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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Sep 24. 2022

<놉>, 우리 시대의 영웅

5  블랙 호러라는 낯선 장르를  반발 없이 한국 관객들의 뇌리에 이식한 데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조던 필은 이미 메타포와 프로파간다의 노련한 대가임을 입증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관객  절대 다수가 최근의 <인어공주> 실사화에서 흑인 배우 캐스팅을 두고 동심 파괴를 운운하며 ‘ 인어공주를 돌려달라라는 말로 몸소 자신의 무식함을 동네방네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처음 보는 흑인 감독이 인종차별이란 (평생 한국에서 주류 인종으로 살아온 사람들과는 전혀 관련 없을) 소재로  장편을 그만큼 흥행시킨  더더욱 놀라운 .

(첨언하자면, 최근의 인어공주 ‘논란’에서 가장 열심히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 중 우리 또래의 어린 여자들도 정말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로 막막해진다. 당신이 <고스트 버스터즈>의 2016 여자 버전 리부트에 대고 ‘내 어린 시절을 돌려달라’고 항의하고 배우들 커리어를 끊어놓으려 들던 열성적인 중년 인셀 레이시스트 백남들과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정녕 모르십니까 휴먼?)



그런 조던 필 감독이 또 한 번 풍부한 상징을 동원한 신작 <놉>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번에도 퍽 명확하다.

1.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서 잊혔던 ‘아무도 아닌 들을 다시 영화의 주인공으로 불러오겠다는 다짐.

2. 네가 스펙터클을 들여다보면, 스펙터클도 너를 들여다볼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

주인공 헤이우드 남매가 늘 스스로를 ‘인류 최초의 필름’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흑인 기수의 후손이라 소개하며,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에 말들을 공급하는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그 혈통을 무기 삼는다는 설정부터 이 메시지들이 단단히 엮여 있다. 전자의 다짐이 조던 필 자신의 소수자성에서 발원한 자연스러운 다짐이자 <겟 아웃>과 <어스>부터 이어진 세계관의 연장이라면, 후자의 경고는 조던 필이 새로이 드러낸 ‘창작자’로서의 자의식, 즉 영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애착과 닿아 있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메인스트림이  시점 최종적으로 도달해 있는 곳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마블과 놀란 등을 필두로  ‘스펙터클 향연이라고   있겠다. 점점  화려해지고,  커지고,  난폭해지는 스펙터클.

이를 경계하는 다른  편에서는 미국 영화의 원류인 서부극으로 돌아가보고자 하는 예술주의 감독들의 흐름 역시 뚜렷해지고 있다. 조던  역시  흐름에 동참하는데, 따지자면 그는 백인 남성들에 의해 승계되는 전통적인 가부장 서부극이 아니라 켈리 라이카트(퍼스트 카우) 제인 캠피온(파워 오브 도그) 따라 ‘소수자들에 의해 전유된서부극을 지향한다.


<>  호러의 근원인 ‘그것자체가 영화적 스펙터클에 대한 은유임은 자명하다. OJ 말마따나 ‘그것 엄청나게 크다. ‘그것 엄청나게 빠르다. ‘그것 탐욕스럽다. 오티스와 에메랄드 남매보다   앞서 ‘그것 목격한 리키 주프는 ‘뷰어라는 평범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끔찍한 고디 사건에서 유일하게 공격 받지 않은 생존자였던 아시안 주프는 스스로를 ‘선택 받은 라고 믿고 있었고, 자신이 고디와 통했듯 그것과도 통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이, 그것은 그냥 관찰자가 아니라 아주 공격적인 행위자였다. 그것을 처음 마주쳤을  식탁 밑에 숨은 엔젤이 ‘what’ 아닌 ‘who’라는 지칭을 쓰며(“Who the hell it is?”) 내지른 절규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통제할  없고, 살아숨쉬며,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본질은 쇼의 희생양이 되는 말이나 원숭이보단, 공포라는 스펙터클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쇼맨에  가깝다. 결국 쇼맨과 쇼맨의 대결이 일어나 나약하고 작은 인간-쇼맨 주프가 패하고, 주프는 그의 무모함의 대가로 비인간-쇼맨에 의해 처단된다.


그러나 조던 필의 세계관  징벌의 대상은 스펙터클을 통제할  있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 (감독, 작가, 배우, 어떤 역할이든 영화의 창작자) 국한되지 않는다. 스펙터클을 그저 쳐다본 사람들(영화의 관객) 역시 스펙터클에 잡아 먹혀 사라진다.


영화의 말미, 진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초기 카메라 렌즈와 닮은 네모난 입을 크게 벌리고 자기와 눈을 마주쳐오는 모든 것을 흡입한다. 입 속의 새로운 입이 번쩍 드러날 때마다 카메라 셔터음과 같은 소리가 울린다. 피와 살점이 난자한 그것의 내부, 호기심과 공포에 가득 차 스펙터클을 응시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한 사람들이 ‘소화’되는 끔찍한 괴성. 기괴한 고어의 이미지. 이 모든 것은 스펙터클에 사로잡힌 동시대인들의 종말, 그리고 그들과 공멸할 그의 소중한 영화들의 종말에 관한 조던 필의 잔혹하고 가차 없는 상상이다.



