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에 맞춰 충만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랑의 창
삶은 대부분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 처럼 보인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하루가 간다. 그러나 어떤 날은 같은 흐름 속에서 뭔가 달라진다. 그날의 대화, 그날의 빛, 그날의 만남이 다른 날과는 구별되는 생생함으로 경험된다. 마치 오래 준비된 무언가가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한순간이 있다. 삶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우리를 향해 정확히 문을 열어 준다.
씨앗이 흙 속에서 어둠을 견디다 햇살을 만나 싹을 틔우듯, 우리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빛 속에 드러난다. 그 기다림 속에서만 타이밍은 찾아온다. 이때 느껴지는 즐거움, 그것이 바로 0-0-1의 사랑이다.
삶의 많은 장면은 알에서 태어나는 병아리와 닮았다. 알은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다. 부드러운 노른자와 흰자, 단단한 껍질, 고요한 어둠. 그러나 그 내부는 영원히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안에서 새는 자라나며 알의 내부는 점점 더 좁아진다. 마침내 더는 머물 수 없게 될 때 알 속의 아기 새는 작은 부리로 껍질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에서 두드리는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밖에서도 어미가 응답해야 한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두드려야만, 단단한 껍질이 깨진다. 이런 모습을 옛사람들은 줄탁동시(啐啄同時)라 불렀다. 안에서 쪼고, 밖에서 두드려야, 생명이 열린다.
이 장면은 존재와 세계의 관계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극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고, 세계는 밖에서 조건을 마련한다. 그 둘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 삶은 전환을 맞이한다. 너무 일찍 깨면 아기새는 죽을 것이고, 너무 늦게 나와도 불리하다. 맞는 때에만 문이 열린다.
줄탁동시는 모든 드러남에 대한 비유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관계를 맺고, 삶에서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갈 때엔 나의 존재 안쪽에서 두드리는 힘과 바깥 세상의 응답이 함께 필요하다.
글을 쓸 때도 비슷하다. 마음속에서 아무리 이야기가 솟아올라도, 세계가 그 이야기를 받아줄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글은 나올 수 없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리 기회를 준다고 해도, 안에서 준비되지 않으면 응답할 수 없다. 안과 밖이 겹칠 때, 글은, 관계는, 삶은 드러난다.
이 순간은 계산으로 예측되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준비되어 있는 존재가 때를 만나는 순간이 온다. 우리는 가끔 그런 것을 ‘운명’이라 부르기도 하고, ‘기회’라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타이밍이다. 존재와 세계가 동시에 두드려서 열린 순간. 그때 0-0-0의 어둠은 0-0-1의 빛으로 바뀐다.
줄탁동시는 인간 삶의 모든 드러남을 설명한다. 안에서 준비된 힘과 밖에서의 응답이 동시에 맞아떨어질 때, 관계와 변화가 열린다. 출산도, 스승과 제자의 만남도, 사랑도 모두 그렇다. 혼자의 두드림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과 밖이 동시에 울려야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알이 깨지는 순간은 동시에 알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집이자 보호막이었던 껍질은 금이 가고 부서져서 다시 알 속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새는 드디어 자신만의 첫 숨을 머금지만, 동시에 이전의 세계를 완전히 떠난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도 이와 닮았다. 어떤 만남은 새로운 세계를 열지만, 동시에 이전의 나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전의 나는 다시 갈 수 없고, 이미 부서진 껍질로만 남는다.
君子之終
군자지종
역경, 지산겸 효사에 나오는 ‘군자지종’ 은 군자의 완성을 의미한다. 흙이 무언가로 빚어지는 순간의 이야기다. (終종 : 끝날 종) 은 단지 끝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삶의 흐름은 언제나 타이밍을 따른다. 그 타이밍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조율되고 있다. 0-0의 본성을 가진 이는 1의 빛을 기다릴 뿐이다. 그런 타이밍에 함께 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충분히 비워진 채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0-0-1을 이미지로 풀어낸다면 땅이 솟아올라 산이 되는 순간이다. 흩어지는 흙은 어떻게 치솟은 산이 될까? 그것은 태양의 빛과 바람의 움직임, 물의 흐름과 대지의 이동과 같은 자연의 모든 힘들을 받아 산으로 만들어진다. 처음부터 거대한 산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은 돌무더기 내지는 동산이었던 것이 점점 더 오랜 시간이 지나 산이 되어간다. 이 전환에는 억지로 만든 힘이 없다. 다만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솟아오른다. 산은 각자가 품고 있는 고유함의 힘이다. 모든 사람에겐 제각각 다른 타이밍이 있다. 사람들 저마다의 태어난 순간과 죽는 순간이 다르듯이 0-0-1의 사랑은 고유성을 준다. 이 세상을 광대하게 다각화한다. 세상의 모든 산들이 서로 다르게 생겼듯이 어떤 드러남은 비슷해 보이더라도 제각각 다르다.
