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창
사랑은 때때로 우리를 깊은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발을 헛디뎌 빠진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떠민 것도 아닌데, 문득 땅이 꺼져버린 듯한 순간이 있다. 그곳은 어둡고 서늘하다. 위를 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괴롭기만 한 순간은 아니다. 끝내 흘러가는 물처럼 어딘가로 향하는 흐름을 느낀다. 구덩이는 그 흐름 속에서 잠시 머무는 웅덩이이기 때문이다.
삶은 고여 있는 연못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그 흐름 속에서 흙이 파이고 골짜기가 생기듯 우리는 종종 구덩이에 빠진다. 사랑은 때로 나를 쓰러뜨리고, 무릎 꿇게 하며, 두 손을 땅에 짚은 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물이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랑은 늘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우리 삶의 움직임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끊임없는 흐름이 바로 사랑에 있어 믿음을 자아낸다. 믿음은 내 의지로 붙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늘 흐르고 있는 거듭됨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묵묵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구덩이는 절망의 표식이 아니라, 믿음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된다. 땅이 꺼진 자리에 고인 물은 언젠가 채워지고, 넘쳐흘러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 과정을 버티며 바라보는 것이 바로 0-1-0의 구덩이에 빠진 사랑의 창이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난감함의 연속이다.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심하게 아프기도 하고, 엊그제 내 앞에서 해맑게 웃던 친구가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한다. 아차 싶은 순간에 핸드폰이 없어지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곤경에 처하는 일은 무수히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예전에 방영했던 <배틀스타 갤럭티카>라는 SF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의 시작과 동시에 인류는 사이보그로 인해 완전히 멸종위기에 처하고, 5만명 남은 마지막 인류만 유일하게 생존하여 노아의 방주같은 배틀스타 갤럭티카라는 우주선에 타고 떠난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배경은 인류가 어떤 이유로 지구를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한지 3천년이 지난 후라서, 12 콜로니라는 다른 행성계에 살고 있던 인류다. 그들에게 지구는 그냥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처럼 전설 속에 있는 어떤 별일 뿐이고, 아무도 지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제독인 아다마는 자신이 지구의 위치를 안다고, 우리는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며 모두에게 분명하게 확신을 주며 말한다. 인류는 희망을 가지고 사이보그로부터 도망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배틀스타를 따라 추격해 온다. 그런 추격으로부터 가까스로 도망치며 살던 어느 날 5만명 남은 인류의 정신적 지주인 대통령이 제독과 위스키를 한잔 나누러 가서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다. 자신이 암에 걸려 얼마 못 가 죽는다고 말이다.
그녀(대통령)는 5만명 인류가 정신적으로 유일하게 의지하던 리더였기에 그녀의 그 고백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런데 그 제독은 전혀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웃으며 자신의 비밀을 말한다. 제독은 사실 지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분명히 있다고 말한걸까? 지구가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우리가 왜 사이보그로부터 도망을 치는가 하는 것이다. 대체 이 5만명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우리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지구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어차피 지구가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믿음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단순히 우주에 표류하는 무의미한 우주의 먼지로서 나락에 빠진 것이 아니다. 사실은 거대한 흐름의 일부다. 우리가 그 흐름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뿐이지 그것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정확하게 흘러가는 질서다. 마치 아다마 제독이 실제로는 본인도 모르지만 정확한 지구의 위치를 안다고 하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도 늘 환희 속에 머물 수 없다. 빛나는 순간은 드물게 찾아오기에 더 귀하고, 대부분의 날들은 고단함과 씁쓸함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바로 그 쓰디쓴 순간이 삶을 깊게 하고, 우리를 창조적인 존재로 만든다. 단풍잎이 서늘한 가을을 거쳐야 가장 아름다운 색을 띠듯, 인간의 마음도 고통과 상실을 지나야 비로소 새로운 아름다움의 길을 찾는다.
나는 어느 가을날, 네 살배기 아들과 함께 풀밭에 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풀 위에는 작은 파란 벌레가 앉아 있었고, 아이는 그 빛나는 존재를 바라보며 감동한 듯 숨을 죽였다. 그 순간 아이는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아이는 아직 세상으로부터 무엇이 좋고 나쁘다, 무엇이 깨끗하고 더럽다 하는 분류를 배우기 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언젠가는 벌레를 더럽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왜곡된 기준에 의해 규정되고, 머릿속은 수많은 경계와 구분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보여준 그 눈빛은, 슬픔과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까운지, 아직 신에 가까운 기억을 간직한 존재만이 볼 수 있는 빛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다.