조던 필은  끔찍한 경고와 함께 영화 정신의 복원을 위한 (다소 뻔한) 희망적 대답을 제시하는데, 늙은 촬영감독 앤트가 가져온 수동식 필름 카메라와 OJ 가족처럼 키우는 말들이 그의 희망을 상징한다. 전기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그것 맞설 방법은 지독한 아날로그로의 회귀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생존하려면 회귀해야 한다’는 명령은 최근 영화계에 만연한 위기의 정서이자 거부감 없이 통용되는 대전제이기에 그다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조던 필의 영화가 특별해지는 지점은 그 회귀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수행되는지에 있다.


조던 필이 OJ뿐 아니라 말 ‘럭키’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 첫번째 지점이다.

인류 최초의 영화, 달리는 말과 기수를 담은 2초짜리 필름에서 잊힌 존재는(흑인으로 상상된) 기수뿐 아니라 말도 있었다. 익명의 기수와 익명의 말은 떼어놓을  없는 짝이었을 텐데 기수의 후손을 자처하는 에메랄드마저도 말의 이름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OJ 24시간  ‘그것 의해 죽을  했고 간신히 도망쳐놓고도, 말들에게 밥을 줘야 해서 ‘그것 서식지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horse people’ 속한다. 그리고 그렇게  번이나 구해낸 말이 결국 그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이자, 죽음까지 함께 각오하는 동반자가 된다.


엔딩씬에서 ‘저 멀리 너머(out yonder)’ 팻말 아래 환영처럼 서 있는 럭키와 OJ를 보고 전율을 느끼지 않기란 어렵다. 이 감동적인 서사는 영화 산업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아예 바깥으로 밀려나간 자들에 대한 경의 섞인 복원이자, 그 ‘밀려나간 자’에 약자인 인간뿐 아니라 더 약자인 동물(말)까지 포함하려는 사려 깊은 시도다. (조던 필은 호러 장르의 해러웨이가 되고 싶은 큰 꿈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번째보다  놀라운  번째 지점은, 주류이자 디폴트로 여겨졌던 것과 주류에서 배제되었던 것의 경계를 흐리려는 조던 필의 도전이 인간-비인간, 백인-비백인을 넘어 젠더의 경계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던 필이 흑인 ‘남성이기에 쉽게  사실을 믿기는 어렵지만, <>에서 에메랄드가 얼마나/어떤 방향으로 돌출된 존재인지 따져보는 것이 영화가 남긴 가장  재미고 유산이다. 엠이 가진 여러 속성들이 전형적인 남성 영웅의 소유였음을 생각하면 그는 영화사적 측면에서도 귀하고 소중한 캐릭터다.


OJ 천성이 주인공이   없는 남자고,  자신도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오티스(Otis)라는 이름부터가 그의 흐릿한 존재감을 설명하는 듯하다. 결말 즈음 에메랄드가 백인 남성 취재진의 질문 세례를 막아내며 ‘(우린) 아무도 아니에요라고 말했을  ‘Otis’ ‘아무도 아닌  뜻하는 그리스어 ‘Outis’ 연상시키는 이름으로써 특별한 울림을 갖게 된다.  이름은 일찍이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를 대적할  사용했던 가명이다. 오티스 주니어가 ‘아무도 아닌 로서 밀려나 있던 주변부적 존재였음을 상징하는 이름, 그리고 외눈박이로 죽은 아버지 오티스 시니어의 그늘 아래 아주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반면 엠은 신중하고 고지식한 오빠와 정반대인 품성을 갖고 있다. 엠은 사교적이고, 대담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자신감 넘치고, 아버지에게서 사랑 받지 못했고, 바람둥이다. 그는 가히 영웅(남성)적인 자의식을 갖고 있다. 오빠 OJ가 성장형 영웅이라 친다면, 엠은 태생부터 완성된 영웅인 것이다. 처음 보는 여자라도 예쁘면 주저 없이 플러팅하고 도시마다 썸 타는 여자가 있는 엠은 방종한 레즈비언 (그야말로 종교적 죄악 그 자체)으로 그려진다. 흑인이자 레즈비언인 여성이 그간 정통 SF 호러 장르에서 생존은 고사하고 잘 보이지조차 않는 존재였음을 되돌아보자.


