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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Sep 29. 2021

<바바라>,
페촐트의 어른됨과 아이됨 ①


가을을 맞아 에무시네마와 라이카시네마, 심지어는 CGV아트하우스에서도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전을 열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작년 개봉한 <트랜짓>과 <운디네>로 저력을 입증한 감독이고 나처럼 두 작품으로 팬이 된 사람도 많지만, CGV에서도 미니 기획전을 할 정도로 티켓 파워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좀 놀랐다. 역시 재미있는 작품은 사람들이 못 알아볼 리 없다!


아무튼 그 덕분에 이번 달 중순부터 엄청나게 바쁘게 영화 보러 다녔다. 퇴근하고 광화문으로 가고 주말 아침부터 연희동 가고 영화제처럼 택시 타고 다니면서 하루에 두세 작품씩 보고. 저번 주말에 드디어 국내 상영되는 7개작을 다 보면서 일단 마침표를 찍었는데, 남은 시간 동안 <운디네>나 <열망>을 한 번 더 볼까 고민 중이다. 이번에는 페촐트 작품 중 네 번째, 다섯 번째로 관람한 <바바라>와 <내가 속한 나라>를 엮어 리뷰하려고 한다. 단지 관람 순서 때문이 아니라, 11년의 격차를 두고 세상에 나온 두 영화에서 페촐트가 '(억압된 체제 하의) 어른됨과 아이됨'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담지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페촐트는 역사성과 공간성에 투철한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직접 이름 붙인 소제 '역사 3부작' '베를린 3부작' 등에 따라 분류되어 유기성을 갖는데, 이렇게 작품들 사이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한 번 더 부여함으로써 페촐트는 자신이 줄곧 몰입해온 주제의식을 단 한 편에서도 누락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는 듯하다.

그의 세심한 명명에 따르면 <바바라>는 '억압된 시대의 사랑' 3부작 중 첫 작이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거나 최소한 거기서 출발해 시간 구성을 흐트러뜨리는 <피닉스>, <트랜짓>과 달리 <바바라>는 냉전시대 동독(만)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첫 장면부터 명확하게 박제해둔다. 그러나 페촐트의 관심은 이미 종식된 특정 시대, 체제, 정권의 폭력을 비판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는 체제의 과도한 권력이 개인의 삶을 침범할 때 인간의 삶이 어떻게 인간 이하의 것으로 떨어지는지 보편적 비극을 먼저 보여주고, 그런 개인을 다른 개인(들)이 도와 존재론적 구원을 이룬다는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결국 사랑이 답'이 된다는, 지극히 페촐트다운 멜로다. 그러나 <바바라>에서 페촐트의 멜로는 이성 간의 에로스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대 간의/공동체 내의 연대라는 아가페로까지 뻗어나간다.


분단 하에서 서독의 애인과 함께 하기 위해 출국 신청서를 냈다가 유망한 커리어와 운신의 자유를 모두 잃은 바바라가 '스스로를 남들과 너무 분리시키지 말라'는 안드레의 충고에서 '분리'라는 단어만을 예민하게 캐치하는 반응, 난데없이 울리는 초인종과 전화벨과 쾅쾅 큰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들에 고통받고 불청객에 시달리는 모습, 안드레가 건네준 커피잔을 떨어뜨려 산산이 깨뜨리는 장면 등이 은유하는 바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운디네>와 <피닉스>에서처럼 소음과 파쇄, 망가짐과 찢김의 이미지가 영화 내내 반복되는데 이 이미지들은 명확하게 바바라가 시대적·정치적 폭력의 피해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되는 안드레는 (그런 폭력적 체제 하에서의) 이미 실패했거나 실패할 것이 뻔한 사랑을 상징한다고 거칠게 말할 수도 있다. 안드레가 바바라에게 선물한 책 『지역 의사』에는 아픈 소녀가 죽은 후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늙고 못생긴 의사가 등장하는데, 그 의사가 바로 "소녀가 영영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대리인"이었음을 설명하는 안드레는 아마도 자신의 사랑이 어떻게 끝맺음(당)할지를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동독 바깥의 삶(에 대한 구체적 상상), 서독의 애인, 시골 병원이 아닌 베를린 대형병원에서의 직장생활을 가져봤기에 상실과 추락에서 더 큰 절망을 느끼는 바바라 볼프와 달리, 안드레 라이저는 원래부터 그 세계에 속했던 사람 - 인 데다가 성공한 알파메일 -의 여유와 부드러운 친화력을 보인다. 다른 세계를 알지만 건너가는 것을 금지당한 사람의 조바심과 냉랭함이 안드레의 여유와 대비되며 '아는 자' 바바라의 불행이 강조된다.



