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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Oct 10. 2022

<작은 아씨들>, 남자 없는 여자들의 미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2/10/08 여성신문 리뷰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분명 유쾌한 첫인상은 아니었다. '작은 아씨들'은 첫 화부터 자본에 대한 노골적 예찬을 늘어놓고 빈곤 혐오에 저항하지 않는 인물들을 내세운다. "무능한 게 나쁜 거다", "돈이 없으면 죽는다", "이 집(옥탑)에서 언니들처럼 사는 것보단 부잣집에서 하녀로 살고 싶다"라는 강렬한 선언. '가난은 겨울 코트에서 티 난다'는 말로 시청자들까지 옷매무새를 검열하게 만든 뜻밖의 나비효과.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라는 회심의 일격까지.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처럼 자본주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체하지만 실은 충실히 부역하는 최근의 흐름에서 이 작품도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닌지 의심했던 이유다. 작중에선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가장 높고 밝은 곳으로'라는 레토릭이 질리도록 반복되기도 한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서도 된다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위험한 착시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드라마의 이면에 돈에 대한 강박적 욕망만 도사린 건 아닐 거라 기대를 놓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창작자 정서경에 대한 믿음 덕분이다.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 정서경 작가의 세심한 터치 덕에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숱한 영화들처럼, '작은 아씨들'에서도 역시 다채로운 여성 인물의 생명력이 천천히 피어난다.




악녀 대신 악인의 자리로


작중 주인공 세 자매만큼 흥미로운 인물은 못되고 독한 여자들, 장마리와 고수임, 오혜석 그리고 원상아다. 남자들이 스크린에서 허무하게 사라질 때도 그 ‘못된 여자’들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권력을 갖기 위해 후배 인경을 견제하는 장마리의 꼼수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스카이캐슬>의 김서형, <마녀>의 김다미의 계보를 잇는 고수임 실장은 날 것 그대로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다. 그가 오인주를 구타하는 장면의 감각적 충격은 극을 갑작스레 누아르 장르로 전환시키며 고수임의 존재감을 톡톡히 새긴다. 그는 “폭력 앞에선 누구나 진실해져서” 좋다고 말하는 자타공인 ‘양아치’이자, ‘야비하고 비열한 사람’이라는 평에 흡족해하는 사람이며, ‘우리 애들’만 끔찍이 챙기는 의리파 행동대장이다.

그런 고수임은 말끔하고 정중한 본부장 최도일과 대척점에 선다. 조폭 조직 내 행동대장과 엘리트의 대립은 일명 ‘알탕 영화’에서 숱하게 등장한 라이벌 구도다. 하지만 한쪽을 여성으로 치환하는 것만으로 클리셰를 파쇄할 수 있다고 믿는 노련한 ‘여성’ 작가 정서경에 의해 고수임-최도일의 투샷이 몇 만 배 더 짜릿해진다.


원상아 역시 말초적 재미에 모든 것을 거는 사이코패스로, 그간 남성 캐릭터에게만 허락되었던 매력을 독점한다. 오인주의 신뢰를 사기 위해 그가 내비친 연극적 자아는 다음과 같다:


“지금 난 24시간 연기 중이에요. 박재상의 사랑받는 아내.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배역이에요.

효린이 아빠랑 난 능수능란한 연기자들이죠. 우리는 상대방이 탁월한 연기를 펼칠 때 사랑 비슷한 걸 느껴요. 효린이 아빠를 캐스팅한 건 나예요. 대통령 부인이 되고 싶어서요. 어느 날 무심코 옆모습을 봤는데 대통령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그는 대여한 권력에 짓눌린 ‘장군의 딸’, 유망한 정치인의 매 맞는 아내인 척하며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고 동정을 산다. 하지만 ‘원상아가 대통령 부인이 아니라 대통령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어땠을지’를 안타까워하던 시청자에게 원상아는 금세 탁월한 연기자다운 반전을 선사한다. 그림자처럼 숨어 최후의 악인인 줄 알았던 남자들을 모조리 장기말로 썼단 게 밝혀진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주목받는 행위자의 자리보다, 눈에 띄지 않는 뒷방에서 모든 것을 통솔하는 진짜 권력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이렇게 <작은 아씨들>의 나쁜 여자들은 시시하고 낡은 ‘악녀’ 대신 ‘악인’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여자인 오혜석이 생존형 악인이라면, 먹고살 만해진 후세대의 여성들은 말초적 재미를 위해 범법도 서슴지 않는 진짜 악당이 될 수 있다.




