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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ug 28. 2022

<실종>과 <큐어>,
어설펐던 불온이 세대를 건너오다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 1996 & <실종> 가타야마 신조, 2022


"누가 나에게 '현대사회 인간들의 삶이 어떤 거냐'고 물으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을 보라고 말하겠다."

박찬욱 감독이 구로사와 기요시에 관해 남긴 평이나, 봉준호의 작품 세계 구축에 기요시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일 테다. 일본의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까지 최근 동아시아 영화 산업을 견인하는 감독들은 죄다 매료시킨 듯한 1955년생의 구로사와 기요시가 지난 40년간 국제 영화사에 남긴 것은 분명 혁혁하고 독특한 유산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자꾸만 묻고 싶어졌다. 정말... 이게 다입니까?


존경하는 평론가 선생님이 여러 번 강조했다시피 영화는 인연이다. 남들이 걸작이라 상찬한 영화가 구미에 맞지 않는 일도 있을 수 있고,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감독의 특정한 작품 세계가 자꾸만 세간의 평가와 나의 평가를 아주 엇갈리게 한다면 그건 마음에 걸리는 일일 수밖에 없다. <스파이의 아내>로 이미 한 번 대차게 실망했고, 무려 '로망 포르노' '핑크 영화'로 데뷔했다는 걸 알아버려 아주 호의적일 순 없었던 첫인상으로 마주했던 구로사와 기요시. 그의 2008년작 <도쿄 소나타>는 분명 (신기하게도 최근작보다 나은) 연륜과 섬뜩한 포착력을 자랑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은 아니었다.

아마 그런 어긋남은 그의 작품이 '예상보다 훨씬 더' 극찬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 아무 예고도 없이 그 어떤 사전 정보도 듣지 않고 관람했다면 나는 분명 <스파이의 아내>와 <도쿄 소나타>는 꽤 잘 만든 영화로, 어쩌면 정말 좋은 영화로 평가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그간 국제 무대에서 수상해온 내역과 덧붙여진 찬사들의 수준을 고려하면, '... 정말?' 싶어지는 것이다.




다행히도 1996년작 <큐어>는 처음으로 재미를 느낀 기요시 영화다. 어쩌면 구로사와 기요시는 모르는 시대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보다는 자기가 잘 아는, 푹 젖은 채 살아가는 동시대적 정서에 대한 묘사에 더 탁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웰메이드 호러 스릴러는 소란함으로, 빛과 물의 이미지로, 그리고 인지적 혼란으로 영화 속 인물과 스크린 바깥의 관객을 동시에 매혹하고 혼란을 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윤리관과 불일치하는 세상의 범죄를 혐오하는 형사 vs 사람들을 현혹시켜 무차별 살인 테러를 벌이는 신원미상의 젊은 남자의 도식적 대치는 현대의 눈으로 본다면 클리셰지만, 이 작품의 제작연도가 90년대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선구자적인 통찰이다.


타카베 형사가 딱 한순간 마주쳤던 세탁소의 남자를 생각해 보라. 양복을 입었던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끊임없이 특정인에 대한 욕설 섞인 저주를 내뱉는 광기를 보였는데, 세탁소 주인이 돌아오자 순식간에 ‘사회인’의 모습으로 변모해 마땅한 예의와 상식을 ‘연기’한다. 타카베가 그의 이중성을 목격하고 내비친 당혹감이 어쩌면 90년대 일본, 특히 도쿄에 떠돌던 불안과 공포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하철 사린 사건과 옴진리교의 성행,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 전력 공사 여직원 살인사건… 엽기적이고 잔혹한 범죄에 빈번히 노출되면서, 세기말을 살아가던 일본은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됐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저런 짓을 벌이는 저런 것을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나? 저런 것을, 저 행위의 동기를, 단 한순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면 그런 나를 인간으로 불러도 되나?


하지만 바뀐 세기를 사는 지금 여기의 인간들은 답을 알고 있다. 세탁소의 중얼거리는 남자에 대해 그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못했던 나부터도 그렇다. 겨우 저게 다인지, 겨우 저 시시한 광기가 이 영화의 첨단인지, 저런 어설픈 불온이 영화가 상정한 공포의 근원이었는지, 속으로 기요시를 다시 한번 비웃다가 상영관을 나오자마자 깨달았다. 저 시대에는 가장 미지의 영역에 있었던 이유 없는 광기, 남을 해치고 싶은 충동, 나에게 피해가 된다면 남을 해쳐도 좋다는 잔인한 결의 같은 것들이 이 시대에는 너무 당연하게 ‘인간다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당시에는 두렵고 끔찍했을 ‘일상 속의 비인간성’이 이젠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어설퍼 보였다는 깨달음.

