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by 유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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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붙잡지 않을 때 나는 가볍다. 비어있다. 텅 빈 곳이 많다. 뭔가를 붙잡아보려는 마음은 가끔 처절하고 아련하다.

“나는 너와 다른 나야. 이게 나고, 그게 너야. 그래서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거야.”

정말? 어쩌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의 다른 이름이겠지.


세상엔 모호한 것에 어설프게 이름을 붙인 것들이 많다. 붙잡는 것, 붙잡아지는 것, 그런 것들은 사랑이 아니다. 어차피 나는 그러한 내가 아니니까. 심지어 어제의 나도 지금의 내가 아니니까.

나는 항상 변하고 있는 어떤 상태일 뿐인데. 나는 그 흐름 속에 있고, 그런 물결 속에 있는데.


결국 내 것이란 건 없다. 모든 고통은, 내 것이 있다는 것에서 온다. 7살 아이도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느끼면 엉엉 운다. 하지만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으면 울지 않는다. 그래도 나름대로 살아보니 어디에도 내 것이 없다는 게 너무 당연하다.


때론 넓게 보이고, 그냥 전부 본다. 잘 보여서 텅 비고 기이한 것들을 본다. 어떤 공허뿐인 현상을 본다. 그런 모호함에도 아랑곳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모호한 그대로를 응시하면서

줄 수 있는 건 주고, 그래도 가능하다면 더 뜨겁게 준다면, 또 뭔가 받는 것에도 경계 없이 받는다면, 모름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늘 지더라도, 늘 나만 상처를 받는 것 같고, 늘 나만 흘러가는 시간에 더 빨리 잡아먹히는 것 같고, 늘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겠지.


사랑은 자비다.


사랑은 켜진 등불이 아닌 꺼진 등불이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느끼는 것.

우리에게 더 이상 경계가 없음을, 그래서 더 이상 주고받을 것조차 없음을 아는 것.


너에 대한 모름이 허용될 때

나에 대한 모름도 허용되는 것.

어떤 것도 몰라도 돼서 너무나 자유로운 것.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막지 않는 것.

만남이 있을 때 함께함을 느낄 뿐이다.


매일 만보씩 걸었다.

내일 또 만보를 걸으면 이 몸의 얼굴은 더 까맣게 타려나.

나의 목소리를 되찾고 싶었다.

다른 누군가의 말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제목만 띄워놓고 이틀째 제자리다.

어떤 순수한 것을 찾으려고 했나 보다.

아니 어쩌면 내 것인 줄 알았던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목소리도 내 것이 아닌데 말이다.


결국 누군가 와서 나의 등불을 켜줄 수 있을 뿐이지

내가 스스로 나의 등불을 켤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등불조차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강한 몸은 잘 잊는다.

잊어버리기의 전문가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보다

무엇을 잊을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는 만나고, 또 만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잘못 알기 때문이다.

알아도 또 잘못 알고, 언제나 잘못 안다.

매일 만나도 또 새롭고

매일 만나도 또 잊는다.

그래서 늘 잊는다.

이번엔 또 누군가에게서 무엇을 잊고, 누군가의 무엇과 기꺼이 헤어질 것인가?

잊는다는 건 참 대단하다.

정작 잊어야 할 건 나 자신이라는 환상이다.

그렇게 잊어간다는 건, 한 걸음씩 자비를 찾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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