그리스 신화 속의 헤파이스토스 역시 그러했다. 그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남편이었으나, 태어날 때부터 못생겼다는 이유로 올림푸스에서 추락해 버려졌다. 하루 종일 떨어져 바다에 닿았을 때 그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그 상처와 결핍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헤파이스토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장인이 되었다. 추락했기에 땅과 불을 다루게 되었고, 버려졌기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창조성을 얻게 된 것이다.
어쨌든 헤파이스토스는 저 아래의 땅으로 추락했다. 0-1의 본성을 가진 이는 어쩌면 이런 추락의 느낌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점이 0-0의 본성을 가진 사람과의 큰 차이다. 0-0은 애초부터 땅의 본성을 가지기에 비움과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그러나 0-1의 본성을 가진 이는 언제나 1에 대한 갈망, 즉 빛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 그래서 삶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내부의 빛을 찾는다. 0-1-0의 순간은 결국 아직 빛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이런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삶을 관찰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 이들에게 낯설게 비칠 수 있다. 이것은 본인에게도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 그 자체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0-1의 본성을 가진 이는 종종 스스로의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무엇인가를 꾸준히 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의문을 품곤 한다.
“왜 나는 남들처럼 그저 묵묵히 주어진 삶에 임하며 노력하지 않는 걸까, 왜 나는 다르게 보며 살아가는 걸까, 잘못 태어난 것은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마음을 파고든다. 무언가에 의해 거절당한 듯한 느낌, 버려진 듯한 씁쓸함,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 듯한 고립 속에서 흔들린다.
그럴 때 유일한 길은 스스로에게 편안해지는 것이다. 빛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을 즐기고, 억지로 스스로를 세상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는 것.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애써 맞춰주지 않아도, 똑똑하지 않아도, 지식이 많지 않아도 괜찮다. 오직 자신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억지로 다른 누군가처럼 될 필요는 없다. 침묵 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면, 언젠가 사람들이 나를, 사랑이 나를, 빛이 나를 발견해 줄 것이다.
여기엔 앞선 사랑의 창과 중요한 차이가 있다. 0-0-0의 창이 자기 자신에게 수렴하며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길이라면, 0-1-0은 자신을 타인을 통해 발견하는 창이다.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대신, 내 앞에 있는 타인을 향해 시선을 건넨다. 0-1의 본성은 그렇게 타인과 융합되려는 충동, 깊은 호기심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내면만을 응시하면 구덩이에 더 깊이 빠질 뿐이고, 타인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빛을 볼 때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된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낸다. 그러나 달은 어둠 속에서 건너편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인다. 0-1-0의 사랑의 창은 바로 그 달과 같다. 어둠 속에 있으나 빛을 머금고, 홀로 빛을 내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비춘다. 0-1의 본성은 민감하고 예민하며, 그 예민함 때문에 탁월한 지성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을 스스로의 행위와 동일시해 버린다면, 그 기민함은 사라진다. 자신이 0이라는 사실을 잊고 스스로를 1이라 착각하는 순간, 본래의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0-1-0의 순간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순간과도 같다. 물은 위로 올라가 하늘의 바람에 실려 구름이 되어 흐르다가, 양기(1)를 머금은 뒤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비는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쏟아지지만, 그 추락이 끝은 아니다. 언젠가 다시 증기가 되어 오르리라는 것을, 바람을 타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비는 추락 속에서도 하늘을 기억한다.
이 기억은 선험적인 그리움이다. 마치 구덩이에 빠져 사방이 막힌 순간에도 저 위에 나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아는 것과 같다. 아직 그곳에 닿지 않았는데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한 그리움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0-1-0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랑은 추락의 경험 속에서 빛을 잃는 듯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시 오를 수 있다는 그리움을 간직한다.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저 하늘에 나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구덩이는 끝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며, 어둠은 빛을 품은 기다림이다.
그 빛과 그리움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기준점이나 대단한 목표는 아니다. 마치 낯선 곳에서 여행을 할 때, 한밤중 어느 동네 불켜진 집을 보며 상상하는 것과도 같다. 그 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상상하고, 그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 골목이 담고 있던 세월들을 상상한다. 단지 몇 개의 창문과 불빛들, 그리고 그 집에서 나온 몇 사람의 표정을 보았을 뿐인데 이미 그것이 그들 삶의 냄새를 만들어내어 기억에 저장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 집을 떠올리면 그 집에서 실제로 본 것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도 전에 그 시간이 문득 그리워진다.