'높은 곳'에 대한 욕망 대신 자매에 대한 선의로


그리고 이 여성 악인들의 대항마인 세 자매는 ‘높은 곳’이 아니라 자신만의 정의를 찾고 그 새로운 목적지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누구보다 돈에 진심인 체하던 인주가 사실 700억보다도 화영 언니를 다시 한번 만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단 걸 고백하는 장면의 애잔한 감동을 잊기란 어렵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언니를 만나고 싶어서’ 싱가포르에 그 위험을 다 무릅쓰고 갔다는 인주, 자기를 닮은 사람이 돈을 출금하려 한다는 말에 ‘화영 언니가 돈을 다 빼갔는지’가 아니라 ‘화영 언니가 살아있을 수도 있는지’를 먼저 궁금해하는 인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말에는 언제나 눈을 반짝이는 표정도 마찬가지다. (원상아가 이끌어내서 이용하려던) 인주의 진짜 욕망은 돈이나 남자가 아니라, 중요한 사람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을 누리는 삶 쪽에 있었던 것이다.


둘째 인경은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것만 바라보는 경주마 같은 존재로 주변의 시기와 소꿉친구 종호의 풋풋한 고백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단독자다. 그는 유일하게 믿었던 선배 완규가 유사 부녀 관계를 구축해 회유하려 하자 “나는 아무 아버지도 필요 없어요”라고 아예 못을 박는다.


막내 인혜는 전형적인 능력주의 신봉자처럼 굴려고 노력하며, 공공선과 일신의 평안 사이에서 고뇌하는 언니들보다 이기적으로 살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다. 하지만 인혜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다른 여성을 돌아볼 줄 아는 사려 깊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제가 감금당했을 때도 효린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물어봐주거나, 집안에 유폐됐던 효린의 자유를 위해 함께 떠나 주는 것이다. 자기보다 감정적으로 더 취약한 다른 여성들을 걱정하고 때론 그들을 구해내는 인혜는 언니들 못지않은 영웅적 면모를 지녔다.


그러니 결국 세 자매의 가장 큰 무기는 서로를 향하는 선의와 책임감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도움을 거부하고, 남자의 친절보다 '언니'를 더 신뢰하며, 다른 여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으로 말미암아 성장한다.




여성 간 공모로 한국 근현대사 바로잡기



이 다양한 여성 인물들 안에 정서경 작가가 새로이 해석한 과거가 있고, 그로써 그려내는 미래의 풍경이 있다. 정서경은 마냥 착한 사람들의 해맑고 다정한 연대만을 꿈꾸지 않는 현실주의자다. 그는 흠결 있는 여자들을 더욱 사랑하고, 그들이 오로지 남성의 몫이었던 폭력, 음해, 사기, 살인까지도 뺏어와 직접 행하며 직접적인 행위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극 중 절대악의 근원인 '정란회'는 베트남 전쟁에 동원됐던 서발턴 남성들이 살아 돌아와 결성한 일종의 전우회다. 그들은 부동산 투기 재벌, 외로운 늑대 타입의 테러리스트 무기상, 교육재단 이사장, 자금 세탁 전문가, 변호사, 정치인이 되어 한국사회의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움직인다. “근현대사 다이제스트” 같은 이 조직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었던 사람, ‘발을 빼서’ 안전했던 사람은 오로지 세 자매의 고모할머니 오혜석뿐이다. 하지만 정란회 소속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그의 탈출은 차라리 사회 요직에서의 배제나 탈락에 더 가까워 보인다.


다시 말해 정서경 작가는 한국사에 드리운 폭력과 유착과 부패의 그늘을 없었던 일처럼 부정하는 게 불가능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과거를 미화하거나 은폐하는 대신, 그 그늘에서조차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여자들을 그늘 한복판에 끼워 넣어 전복의 가능성을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살아남도록, 백마 탄 왕자의 도움 없이 제 힘으로 거물이 되도록, 그래서 지워지거나 자기 몫을 뺏기지 않도록 말이다.


이혼 후 자포자기했던 인주에게 새 꿈을 준 건 새 남자 최도일이 아닌 진화영이었다. 그런 화영에게 부자들의 아비투스를 교육한 건 신 이사가 아닌 원상아였다. 인경이 물정 모르고 정의로울 수 있도록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 건 종호나 완규가 아닌 고모할머니 오혜석이었다. 심지어 오인주(protagonist)와 대적하는 원상아(antagonist)마저도 오인주에게 “예쁘지만 그런 것엔 개의치 않고, 똑똑하고 효율적인 젊은 여자”라는 이성적인 평가를 내리곤 오인주에게 ‘가족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좀 더 하라’는 적절한 충고까지 준다.