그럼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공포를 공포로서 공유하는 사회와 그게 공포인 줄도 모르고 ‘인간이 원래 그렇다’를 말하는 사회 중 어느 것이 더 비인간적인가? 어떤 암묵적 합의가, 어떤 사례의 누적이, 어떤 것에 대한 익숙해짐과 무감해짐이 인류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꽤 매력적이라서 그냥 넘어가기 힘든 <큐어>의 인물 얘기를 조금만 더하자면, 타카베 형사는 자신과 세상을 가르는 명확한 경계선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에고를 지녔다. 그는 선량한 시민이자 좋은 남편이라는 롤을 스스로에게 부여해놓곤 압박을 느끼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다. 반면 그에게 잡혀온 ‘교주’ 마미야 쿠니히코는 속세의 식별자(이름, 주소, 나이, 직업…) 중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말 그대로 미상 혹은 미결의 영역에 있는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도 “이게… 나야?”라고 묻는다. 자신만의 신념과 도덕관이 명확해서 남들의 손을 통한 살인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으니까 사람을 죽인다.


물론 마미야는 살인교사 전에 앞서 “네 이야기를 들려줘”라고 요구하긴 하나, 그 요구가 경청이나 진정한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식적이다. 마미야가 그렇게 수집한 남들의 사연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완전히 그의 마음대로다. 그는 아주 작은 불만과 아주 사소한 불안도 무조건 증폭시킨다. 그는 필요하다면 한 사람의 역사 전체를 자기 프레임대로 왜곡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마음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고 끄집어내어 순수한 자신을 찾는 작업을 도와주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타인의 마음의 크기를 압도하는 증오를 심어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다.


마미야는 얼핏 너무나 확신 있게 자신과 타인(혹은 사회) 사이의 경계선을 유지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공기 중 바이러스처럼 오만데 퍼져 있고 쏟아지는 물처럼 막을 수 없는 ‘혼재’의 상태에 더 가깝다. 그의 신념이 인간을 설득하고 매혹시켰다고 말하기보단, 바이러스 같은 욕구가 그의 희생자들 - 창녀를 죽인 회사원, 부인을 죽인 초등 교사, 젊은 동료를 죽인 순경, 화장실의 행인을 죽인 여의사, 자기 자신을 죽인 사쿠마까지 감염시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즉 그는 재해처럼 나타나 감염시킬 숙주를 찾아다니는 비인간 ‘정념’의 형태였고, 보다 선명한 자아의식을 가진 ‘인간’ 타카베가 드디어 그를 닮아감으로써 그 정념의 숙주 - 달리 말해, 전도사-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타카베와 마미야의 첫 대화와 마지막 대화의 대조가 주는 울림이 깊었다. 취조 때 드디어 마주한 서로를 바라보며 타카베는 “이걸로 시작이군요. 당신이 누군지는 알게 됐으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씬에서 바닥에 쓰러진 마미야를 바라보며 타카베는 “이걸로 너도 끝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처음부터 서로를 전혀 몰랐을까. 끝이라고 해서 정말 마미야의 존재함이 끝난 것일까. 마미야라는 흐릿한 육체와 온전치 않아 보이는 정신. 그 미약한 경계 안에 간신히 담겼던 것들이 이제 타카베를 통해 도쿄 전체에 어떻게 폭발적으로 퍼져나갈지를 암시하는 엔딩씬으로서 우리는 도래한 미래를 마주한다. 90년대의 미래, 곧 현재다.


그런데 마미야의 원초성이나 무목적성은 현대의 관객이 이미 스크린 밖에서 목격한 특정한 범죄자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고 마치 교주라도 되는 것처럼 처신한다. 그가 연기하는 나른한 포식자 같은 여유가 사실 같잖고 허구적인 것임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사람을 죽일 의지와 힘이 있기에 위협적이다. 자신이 무언가 대단한 일을 이룩했고/하고 있고 그 일의 최종적 효용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하기까지 한단 믿음을 가졌지만, 실은 너무나 하찮은 사람이라서 오로지 인간의 법률과 도덕에 반하는 폭력의 수행으로써만 자기 존재를 내보일 수 있는 남성. 그야말로 인셀 범죄자, '외로운 늑대' 타입의 테러리스트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마미야가 상징하는 원초성이나 무지성은 2020년대의 가타야마 신조가 만든 <실종> (원제: さがす, ‘찾다’)에서 보다 명백히 인셀을 닮은 형태로 증명된다. 작품 내의 호러적 흐름을 주무르는 (것처럼 연출된) 젊은 범죄자 야마우치가 바로 그 특정한 (성별의) 불온의 증거다.