세계는 항상 우리가 보고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중엔 실제로 일어나는 일도 있지만 사실 그리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이 들어 있다. 우리는 늘 어디엔가 머물고,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사람을 만나 부대끼고, 헤어진다.
우리는 삶의 흐름 속에서 물 위의 나무 조각처럼 시간들 위로 떠다니고 있지만 그리움과 상상은 물속에 감춰진 것들을 보여주곤 한다. 0-1-0의 사랑은 잠수부의 사랑과도 비슷하다. 어둡고 깊은 물속에서 마주칠 이야기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不盈(불영)
역경의 중수감(重水坎) 괘사에 나오는 말이다. 감坎은 구덩이이자 흐르는 물이다. 0-1-0의 순간은 이 괘의 의미와 닿아 있다. 중요한 말은 바로 불영不盈(아니 불, 채울 영), “채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은 흘러가다 구덩이를 채워야 구덩이에서 벗어나지만 괘사는 채우지 말라 말한다. 왜냐하면 물은 특정한 구덩이에만 머무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도중 만나는 구덩이에서 잠시 고일 뿐, 다시 흘러간다. 채우는 것에 급급하면 흐르지 못한다. 삶에도 구덩이는 하나만 있지 않다. 또 다른 구덩이가 기다리고 있다. 끝없이 흐르는 것, 그것이 불영의 의미다.
0-1-0의 사랑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흐르는 물처럼 비워야 다시 채워지고, 또 비워야 흘러간다.
0-1-0의 사랑은 그런 흐름 속에서 언제나 손님으로 타인의 삶에 들어간다. 손님은 초대를 받아야 누군가의 삶에 들어갈 수 있고, 머물렀다가 떠나야 한다. 그러나 그 초대의 순간만으로도 사랑은 이미 충분히 성립한다.
그래서 0-1은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본다. 하지만 이 바라봄은 언제나 곤란과 오해를 동반한다. 몸이 가는 길과 의식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자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몸을 스스로 움직이게 두고, 의식은 한 발짝 떨어져 손님으로서 자기 삶과 관계를 바라보는 일이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만 매달리는 대신,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투명하게 집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0-1-0 창을 기반으로 한 사랑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타인을 향해 눈을 뜨면 또 다른 곤란이 찾아온다. 누군가 다가와 나를 바라볼 때,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솟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타인의 시선은 자주 왜곡되어 있다. 나는 분명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 않는데, 타인은 집요하게 나를 다른 모습으로 규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0-1-0은 구덩이에 더 깊이 빠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타인이 나를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문제는 0-1의 고독을 더욱 짙게 한다. 그래서 억지로 그에 맞춰 무언가를 해야만, 비로소 내 존재가 제대로 보일 것 같은 충동이 일어난다.
이는 친구 간의 우정, 연인 간의 사랑 관계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이 호감을 얻기 위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더 인상적인 모습으로 연출하려 한다. 이것은 외모나 취향, 관심사 모든 것을 포함한 다양한 것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심지어 스스로 그것을 믿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상대는 나를 다르게 보고 있으며, 스스로에게는 단점으로 여겨지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사랑하기도 한다. 결국 이 과정은 오히려 스스로를 더 지치게 만드는 악순환에 빠트린다.