이렇게 위 계급의 여자로부터 아래 계급의 여자에게로, 나이 든 여자로부터 어린 여자에게로 부의 사다리가 이어진다. 이 긴밀하고 단단한 공모는 남성 중심의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보정할 장치가 된다.


미국에서 이혼한 간호사이자 1세대 투기꾼인 오혜석, 장군의 딸 원상아라는 두 상징적 존재가 먼저 과거사의 틈을 벌린다. 현세대 여자들인 인주, 인경, 화영은 각자의 방식대로 투쟁하는 게임 체인저로서 그 틈에 쐐기를 박는다. 그렇게 당도한 미래는 미성년인 인혜와 효린의 우정을 빌어 묘사된다.

“세상에 너랑 나 둘만 있는 것처럼” 서로를 믿자던 소녀들의 상상 속 외국 생활은 돈 없고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보스턴 결혼’(19세기 보스턴에서 태동한, 비혼 여성들의 성애적 요소를 배제한 동거 관계) 형태에 가깝다. 남자도 혈연 가족도 없는 세상. 언니들이 마련해준 그 새로운 세상을 맛보러 도망친 아이들이 끝까지 붙잡히지 않기를 바란 이유다.


결말에서 결국 구시대의 유령 같던 남성들은 모두 극적인 죽음을 맞아 소거되고, 서로를 위하는 여성들과 그 여성들을 사랑해 마지않아 기꺼이 주변부적 존재가 되기를 자원한 남성들만이 살아남는다. 이전 세대 남성들의 힘과 유지를 상속받기를 간절히 원했던 원상아는 처단당해 깊은 물속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앉고 새로운 세대의 소녀들은 물 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이것이 정서경이 그려낸 새로운 미래다.







가장 좋았던 대사들 모음.


난 다른 사랑이 받고 싶었나 봐. 그냥 동생이라서, 같이 자라서 받는 사랑 말고.
- 어떤 사랑이 받고 싶었어?
내가 그림을 잘 그려서, 괜찮은 아이라서, 머릿결이 좋아서, 쓸모가 있어서 사랑해주는 거. 내가 어떤 앤지 보여주지도 못하고 죽을까 봐 무서웠어. 계속 쫓기는 것 같았거든. 갑자기 죽을 것 같고.



이거 갑자기 마련하느라 무리했죠? 인혜 일에 언제나 그렇게 무리해요? 아이는 가족의 거울이에요.
… 너무 애쓰지 말아요. 인주 씨는 자기 삶이 있는 젊은 여성이에요. 인혜 엄마가 아니고.



좋은 집에 살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져. 웬만한 일은 다 집에 오면 극복이 되니까.
자본주의는 심리 게임이거든? 있는 사람은 극복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못 하는 감정이 있어. 상실감.
… 난 말이야. 모든 걸 잃어도 이런 집만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아버지가 살인자인 기분은 어때?
- 안 좋아, 아주.
아버지가 가난한 것보다 더?
- 그 정돈 아닌데, 경우에 따라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버지가 체포되거나 세상에 이 일이 알려지게 되면?
효린아. 아버지가 살인자란 사실이 절대로 네 인생을 지배하게 두지 마.
… 일단 아무도 믿지 마. 세상에 너랑 나 둘만 있는 것처럼.



엄마. 난 엄마를 생각하면 언제나 슬펐어요. 엄마의 불행과 슬픔이 마음 깊이 느껴져서요.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끊고 싶어요. 그냥 내 삶을 살고 싶어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해요. 예술가가 되어서요.
나를 찾지 마세요 엄마. 그래도 사랑해요.



가난한 집 아이는 알 거야. 든든한 부모 있는 아이가 제일 자유롭게 놀 수 있다는 거. 너한테 힘 있는 아버지가 있다면 어땠을까? 탁월한 젊은 기자로 벌써 이름을 날렸을 거야. 너한테 그런 아버지를 주고 싶었어. 널 확실하게 들어 올려줄…
필요 없어요 그런 아버지. 나는 아무 아버지도 필요 없어요. 기자가 뭔데? 누가 그렇게까지 기자 한대요? 나 같으면 어떻게든 레커차 했을 거야. 레커차 못하겠음 다른 차 하면 되잖아요.
그런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필요해. … 부모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가장 밑에 있던 사람도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세상, 그게 평등이고 그게 정의다.
… 이런 사람인 줄 모르고, 선배가 시키면 지옥이라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
왜 나였어, 언니?
왜 나한테 이렇게 큰돈을 줬어?
처음부터 나였어?
우리는 그래서 친구가 된 거야?
내가 어디까지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 돈을 갖고 난 뭐가 되어야 해?
언니는 좋은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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