그러나 안드레의 여유도 실은 얼마나 체념적인 것인지. 그가 에벤발더 병원(지명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그 지역에서 '유학'했다고 말하는 순간 바바라의 놀라는 반응으로 말미암아 보건대 그도 '동독 바깥'의 삶을 알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에서의 의료 사고를 겪은 후부터 자포자기적 심정으로 살아왔다는 걸 관객에게 알리는 그 순간, 바바라-안드레 둘의 위계는 전복된다. 늘 살피고 불안해하고 호의를 내치던 바바라가 태도를 바꾸기 때문이 아니라, 동독의 결핍 없고 건재하던 권위, 유화적 헤게모니를 표상하는 줄 알았던 안드레가 그 후부터 더 노골적으로 바바라의 눈치를 살피고 납작 엎드려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애정에는 약간 기묘한 이면이 있다. 바바라는 물론 아름답고 신비한 여인이지만, 자신만이 그녀의 사연을 다 안다는 점에서 관계의 매력을 더 크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안드레 자체가 원체 헌신적이고 자상한 사람이라지만, … 온갖 이유를 다 붙여봐도 위화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안드레의 이면을 들추면 드러나는 결핍은 너무 투명해서 관객이 구태여 노력해 찾을 필요조차 없다.


그 결핍은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 보이는 안드레가 사실 가장 비인간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역설에서 온다. 병원에 온갖 장비를 반입해 개인 연구실을 꾸리고 좋은 집을 외국의 서적과 허브로 채운 안드레의 세계는 얼핏 보기엔 완벽한 궁궐이지만, 실은 탈출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자의 포기와 절망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스텔라와 마리오, 마이크와 제니퍼 같은 소아 환자들에게 물론 진심으로 헌신하고 있지만 동시에 동독 경찰 간부 클라우스의 아내 프리델을 진료하는 일에도 진심인 그. "나쁜 사람들도 도와요?"라는, 바바라 자신도 뱉는 순간부터 과하게 이념적이라 유치하게 들릴까 후회했을 질문에 안드레는 "그 사람들이 아플 땐 돕죠"라고 선인의 정석 같은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하지만 과연 그는 자기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을까. 스스로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질병/환자/나약함 앞에 선악 없다'라는 가상의 정언명령을 설정하고 그에 몰두한 건 아닐까 의심이 든다.


그건 바바라의 직설적인 질문에 대한 어긋난 답변이었다. 안드레는 분명 회피하고 있었다. 말기 암 환자인 아내에게 다가오는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약해진 클라우스는 물론 생물학적인 고통 앞에서야 바바라와 안드레처럼 '한낱 인간'이지만, 동시에 바바라를 압제하는 국가권력의 첨단에 선 사람이기도 하다. 단지 출국 신청서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테러범 취급받으며 집 안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바바라를 직접 심문하고 몰아붙인 경찰이 바로 클라우스다. 알몸 수색당하는 수치심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 바바라가 단 한 번 '제발'이라며 애원해도 명령과 원칙에 충실한 클라우스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갈 때마다 앓아눕고 괴로워하는 바바라를 직접 봤으면서도, 체제가 초래한 바바라의 고통과 몹시 개인적인 클라우스의 고통을 동일선 상에 두는 안드레는 역설적으로 아주 기계적인 인류애, 다시 말해 신적인 사랑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통의 원인이나 총량 혹은 지속성을 기준으로 고통을 평가하지 않고 오로지 고통의 유무 여부만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런 그와 죄지은 자는 자신 앞에서 모두 평등하게 속죄의 권리를 받는다던 예수 사이에는 (표면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예수가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를 자유로이 오갈 수는 있어도, 한낱 인간이 영속적으로 예수의 태도를 견지할 수는 없다. 그 점이 예수적 사랑을 흉내 내는 안드레의 친절과 헌신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를 고발한다.


