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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Oct 14. 2022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어린 여자와 사귀는 늙은 남자들의 가장 흔한 착각: 어린 애인을 소유하는 동시에, 때로는 동굴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


어린 여자를 영원히 늙은 남자의 연인으로 머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단 한시도 혼자 두지 않고 끝없이 매혹하는 것뿐이다. 늙은 남자가 자기만의 방에서 잘나신 사색을 하기 위해 자기의 어린 여자를 혼자 두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똑똑해진다. 혼자가 되는 순간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나이 든 남자를 앞질러 현명해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린다. 그들은 즉시 선명해지고 존재하게 되고 옳고 바르고 멋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늙은 남자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언젠가는 그렇게 될 일이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더욱 빠르게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악셀의 출판 기념 파티에서 사인 받으러 다가온 사람들(남자들) 일관된 차림과 눈빛과 말투. 그들의 영웅인 애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차려입은 채로 파티를 빠져나와 혼자 기찻길에 앉은 율리에. 이거... 나도 너무  알고 당신도 알고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오로지 파티에 남은 남자들만 모르는 순간이잖아.



율리에가 밟아나가는 삶의 궤적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델마>(가부장제 하의 '마녀' 어떻게 해방되어 사랑하는 여자를 손에 넣는가)부터  꾸준히 여성 주인공을 앞세우는 요아킴 트리에 역시 어쩔  없는 남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괴로웠다. 율리에가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들이는 노력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기가 예술과 자유와 인생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44세의 남자친구 악셀  빌려서 아득바득  해내고야 마는 추함이란.

 추하고 한심한 부분이 정말 남자답고, 그런 면이  영화를  대단하게 만든다. 남감독들이 자조적으로 남성성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실은 해명하고 감싸주는 영화는  그렇듯이  영화도 행위예술적인 면이 있기 때문. 악셀의 크리스마스 방송에서의 '창녀' 발언도. 스무  가까이 차이 나는 율리에에게 아이 같은 맹목적 애정을 받기 때문에 그녀를 옆에 두는 거면서,  애정에 만족해하면서도 '너도 서른이  '이라면서 어른스럽게 굴기를 요구하는 이중성도. 에르빈드의 전 여자 친구 수니바를 회상하는 내레이션에서 '환경보호 강요' 운운하는 부분도.

(개인적으로는, 악셀의 모자란 면들은 블랙 코미디처럼 연출된 자조적 농담으로 받아들일  있더라도,  '환경보호 강요' 이어 수니바가 엉덩이 사진으로 팔로워 모으는 머리  인플루언서처럼 그려진 부분이야말로 옳은 일하는 여자에 대한 아니꼬운 열등감이라는 예술남 특유의 진심이 드러난  같아  초간 불쾌했다.)​


율리에의 역린이 자길 사랑해주지 않는 ‘아빠 것도, 샤워하다 흘러내리는 핏줄기로 출산을 고민했던 아기의 깔끔한 소멸을 확인하는 것도, 정말로 모든  너무너무 투명하기 그지없는 요아킴 트리에의 자아 발현인 것만 같다.

그래서 그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요아킴 트리에는 처음부터 ‘여성 이야기를  것이 아니라, 일단 자기 삶에서 괴롭고 외로웠던 순간들을 그러모아 성별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창조한 다음  사람이 여성이라 겪었을 법한 추가적 고난을 붙여주는  아닐까 하는.



여전히 나는 요아킴 트리에와 그의 각본가 에실 보그트(역시 남자) 좋아하긴 한다. <델마> 야기한 서늘한 감탄과 <사랑할  누구나 최악이 된다> 고요한 슬픔을 알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야 마땅찮았던 연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는,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든 말해주고 싶었을,  말을 뒤늦게라도 듣고 싶었을 사람들은  아는 애수. 그가 그린 율리에의 외로움, 율리에의 조바심, 율리에의 아쉬움분명 누구보다 옳고 날카롭고 현명한 나의 어떤 면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허탈함. 어리고 인정받지 못하는 여자들이 너무  아는  감각들.

이건 어쩌면 요아킴 트리에 나름의 화해의 손길일지도. 과거의 누군가 혹은  말을 건네지 못한 어린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너와 헤어지고 나서 제일 후회한 ,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깨닫게 해주지 못한 거야.​


그는 이 말을 누구에게 그렇게 건네고 싶었을까? 혹은, 누구에게 그렇게 듣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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