마치 연극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드는 것과도 비슷하다. 연극은 장기 공연을 하더라도 완전히 같은 장면은 단 한 번도 없다. 매 공연마다 배우들은 같은 대사를 읊고, 같은 동선을 걸으며, 같은 음악에 맞추어 움직인다. 그러나 늘 관객이 달라지고, 조명도 미세하게 달라지고, 배우의 몸과 호흡도 조금씩 다르다. 어제의 공연은 어제에만 있었고, 오늘의 공연은 오늘에만 있다.
무대 위의 시간은 언제나 생동감이 있다. 배우는 대사를 외워서 읊지만, 그 대사를 오늘 여기서 어떻게 말할지는 알 수 없다. 관객의 반응이 반 박자 먼저 튀어나올 때도 있고, 파트너 배우의 숨이 어제보다 길게 이어질 때도 있다. 그 미세한 차이가 매 공연 때마다 장면을 다르게 만든다. 때로는 어설프고 마음에 안드는 장면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차이가 기적처럼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기도 한다. 배우들은 안다. 무대 위의 시간은 늘 오늘만 가능하다는 것을.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려오면, 무대 뒤는 조용하다. 수십 회를 반복한 작품이라 해도 마지막 공연이 끝난 뒤에는 누구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한다. 분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고, 소품을 제자리에 두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무대 위에 남아 있다.
어떤 배우는 의상을 정리하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어떤 배우는 한참 동안 상대역을 맡은 배우와 오래 안고 있다. 그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만끽한 어떤 시절에 대한 애도의 눈물이다. 그들의 무대는 이제 끝났다. 수십 번의 공연이 있었지만, 매번 오늘의 오늘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은 마지막 공연이 끝난 뒤 종종 슬퍼하곤 한다. 그 슬픔은 끝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끝까지 함께 해냈다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끝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다음이 가능하다.
사랑도 그렇다. 어떤 관계는 수천 번의 장면을 쌓아가다 결국 끝난다. 끝난 뒤에 우리는 아쉬워하고, 때로는 후회한다. 하지만 그 끝을 인정하지 못하면, 새로운 시작은 올 수 없다. 드러남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드러남이 멈춰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다음의 드러남을 여는 조건이다.
1을 만나는 타이밍 못지 않게 이러한 끝의 사랑이 중요한 것은 는 0-0의 본성에서 출발한 사랑이기에 그렇다. 끝은 1의 충분함이 다한 순간이다. 0-0-1은 1을 만났더라도 다시 0으로 돌아가야 한다. 0-0-0의 비움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무대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막이 완전히 닫힐 때, 배우는 오늘을 놓아준다. 오늘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내일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랑도 그렇다. 끝난 오늘을 놓아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
연극 배우에게 공연이 진행되던 시간은 존재가 세계와 겹쳐지는 0-0-1의 순간이다. 무대 위에서 배우의 몸과 대사가 빛 속에 드러나고, 관객의 숨결과 맞닿는다. 그러나 막이 내려오는 순간, 그 드러남은 멈춘다. 드러난 것은 이미 지난 과거가 되고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기억이 된다.
나는 늘 현재에 존재하는데, 그 현재는 늘 과거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현재는 드러나며 멈춘다. 그리고 여기서 그 기억의 아련함은 어떤 카페에 뭔가를 두고 온 기분같은 것이다. 사실 내가 두고 온 그 물건은 카페가 아니라 과거의 시간 속에 있다.
우리는 종종 이미 드러난 것(1)들을 붙잡아 두고 싶어 한다. 배우는 공연을 영상으로 기록하거나, 대본을 다시 읽거나, 소품을 간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연 그 자체가 아니다. 오늘의 공연은 이미 지나갔고, 어제의 공연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드러남은 늘 멈춤을 만들어낸다.
이 멈춤은 우리에게 0-0-1의 사랑의 본질에 대해 그 일부를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것은 늘 드러날 때 이미 멈추고 있다. 사랑이 완전히 내 것이 되는 순간은 없다. 순간은 살아 있음과 동시에 사라짐이다. 그래서 잔상이 남게 될 때 그것은 멈춤의 사랑이다.