당연하게 비가시화됐던 흑인 레즈비언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것을 넘어 조던 필은 그에게 ‘마지막’ 영웅의 자리를 양보하기까지 한다. ‘인류 최초의 필름의 흑인 기수’라는 영예를 상징하는 OJ가 '멍청한 짓만 골라하는 백인 남자'와 그의 오토바이에 또다시 카메라의 시선을 빼앗겼다가 그것을 회수했을 때, 공석이었던 주인공의 자리는 OJ가 아닌 에메랄드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OJ 결말에서 말을 타고  재킷의 시선을 돌려 엠을 안전하게 빼돌리기에 성공하는데 이는  (OJ 바랐던) 엠의 생존뿐 아니라, 엠의 기지를 통한 인류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선택이 되었다. 엠은 백인 남자의 오토바이를 대신 타고 달려서, 자기 아버지를 죽인 물체인 동전을 그대로 가져다가,  재킷을 포착하기 위한 반격의 무기로 쓴다.


즉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씬 전체가 완벽한 정반합이자, 영웅 지위의 완벽한 승계를 비유하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탄 백인 남자, 그를 좇는 홀스터의 카메라: 소수자의 기회를 다시금 뺏어가려는 기존의 백인-남성 중심주의적 체제 (정)

OJ: 최초의 필름에 등장한 흑인 기수의 환생과도 같은 흑인 남성 기수 (반)

: 주인 없는 오토바이를  흑인 여성,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웅 ()


나는  그림을 통해 조던 필을 달리 보게 되었다. 이전 시대에 자기 몫의 모든 것을 수탈당한 사람들, 착취당한 사람들은 흑인 남성뿐 아니라 흑인 여성도 있었단  잊지 않은 조던 필의 눈이 엠을 향했다고 믿고 싶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면 마땅히 여성이어야 한다는 시의적절한 판단이자, 영화사에서 노골적으로 무시되어  female gaze 대한 존중이었다고.


그러나 가장 현대적인  영웅이 가졌던 최초의 동기,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자 했는지를 생각하면 약간은 씁쓸한 뒷맛이 남기도 한다. 헤이우드 남매와 엔젤, 그리고 홀스터 촬영감독이 모여  재킷(이라는 스펙터클) 카메라 속에 포착하기 위해 궁리할  각자의 욕망이 뚜렷하게 노출된다.

먼저 엔젤은 ‘우리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며 순진하고 뻔한 소리를 한다. 엔젤(앙헬) / 토레스라 풀 네임으로 보아 그는 높은 확률로 라틴계일 것이고, 그런 그가 히어로 무비의 비장한 소명에 중독된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어쩐지 아메리칸 드림의 낭만에 기만당한 초기 이주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옆에서 촬영감독 앤트 홀스터는 식인종이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노래를 읊조리며 진 재킷을 만날 일을 고대하고 있다. 그가 엠의 제안을 받을 때 보고 있던 화면이 동물 다큐멘터리, 그중에서도 포식자의 자비 없는 사냥 장면을 자세히 담은 푸티지였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정받는 커리어를 가진 늙은 백인 남성으로서 언제나 할리우드의 강자였을 그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약속한 화려한 스펙터클 그 자체에 중독되어 있다. 홀스터는 종내엔 ‘자연광이 마법을 부릴 시간’이라며 안전한 천막에서 나가, 진 재킷을 더 가까이 카메라로 담으려다 끔찍하게 잡아먹히고 만다.

엠과 OJ의 동기는? 말할 것도 없이 돈이다. ‘오프라 샷’을 건져 TV쇼에 출연해 얻게 될 돈. 영화 산업의 귀족들로써 대대손손 물려받았어야 했으나 피부색 때문에 빼앗긴 명예보다도, 평생 맛본 수치심과 몰이해보다도, 심지어는 그 자신의 생존보다도 더 중요한 이 강력한 동기는 엠의 머리 속에서 나왔지만 아주 빠르게 OJ에게도 번져간다. 헤이우드 남매와 같은 동기를 가졌으나 그들보다 잽싸고 약삭빠르게 기회를 가로채려 한 동양인 주프는 ‘순서를 가로챈 죄’, 즉 백인에 의해 가장 먼저 끌려왔고 가장 오래 착취당한 인종을 넘어서려 한 죄로 먼저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매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인 말 농장은 망해가고 있다. 자멸을 부르는 스펙터클의 공포도, 가진 것을 죄다 잃을 공포와 비교하면 별로 와닿지 않는 머나먼 거리에 있다. 그래서 엠과 OJ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축적의 욕망을 향해 투신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OJ와 에메랄드는 아마 이 세상 유일하게 남은 진 재킷의 물적 증거를 갖고 TV에 나오는 것까지는 성공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불가사의한 힘으로 날뛰는 괴물을 길들였다, 나는 유일한 생존자다, 그러므로 나는 선택받은 자다’라고 공공연히 믿었던 주프와 같은 종류의 승리감에 도취될 지도 모른다. 아과 둘세에 그 다음 괴물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주프처럼 방자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괴물, 그 ‘나쁜 기적’을 아마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 모든 실패, 그 모든 착각의 시작에 지극히 단순하고 그래서 더 처절했을 자본주의의 주문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아마도 그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엠은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시대의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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