예수가 고통의 유무 여부로 사람을 가린다면 그건 그가 그만한 이해심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가 그렇게 한다면 그건 고통의 나머지 측면, 더 섬세하고 복잡한 사고를 필요로 하는 측면, 즉 고통의 근원이나 총량을 비교하는 작업을 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를 시도했다간 클라우스를 악인으로 규정해 돕지 않아야 하고, 바바라의 냉랭함을 이해해야 하고, 마리오와 스텔라를 비롯한 무고한 어린애들을 당장 동독에서 탈출시켜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미 너무 많이 포기했고 너무 지쳐있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은 선악 구분 없이 모두 내 환자'라는 그의 원칙은 실상 질병과 고통을 겪는 사람/겪지 않는 사람이라는, 대단히 간명한 신체적 표상만을 기준 삼아 사고하고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한 사고는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 중 그가 가장 비인간적이고 가장 감정 없는 존재다. 어쩌면 클라우스보다도 더. 바바라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는 억눌렸던 내면의 '인간'을 다시 발견하고, 욕심 내게 되고, 끊임없이 도망치려 하는 바바라를 잡지 못할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하게 된다. 결국 바바라의 방에서 그 주인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눈물이 터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바라의 벽 쌓은 냉철함이 안드레가 세상과 안드레 자신을 대하는 태도보다 더 솔직하거나 성숙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바바라라는 영화적 인물은 태생부터 분리, 은폐, 감시, 추방에 모티프를 둔 존재다. 그는 분리당하고 은폐당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하고 은폐한다.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게 아니다. 그 역시 현 상태에서 도망가고 싶어 할 뿐이다.


생사를 걸고 탈출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연인들, 요르와 바바라, 게르트와 스테피는 이 영화의 멜로를 이루는 기둥이다. 그 넷은 그 자체로 동서 분단 비극의 증거이자 예고된 결말을 상징하는 커플들이다. 좋은 차를 타고 양복을 빼입고 초콜릿과 커피와 담배 따위를 가져다주는 서독의 '남자들'과 그들의 구원을 기다리고 철저히 이용하려 들기도 하는 '여자들'의 대비. 바바라는 서독의 애인 요르가 "동독에 와서 함께 살 수도 있어, 그런 사람들도 있어"라고 말하자마자 그 주장 자체를 강력히 부인하고 화낸다. '너만 있다면 어디든 행복할 거야'를 외는 애인에게 '아무리 너와 함께라 해도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다'고 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공간이 중요하다고 믿는, 그렇게 믿게 만드는 이념적 시공간 안에 살고 있는 바바라는 요르가 탈출책을 제안하자 떨떠름한 말투로 '이번 주말에 바로?'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그것도 사랑하는 애인이 직접 물어다 주었는데도, 뛸 듯이 기뻐하지 않는 바바라의 묘한 태도는 어디서 연유한 걸까. 제안이 그저 갑작스럽기만 해서 놀란 게 아니라, '진짜로' 탈출할 수 있게 되리라는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바바라는 그렇게 '진짜로'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아서 더 쉽게 탈출을 얘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요르는 그것을 몰랐을 테고, 바바라 자신도 바로 그 방에서 처음 알게 됐을 테다.


그래서 게르트와 스테피 커플을 목격하는 일이 바바라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게르트와 스테피 역시 똑같이 서독에서 온 남자 - 동독에 사는 여자의 만남이지만 오래전부터 연인이었던 요르 - 바바라와는 사뭇 다른 열정적 에로스 관계를 형성한다. 서독에서 온 물건들을 훔쳐보고 몰래 냄새를 맡고, 남자에게서 미리 선물을 받아놔야 둘의 마음이 편해진다고 멋모르고 조언하는 스테피는 전형적인 목적 추구형의 교활한 여자 친구 롤을 맡는다. "그 사람이 날 사랑한대요… 내가 그와 결혼하면 동독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스테피에게서 날것의 욕망을 생생히 감각하면서, 바바라는 자신이 탈출하고 싶어 한다고 믿어왔던 시절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자신은 스테피만큼 강렬하게 '동독을 벗어나 서독에 가고 싶다'고 생각해온 게 아니라, 단지 동독에서 느끼는 공포와 환멸과 권태와 억울함과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동독에서도 공포와 환멸과 권태를 느끼지 않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느끼는 자신을 깨부순다면, 그리하여 뭔가 다른 것이 되거나 자기 존재를 조용히 지운 채 없어질 수만 있다면, 바바라는 동독에서도 충분히 잘 살 수도 있다는 암시다.


요르: 게르트에게 애인이 생겼어.     

바바라: 서독으로 가고 싶은 여자겠지.     

요르: 게르트는 그 여자를 사랑한대.     

바바라: 자길 따라올 수 없는 여자니까 그렇겠지.


