁜' 보조가 되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그의 미모는 자원이 되고, 이를 마음껏 소장하고 활용하고 탈취하며 자랑으로 여겼던 남자들은 성적/육체적 매력을 제공한(사실상 착취당한) 옐라에게 등가교환으로 보상할 방법(주로 경제적 부)을 상실한 순간부터 자격지심에 절어 한때 찬미했던 그녀의 자원을 마구 깎아내리며 집착한다. 애초에 옐라는 그런 방식으로 욕망당하기를 원치 않았는데도. 벤, 슈미트-오트 박사, 필립까지 옐라와 엮인 모든 남성들이 개인적 선함이나 인성과 무관하게 이 전형적인 남성 포식자-여성 피식자의 굴레 안으로 포섭되고 만다. 이윽고 이어지는 옐라의 유망한 미래 -에 대한 환시 -는 옐라가 그간 그 미모를 제외한 자신의 능력만으로, 전문직 남성들의 세계에서 추방되거나 눈요깃감으로 전락하는 일 없이,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으로서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왔단 사실을 명확히 나타낸다. 그래서 옐라의 환상은 트로피 와이프, 가정의 천사라는 수식에서 말 그대로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벗어나려던 이등 시민의 투쟁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하나 더 흥미로운 지점을 꼽아보자면, 옐라는 그렇게 알파걸이 되고 싶어 하는 동시에 '속물적이지 않은' 자기 자신, 돈과 무관한 순정, 즉 시쳇말로 '개념녀다운' 애정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이건 (옐라 자신도 그렇게 말했듯) 전 남편 벤이 파산해 사업적 위기를 겪자 마음이 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난 그래선 안 될 이유가 또 뭔가 싶다.

'자원'을 잃은 연인이라서가 아니라, 가난해졌기 때문에 곁의 여자를 잃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극도로 초조해져 인격도 망가지고 언행과 매너도 바닥으로 떨어진 연인을, 단지 가엽다는 이유로 옛날과 같은 온도로 사랑해 주는 것이 솔직히 가능한가. 옐라의 죄책감과 자괴감은 배경 없는 여성이 성공한 남성을 잡아 신세 핀다는 허구의 신데렐라 신화, 그리고 그 '신세 피는' 목적이 좌절됐을 때 실패한 남성을 떠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세간의 가혹한 평가를 내재화한 결과물이다. 옐라가 증언했듯 벤 역시 열심히 그녀를 가스라이팅하며 그렇게 믿게 만들기도 했고.

그래서 새 애인 필립이 '내가 실패할 것 같으니 어서 나를 떠나라'고 부드럽게 종용했을 때, 옐라는 (벤을 무참히 떠났듯이) 그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를 외며 그의 누운 몸 위로 엎어진다. 이어서 필립 몰래 그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군텐 박사를 찾아가 냉정한 해결사의 면모를 자랑하기도 한다.


연인이 추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는 의리와 애착. 연인을 위해 그 어떤 궂은일이라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각오. 옐라는 그런 단단하고 드문 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기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시골구석에 유폐되다시피 한 로라의 처지는 어쩌면 고향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기 전까지의 옐라와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가진 돈도 없고, 전과자 신분에다, 도와줄 친지도 없어 체념한 채 터키인 남편의 거래대금 중 푼돈을 빼돌리는 것으로 무용한 자위만 일삼던 로라에게는 살짝 미끄러졌지만 여전히 건재한 정상성을 갖는 토마스의 존재가 무척 귀중하다. "날 원치 않는 나라에서 돈으로 여자를 사는 처지"라고 정확하게 자조했던 남편 알리와 달리, 토마스는 불명예 제대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순혈 게르만 백인 / 노동자 / 전직 군인 / 비장애 남성으로서 이방인 알리를 한참 압도한다. 그는 실패했고 가난하고 무지하지만 어쨌든 그 결핍에 걸맞은 충정을 다해 로라를 사랑한다. 로라는 그녀에게 사랑의 도주를 약속했던 남자들과 토마스의 무능함이 사실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지만, 마지막 희망을 거는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숲속에서의 비밀스러운 손깍지는 페촐트식 로맨스릴러 중에서도 손에 꼽게 숨 막히는 장면이었다.)


심장발작을 겪는 알리를 보고 갈등하던 토마스가 결국 그를 살리면서 그들은 예견된 파국에 더욱 가까워진다. "알리가 죽게 내버려 두지. 죽게 내버려 두지..."라며 반만 진심인 말을 슬프게 중얼거리는 로라, "돈 없으면 사랑도 못 해. 내가 아는 진리는 그것뿐이야."라고 울부짖는 로라는 너무나 전형적인 노란장판 히로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로지 멜로이기만 한' 페촐트의 멜로는 이런 식이구나 싶어 당황스러울 정도.