자신이 타인의 자살을 돕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야마우치 테루미는 불쌍한 타인뿐 아니라 자신까지 속이는 흔한 범죄자다. 그는 살인 그 자체를 즐기는 데다 특정한 이미지에 성적 쾌감을 느끼는 페티시가 있어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농락하기까지 하는 사이코패스지만, 삶의 끝자락까지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돕겠다’고 제안한다. 자신이 마치 싼 가격으로 봉사하는 것처럼 굳게 믿는 야마우치의 뻔뻔함이나 잔혹함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는 영화 속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갑자기 발생했고 원인을 모를’ 자연재해적, 고대 신화적 악의 상징성을 충실히 수행하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 사토시는 그가 화면에 등장한 시점의 자포자기적 상태에 도달한 배경이 좀 더 소상히 제시되어 관객의 동정심을 산다는 차이가 있다. 사토시는 탁구 선수였던 부인과 중학생 딸 카에데를 끔찍이 사랑했고 부인이 루게릭병으로 인해 거동도 불편한 환자가 되자 그녀를 극진히 돌보는 헌신적인 가장이었으나, 부인이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참다못해 야마우치를 고용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사토시는 자신이 두 사람을 남겨두고 떠난 탁구장에서 부인이 어떻게 고통스러워하고 공포스러워하며 죽음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는지, 야마우치가 그녀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고 통쾌해했는지는 목격하지 못했다. 즉 그것은 사실상 즉각적 의사 표현이 불가한 피해자를 희생시킨 야마우치-사토시 두 공범의 살인이었지만, 야마우치의 ‘유료 콘텐츠’ 운운하는 언술에 사토시가 넘어가는 순간 사토시에겐 그것이 살인이 아닌 것처럼 오인된 것이다.


그렇게 부인을 떠나보낸 사토시는 실의에 빠져 카에데에게 제대로 된 부모 노릇도 하지 못하는 한심하고 무능력한 가장으로 살아가다가(영화가 시작한 시점), 사토시를 다시 발견한 야마우치의 영입에 혹해 순순히 그를 따르게 된다. 야마우치와 사토시가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종의 서비스 업체 동료로서 일하게 되면서 죄를 쌓아갈수록, 살인을 행하는 야마우치보다 연락책인 사토시가 훨씬 고요하고 철저하게 관객의 불안을 돋우기 시작한다.

사토시는 자기 딸뻘인 자살 의뢰인의 짜증에도 쩔쩔맬 정도로 온순하고 상냥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후반부에는 의뢰인의 돈을 혼자 갖기 위해 야마우치 테루미를 죽이고 자해 자작극을 벌일 정도로 오싹한 구석이 있는 사람으로 완성된다. 또 그는 연쇄살인범 야마우치를 잡은 영웅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쉽게 벌었던 돈의 맛을 잊지 못해 새로운 자살 의뢰인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런 ‘악의 평범성’이야말로 현대적 악행의 특징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초라한 삶을 살던 사토시에게 동업을 빙자한 연쇄살인 제안이 일종의 갱생 기회로 보였다는 것부터가 아주 평범하고 보편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숨은 악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20년 전 <큐어>가 그려낸 범죄의 면면을 다시 가져와 비교해 보자면, 마미야와 야마우치에게는 악행의 즐거움만 있었고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뚜렷한 동기는 없었다. 그러나 앞선 둘의 악행이 타카베와 사토시에게 전이되는 순간,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한 괴로움과 함께 ‘죽여야만 한다’는 어설프고 불완전한 정언 명령이 더해진다.

일반인의 도덕관념 체계를 흉내 내어 자신의 순수한 즐거움을 덮어보려던 사이코패스 마미야나 야마우치와는 달리, 그들의 유지를 넘겨받은 일반인 타카베와 사토시의 살인 (교사 혹은 시도)에는 ‘이것이 도덕적으로 더 옳은 일’이라는 자기방어적 가치판단이 적용되어 있으므로 더욱 위험하고 불건전하다.


타카베에겐 정신병을 앓는 부인을 평생 돌봐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고, 사토시에겐 이미 죽은 부인이 남기고 간 딸의 장래를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는 핑계는 소용이 없다. 사토시와 같은 (경제적) 운명 공동체에 속했던 딸 카에데가 아버지와는 사뭇 다른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다.

<실종>은 똑부러진 카에데가 아버지의 범죄를 추적해 내 몰래 신고하고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는 엔딩을 맞음으로써 기적적인 교정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토시가 잡혀가고 나면 사실상 고아가 될 카에데의 앞날은 이미 영화 초반부의 선생님과 수녀원 원장이 직접 예고한 바 있으니, 카에데 역시 그 불행한 미래를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 애는 선의 편에 서기를 택한다. 그리하여 딸을 키우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자살 의뢰인들을 다시 찾아 나섰다는 사토시의 핑계는 갈 곳을 잃는다. 사토시는 딸에게 이해받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악을 행한 사람이 되어 단죄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최면이나 강박을 주된 설명 장치로 삼은 <큐어>에 비해 자본주의적 동기가 명확한 <실종>의 범죄들은 동시대인의 눈에 보다 익숙하고 논리적인 형태를 띠므로 더 편안한 영화다. 무지하리만큼 순진해서 악에 쉽게 동화된 사토시는, 사회적/도덕적 강박에 짓눌려 있던 자아의 폭력성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외부로 터져나간 타카베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공포를 선사하는 인물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1990년대에 고안했던 어설프고 신화적인 불온이 몇 세대를 건너오는 동안 ‘무지함이 곧 죄’라는 강력한 자본주의 레토릭을 만나 더 매력적으로 변모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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