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어린 여자와 사귀는 늙은 남자들의 가장 흔한 착각: 어린 애인을 소유하는 동시에, 때로는 동굴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어린 여자를 영원히 늙은 남자의 연인으로 머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단 한시도 혼자 두지 않고 끝없이 매혹하는 것뿐이다. 늙은 남자가 자기만의 방에서 잘나신 사색을 하기 위해 자기의 어린 여자를 혼자 두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똑똑해진다. 혼자가 되는 순간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나이 든 남자를 앞질러 현명해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린다. 그들은 즉시 선명해지고 존재하게 되고 옳고 바르고 멋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늙은 남자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언젠가는 그렇게 될 일이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더욱 빠르게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악셀의 출판 기념 파티에서 사인 받으러 다가온 사람들(남자들)의 일관된 차림과 눈빛과 말투. 그들의 영웅인 애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잘 차려입은 채로 파티를 빠져나와 혼자 기찻길에 앉은 율리에. 이거... 나도 너무 잘 알고 당신도 알고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오로지 파티에 남은 남자들만 모르는 순간이잖아.
율리에가 밟아나가는 삶의 궤적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델마>(가부장제 하의 '마녀'가 어떻게 해방되어 사랑하는 여자를 손에 넣는가)부터 참 꾸준히 여성 주인공을 앞세우는 요아킴 트리에 역시 어쩔 수 없는 남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또 괴로웠다. 율리에가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들이는 노력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기가 예술과 자유와 인생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44세의 남자친구 악셀 입 빌려서 아득바득 다 해내고야 마는 추함이란.
그 추하고 한심한 부분이 정말 남자답고, 그런 면이 이 영화를 더 대단하게 만든다. 남감독들이 자조적으로 남성성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실은 해명하고 감싸주는 영화는 다 그렇듯이 이 영화도 행위예술적인 면이 있기 때문. 악셀의 크리스마스 방송에서의 '창녀' 발언도.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율리에에게 아이 같은 맹목적 애정을 받기 때문에 그녀를 옆에 두는 거면서, 그 애정에 만족해하면서도 '너도 서른이 코 앞'이라면서 어른스럽게 굴기를 요구하는 이중성도. 에르빈드의 전 여자 친구 수니바를 회상하는 내레이션에서 '환경보호 강요' 운운하는 부분도.
(개인적으로는, 악셀의 모자란 면들은 블랙 코미디처럼 연출된 자조적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더라도, 그 '환경보호 강요'에 이어 수니바가 엉덩이 사진으로 팔로워 모으는 머리 빈 인플루언서처럼 그려진 부분이야말로 옳은 일하는 여자에 대한 아니꼬운 열등감이라는 예술남 특유의 진심이 드러난 것 같아 몇 초간 불쾌했다.)
율리에의 역린이 자길 사랑해주지 않는 ‘아빠’인 것도, 샤워하다 흘러내리는 핏줄기로 출산을 고민했던 아기의 깔끔한 소멸을 확인하는 것도, 정말로 모든 게 너무너무 투명하기 그지없는 요아킴 트리에의 자아 발현인 것만 같다.
그래서 그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요아킴 트리에는 처음부터 ‘여성’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일단 자기 삶에서 괴롭고 외로웠던 순간들을 그러모아 성별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창조한 다음 그 사람이 여성이라 겪었을 법한 추가적 고난을 붙여주는 건 아닐까 하는.
여전히 나는 요아킴 트리에와 그의 각본가 에실 보그트(역시 남자)를 좋아하긴 한다. <델마>가 야기한 서늘한 감탄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고요한 슬픔을 알기 때문이다.
다 지나고 나서야 마땅찮았던 연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는,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든 말해주고 싶었을, 그 말을 뒤늦게라도 듣고 싶었을 사람들은 다 아는 애수. 그가 그린 율리에의 외로움, 율리에의 조바심, 율리에의 아쉬움… 분명 누구보다 옳고 날카롭고 현명한 나의 어떤 면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허탈함. 어리고 인정받지 못하는 여자들이 너무 잘 아는 그 감각들.
이건 어쩌면 요아킴 트리에 나름의 화해의 손길일지도. 과거의 누군가 혹은 그 말을 건네지 못한 어린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너와 헤어지고 나서 제일 후회한 건,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깨닫게 해주지 못한 거야.
그는 이 말을 누구에게 그렇게 건네고 싶었을까? 혹은, 누구에게 그렇게 듣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