0이 땅이라면 1은 하늘이다. 0-1-0은 비가 되어 내려와 구덩이에 빠진 물이다. 언젠가 이렇게 흘러 하늘로 다시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 구덩이에 빠진 지금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지탱한다. 그래서 0-1-0에게는 늘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랑의 형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0-1의 본성을 가진 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자리, 일종의 지위이자 권리와 같다. 저잣거리에 숨어든 왕자나 공주처럼, 0-1은 고귀한 자리를 부여받고도 0의 순간, 즉 땅속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난과 쓰디쓴 시절을 견디며, 언젠가 땅 위로 솟아오르는 나무처럼 자신이 거할 사랑의 자리를 찾아 올라가야 한다. 이런 사랑은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사랑은 단순히 낭만적인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을 귀히 여기고 스스로를 사랑할 때 비로소 가장 자연스러운 사랑의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은 환상이나 허구가 아닌, 진정한 자신으로서 존재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기쁨과 고통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이는 삶의 모든 굴곡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0-1-0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의 사랑의 이상향에만 파고드는 것은 오히려 곤경을 더 깊게 만든다. 이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앞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0-1의 본성을 가진 이는 어린아이일 때 엄마의 우울을 보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기도 한다. 엄마의 우울이 단순히 거울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내재화한다. 부모가 원한 방식, 친구가 주입한 가치, 연인과 스승이 남긴 상처가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을 채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실 나의 본모습이 아니라 단지 거울로서의 자신일 뿐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타인에게서 보게 된 그 슬픔이 거울로서의 자신일 뿐임을 알게 되면, 오히려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상처의 근원을 보고 치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깨끗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내 방이 텅 비어 있어야 상대가 들어와 보이게 된다. 만약 자신의 방 안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하다면 눈 앞에 누군가 있더라도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프레임 속에 갇힌 상대를 볼 뿐이다. 그때 진정한 대화는 빗나가고, 관계는 점점 왜곡된다. 결국 숨 막히는 방 안에서 점점 자신의 삶을 불편하게 느끼게 된다.
설령 누군가의 빛을 만나 기쁘게 느껴진다고 해도, 스스로는 여전히 0의 존재다. 그렇기에 언제나 손님일 수밖에 없다. 손님은 초대를 받아야 들어가고, 초대가 끝나면 떠난다. 사랑을 함께 나눈다기보다는, 사랑의 초대를 받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온당하다. 초대받은 손님이 하루아침에 가족이 되고, 그 누군가와 영원히 합일이 되는 일은 없다. 0-1-0은 언제나 사랑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타인을 대해야 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0-1-0의 사랑은 흐르는 물과도 같다. 두 어둠 사이에 잠시 빛이 머문다. 어둠이 빛을 품듯, 구덩이는 늘 변화한다. 빛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엔 나타나고 어떤 순간엔 사라진다. 그러나 끊임없이 빛을 찾고 있기에, 결국 그 빛을 보게 된다. 이것이 0-0-0과 다른 점이다. 0-1-0의 세 번째 자리가 0이라는 사실은, 아직 빛으로 귀결되지 않은 순간임을 뜻한다. 그래서 이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빛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 그 빛이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
당연하게도 인간의 눈은 늘 흔들린다. 0-1-0은 타인을 깊이 보는 재능을 지녔지만, 그만큼 잘못된 추론에 빠지기도 한다. 상대를 온전히 보기보다, 설명과 이유를 덧붙이고 그 설명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린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도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서 자신조차 그 거짓된 추론에 설득당한다. 그리고는 불쑥 이렇게 말하게 된다.
“너는 내가 왜 속상한지 알아?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언짢은지 알아?”
그러나 그 속상함은 종종 실제의 타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짜낸 이야기의 그림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어에는 메타노이아 Metanoia라는 말이 있다. 메타 meta 는 넘어감, 전환, 초월을 뜻하고, 노이아 noia 는 마음과 생각을 의미한다. 메타노이아란 마음을 바꾸는 것이며,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더 이상 타인을 문제시하거나 지적하려는 시선이 아니라, 추론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0-1의 존재가 그렇게 보기 시작할 때, 변화는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타인에게서 일어난다. 내가 바꾸려 애쓰지 않아도, 상대가 스스로를 다르게 보게 되고, 그래서 함께 달라진다. 그 순간은 거의 신적인 시선처럼 신비롭다.
0-1-0은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는 사랑이다. 음이 양을 품은 순간이며, 땅이 하늘을 품은 순간이다. 어둠 속에서 하늘을 찾고, 구덩이에 빠진 채로 빛을 기다린다. 땅 속에 묻혀 있지만, 의식은 타인에게서 하늘의 기억을 본다. 0-1-0의 사랑은 그 모순적인 신비 속에서 태어난다. 땅의 무거움과 하늘의 그리움이 서로를 부르며 어둠이 빛을 머금는다.
0-1-0의 사랑이란 결국 이 역설의 길 위에 있다. 추락 속에서도 하늘을 기억하고, 구덩이 속에서도 끝없이 흐른다는 진실을 잊지 않으며, 초대된 손님으로서의 투명한 시선을 가진 채 믿음을 품는 사랑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