옆방의 친구들이 시끄럽게 관계를 맺는 소리를 듣고 키득이며 연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바바라는 무심결에 '따라올 수 없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건 그녀가 자신의 '따라갈 수 없음', 즉 묶여 있는 상태를 인정한다는 뜻이고 동시에 자신이 속한/속할 곳은 언제까지나 동독이라는 경계 안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르의 사랑마저 '바바라가 그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즉 서독의 남자에게 거의 무한한 자유를 부여하고 시혜자가 될 수 있는 위계성까지 허용하는 동독의 여자이기 때문에 지속된다는 듯이 말해버린 순간. 사실 요르와 바바라의 관계는 이 시점에 이미 남모를 권태와 타성에 젖을 대로 젖은 연애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둘은 끝을 알았지만, 책임감과 그리움에 너무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 바바라가 결국 동독을 떠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도 그 순간부터 예견된 결말이었다.





이렇듯 영화는 억압된 사랑과 예고된 비극을 그리는 페촐트의 훌륭한 멜로드라마였다. 하지만 내겐 무엇보다도 그 분리 자체에 짓눌린 어른들이 다음 세대를 구하는 이야기로 보였다.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한 두 청소년이 있었다. 임신한 채로 토르가우 작업소에서 네 번째로 도망친 스텔라와, 여자 친구 앤지에게 배신당했다고 오해해 자살 시도 후 감정을 잃은 마리오. 심하게 찢기고 다친 아이들의 형상은 안드레가 언급한 에벤발더 병원에서의 마이크와 제니퍼를 연상시킨다. 기기 작동 시 화씨와 섭씨를 혼동한 의사의 실수로 망막이 녹아 앞을 볼 수 없게 된 한 쌍의 신생아들. 다가올 세계를 평생 볼 수 없는 - 즉 미래가 없는 아담과 이브는 안드레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고 그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도 알 수 없지만(일단 마이크-제니퍼라는 이름 자체가 지나치게 미국적이다. 어쩌면 그들은 '바깥'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안드레의 공포의 근원이 아니라, 그 공포가 투사된 결과물로서의 내러티브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에 존재하는 스텔라와 마리오는 실제로 엄청난 실존의 위기에 처한 한 쌍이다.

사실상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억압된 시대 와중에 태어나 다른 세계를 겪어본 적조차 없는 아이들. 어른들은 다친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서로에겐 보여주지 않던 친절을 아이들에겐 아낌없이 나눠주고, 결국 자기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아이들에게 자기가 가장 갈망하던 것을 선사한다. 스텔라에게 바바라가 탈출과 자유를. 마리오에게 안드레가 생생한 감정과 그를 사랑하는 애인을 말이다.


바바라와 안드레 두 어른들은 동독의 억압과 강제성에 짓눌린 게 아니라 분리 그 자체에 질려있다. 특정 이념이나 이념 간 갈등이 아닌 이념의 존재 자체에 질려있다.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비극이 아니라 자유를 갈망해야만 하는 비극이 그들을 짓누른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운명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어른들은 자기 몫을, 남은 인생 전부를, 가장 강렬한 (그렇다고 믿은) 욕망을 포기하면서 아이들을 구출한다. 사실 또다시 도망쳐 바바라의 집 앞까지 찾아온 스텔라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진정제만 투여해 재워놓고 혼자 도망쳤다면, 바바라는 덴마크에서 요르와 재회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바바라는 그러지 못했다. 마리오의 급한 수술을 미루고 바바라를 만나러 갔다면 안드레는 분명 바바라를 검거해 자기 옆에 강제로 묶어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그러지 않은 건 바바라를 믿었거나 그녀가 탈출해서라도 행복해지길 바랄 정도로 이타적인 사랑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리오를 모른 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거나 마땅히 바라야 하는 것을 너무 일찍, 너무 은밀히 포기함으로써 어른됨에서 비껴서 있던 정신적 미숙아들은 그렇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책임져야 할 후세대를 자신이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책임지면서. 어른 되기에서 영원히 도망 다닐 수는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이건 바바라-요르(분리된 연인들), 바바라-안드레(체제의 폭력 하에 함께 놓여있는 연인들)의 사랑뿐 아니라 바바라와 안드레의 스텔라와 마리오를 향한 사랑을 그리는 멜로이고, 동시에 개인의 어른됨을 영원히 유예시키려는 권력 하에서 서로를 도우며 훌륭히 어른됨에 도달하는 사람들의 성장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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