결국 로라는 자기가 시한부임을 고백하는 알리에게 진심으로 연민을 느끼면서, 동시에 알리의 약속으로 인해 완전한 자유에 거의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런 해피엔딩을 허락지 않고 고집스럽게 그리스 비극을 닮은 비장한 멜로의 장르에 남아있는 것이 페촐트의 매력일 것이다. 만일 그때 알리의 계획대로 로라에게 사업 소유권을 모두 넘기고 빚을 청산해주고 로라는 알리를 간호하다가 조용히 알리의 임종을 맞았다면. 만일 풀숲에 숨었다가 도망친 토마스의 소지품을 알리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전에 알리가 내밀한 대화를 하며 토마스에게 인간적인 신뢰를 갖게 되지 않았더라면. ... 수많은 if only 때문에 남은 자건 떠난 자건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건 통증이 더 거세진다. 특히 로라는 신분의 자유뿐 아니라 알리에게 최선을 다했고 그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다는 감정적 해방감까지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알리가 '하필' 토마스와 로라가 공모했던 살해 방식대로 자살하게 되면서 페촐트의 비극은 극도의 고전미를 확보한다.



<바바라>나 <피닉스>부터 <운디네>에 이르기까지 페촐트의 베를린/독일사에 대한 관념적 이미지들이 주로 물건의 파열 혹은 손상, 고장을 통해 은유되었다면(<바바라>의 커피잔과 피아노나 <운디네>의 수조와 잠수사 미니어처 등), <옐라>와 <열망>에서는 훨씬 직접적인 고성과 학대, 폭력으로 나타난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아직 다 정제되지 않았던 페촐트 세계관에서 독일 시민사회의 불안이란 사람의 신체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으로, 피해자(여성)의 불안한 눈빛으로 표현됐구나 싶었다.


하지만 옐라와 로라의 무기력한 체념을, 오로지 꿈에만 머물 수 있었던 헛된 소망을, 결국 남자를 배신하고 이용하고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삼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었던 소박한 야심은 수동성과 피해자성으로만 명명되어선 안 될 것 같다.

페촐트는 분명 상실과 혼란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신체, 특히 여성 신체에 투사해 그려내길 좋아하는 감독이다. 그가 때론 불편한 수준의 데이트 폭력, 혹은 경미한 수준의 신체 훼손을 활용해 고난받는 여성을 거시사의 장場으로 삼는 것도 사실이다. <옐라>와 <열망>에서는 그 활용의 고리가 미약하고 '역사 3부작'이나 '베를린 3부작'이 드러낸 뚜렷한 목적성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보니 '그래야만 했는가'의 당위와 관련한 비판을 더더욱 피하기 힘들긴 하겠지만.

'페촐트의 초기작에서 여성 주인공은 맞거나 맞을 것을 두려워하거나 두려워하다 죽기만 한다'라고 - 아니 물론 쓰고 보니 이게 사실적 사실이긴 한데... - 평면적으로 이해하기보단, 옐라와 로라의 시선에서 페촐트 후기작의 여성 주인공들이 보다 의지적으로 주시하는 방향의 흔적을 읽어내보고 싶다는 뜻이다. 옐라와 로라의 응시. 때로는 다 산 것처럼 망연하고, 때로는 칼날같이 시퍼렇고, 언제나 그 어떤 남성보다도 이지와 투지에 가득 차 있는 응시.



남은 트리비아:


토마스의 모친상으로 영화가 시작되고(전통/성장기의 상실), 그의 고용주 알리가 대립하고 감시하는 업자들은 중국계 이주민들이고(인종적 이등 시민 간의 경합), 알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영화가 끝난다는 점도(아랍의 축출) 2차 세계대전과 통독 이후부터 지속된 독일 시민사회의 혼란하고 각박한 면면을 은유하는 듯해 흥미롭게 봤다.


마지막으로 재미있었던 건 <내가 속한 나라>의 도망치는 정치범 엄마 클라라를 연기한 배우 바바라 오어가 <옐라>에서는 성공한 이학 박사 군텐의 우아한 아내로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막 도시에 도착한 (환상 속의) 옐라는 군텐 부부의 집을 지나가며 그들의 부와 안온함을 질투라도 하는 듯 끈덕지고 기묘한 시선을 던지는데, 가족 중 유일하게 옐라를 발견한 군텐 부인이 그를 뚫어져라 마주 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알아본' 여자와 그런 그를 알아본 또 다른 여자. 한편으로는 클라라가 한스와 이념을 좇아 클라우스를 떠나지 않았다면 클라우스의 강인하고 부유한 그늘 하에서 잔을 낳고 그런 가정을 이루었겠구나 싶어서 상상의 여지가 있는 점도 재미있었다. 페촐트처럼 같은 배우 돌려돌려 돌림판으로 쓰는 감독만의 매력이 이런 데에 있는 건가 보다... (이전까진 그런 선택의 장점을 잘 몰랐지만 이제 납득)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속한 나라>, 페촐트의 어른됨과 아이됨 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