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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Sep 29. 2021

<피닉스>,
불을 켜도 보이지 않는 얼굴



올해 상반기에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를 개봉 역순으로 세 편 보았다. 어느새 제일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라고 말할 정도로 정들었지만 <운디네>와 <트랜짓>의 폴라 베어 이전에 니나 호스가 5편이나 함께 작업했다는 건 처음 알았다. 2014년작 <피닉스>에 관해 빈약한 내 배경지식으로 해석한 부분들은 이미 김병규 평론가의 완벽한 해제에서 다 다뤄졌고, 특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몇몇 부분들만 남겨두려고 한다.



1. 조니-요하네스를 찾으러 간 미군 클럽 '피닉스'에서 공연된 '불을 켜고 누가 있는지 봐야' 한다던 노래와

불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조니를 찾았다고 레네에게 털어놓던 넬리.

"Come, turn on the lights so we can see what there is to see!

Come, turn on the lights and don't say another word.

Come, turn on the lights, so we can see for sure what the big deal is: Berlin in lights! "

Kurt Weill - Berlin im Licht 영문 가사 중


2. 레네의 존재 그 자체. 레네는 자살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극렬 시오니스트가 돼 있었을 거다...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했었지. 하지만 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어.

나는 삶보다 죽음을 가까이 느껴."

과연 비장미 넘친다. 민족을 위해 나라를 세우려던 사람에겐, 명분과 신의와 의무의 무게를 알던 레네 같은 사람에겐 그런 결말만이 합당하고도 당연한 귀결이다. 빈터라는 성이 실은 Winter의 독일 발음이었음을 깨달은 순간까지 꾸준히 전율만 주고 떠난 사람.


3. 시뮬라크르와 이데아

고문 후 복원으로 이전의 얼굴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었고 정신은 문드러졌기 때문에 넬리는 이데아가 될 수 없고, 더 이상/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원본이기에 시뮬라크르도 될 수 없다. 원본이지만 원본이 아닌 존재.

유일한 증인 레네가 없어져 존재의 동일성(연속성?)을 증명할 수 없어진 넬리를 보며 내가 다 막막하고 초조해졌다.

그래서 권총으로 동반 자살, 권총으로 조니를 죽이고 홀연히 사라지기, 권총으로 혼자 자살… 이런 결말들만을 상상했는데, 셋 중 무엇도 아닌 우아한 퇴장을 선택한 넬리-에스더.


3-1. 그런 넬리가 전쟁 전 가장 좋아했다던 (잡지 표지인물로 등장한) 배우는 헤디 라마.

<밤쉘>을 보며 추체험한 그의 고독함과, 수용소에서 막 벗어난 사람은 빨간 원피스를 차려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줄 사람이 더는 없는 유대계 생존자 넬리의 고립감을 같이 떠올려본다.

니나 호스는 넬리의 고독함을 연기하기 위해 매번 촬영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시간을 30분 이상 가졌다고 한다.


4. 페촐트의 작품에 꾸준히 등장하는 두 개의 이름과 오해들. 한 사람에게 덧씌워진 두 개의 정체성.

넬리-에스더(피닉스), 바이델-게오르그(트랜짓), 인간성을 가진 여신이었던 운디네(운디네)까지.

어쩌면 넬리를 사랑했고, 넬리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수용소에서도 그의 생각만으로 버틸 정도로 사랑했던, 전쟁 전의 피아니스트 조니와 - 결국 넬리를 배신하고 만, 그러도고 꾸역꾸역 오랜 세월을 살아온 전후의 클럽 일꾼 요하네스도 그렇게 '분리된' 두 사람의 억지 봉합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5. 너무나 굳은 믿음, 오해에 대한 페촐트의 집착적 연출.

<피닉스>에서 넬리가 자기 글씨를 똑같이 쓰는 걸 보고도 조니는 미처 에스더가 넬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부인이 이미 죽었다고 너무도 확고히 믿었기 때문에. (그때 조니의 놀란 기색을 보며 뭔가 알아채주려나 기대하곤 살짝 올라갔던 넬리의 입꼬리가, 조니의 둔한 평가에 곧바로 처지던 표정 연기란.)

<트랜짓>에서도 마리는 모두가 죽었을 거라고 예감하는 남편 바이델의 죽음을 믿지 않았기에, 그가 반드시 어디엔가 살아서 자신과의 재결합을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고집스레 믿었기에 게오르그를 남편으로 착각하고 망명의 특권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운디네>에서 그만치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운디네 그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신성을 믿고 그에 저주처럼 따라붙은 비극적 운명을 믿기에, 배신한 연인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차례로 죽여오다가 마지막 사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살육의 굴레를 끊는다.


그래서 페촐트의 인물들이란, 머리로는 어떤 것이 답인지 알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지만 마음이 안 따라주는 사람들...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피닉스>까지 보고 나니 어쩌면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속도와 방향의 불일치 자체를 아름답게 소화할 수 있는 드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극을 비극이 아니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


넬리는 엔딩 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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