0-0-1은 타이밍에 맞게 즐거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모든 것이 잔상처럼 느껴지는 사랑이기도 하다. 기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내린 시골의 간이역같은 곳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의 사랑이 있다. 어찌보면 이 잔상은 지금껏 왔던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아련함은 이미 지나간 것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간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다. 아련함은 상실의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충만의 흔적이기도 하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우리는 아련함을 품는다. 함께했던 시간이 진짜였음을, 그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음을 동시에 기억하기 때문이다. 아련함은 일종의 증언이다.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는.
세포의 주기 ― 생명이 시간을 쓰는 방식
세상의 모든 타이밍은 거대한 지구의 복잡한 패턴 속에서 만물에 흐르는 힘에 on/off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다. 내가 0-0의 어둠일지라도 기다리다 보면 나의 빛은 언젠가 온다. 사실 타이밍은 더 큰 대우주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타이밍을 취할 수 있으려면 비워져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0-0의 본성, 비워진 상태로 기다리고 있을 때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움직이고 분열한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성장하는 때가 있고, 멈추어 점검하는 때가 있고, 분열하는 때가 있다. 세포의 시간은 늘 주기적으로 이어지며, 그 주기를 어기면 생명은 위태로워 진다.
세포는 일정한 크기만큼 자라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하면 분열되지 않는다. 또, 스스로를 점검하는 과정이 있다. DNA가 올바르게 복제되었는지, 손상이 없는지, 분배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살핀다. 만약 잘못이 발견되면 세포는 멈추거나 스스로를 파기한다. 이 엄격한 절차가 있기에, 생명은 유지된다.
사람 사이의 만남도 이 화두를 비켜갈 수 없다. 어떤 이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히 마음을 열고, 끝내 상처를 입는다. 어떤 이는 너무 오래 망설이다가, 결국 기회를 놓친다. 사랑은 언제나 타이밍의 문제다.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 준비가 상대의 준비와 겹칠 때, 관계는 열린다.
세포의 세계에서 이는 생사의 문제다. 타이밍에 문제가 생기면, 생명은 무너진다. 인간의 삶에서는 그것이 곧 상처와 실패로 드러난다. 그러나 적절한 타이밍의 순간은 다르다. 그 순간은 생명을 살게 해주고, 관계를 살아있게 한다.
이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0-0-1의 사랑은 “내가 원하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식의 일이 아니다. 사랑은 세포처럼 묻는다. 지금이 그때인지, 아직 기다려야 하는지. 삶의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졌는지 말이다. 억지로 만들 수 없는 것, 설득하거나 요구할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정확히 그 순간에 스스로 드러나는 것. 0-0-1의 사랑은 그렇게 온다.
세포는 분열하는 순간, 이전의 자신을 완전히 잃는다. 분열한 뒤에는 결코 이전의 단일한 세포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 상실 덕분에 새로운 생명이 유지된다.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다. 무언가 이루어지는 것은 언제나 한 편에서는 동시에 무언가가 끝나고 죽는 과정이다. 사랑의 고백은 침묵을 끝내는 것이고, 관계의 시작은 혼자의 삶을 끝내는 것이다. 우리는 늘 이전의 나를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끝이 없다면, 삶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늘 죽음을 포함한다. 드러남은 언제나 이전의 상태를 잃게 만든다. 그러나 그 잃음 속에서만 다음이 열린다. 세포의 주기는 우리에게 사랑이 두려움의 반대편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언제나 죽음 속에서 생명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세포가 자체적으로 분열을 멈추는 일도 있다. 준비되지 않았거나 손상이 심할 때 세포는 더 분열되지 않고 과정을 멈춘다. 이 멈춤은 오히려 더 큰 실패를 막는 방식이다. 우리도 가끔은 그렇게 멈추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사랑을 억지로 이어가려 할 때, 그것은 결국 파괴로 끝난다. 때로는 관계를 잠시 멈추고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히 고쳐지고 회복될 때까지 자신의 0으로 돌아간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0-0-1의 창은 우리에게 삶이란 때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때에 맞아 드러나고, 드러남 속에서 사라지며, 사라짐 속에서 다음을 준비한다.
0-0은 순수한 음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가 음(0)이라면 겪는 세상은 양(1)이다. 0-0은 언제나 양을 향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속되는 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늘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와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고정된 만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변화하는 각자의 궤적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궤적 안에서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환영만이 존재한다. 궤적은 서로 한동안 겹쳐 있기도 한다. 우리는 궤적을 나란히 가고 있는 그 누군가를 보고 "사랑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일하게 "우리는 함께 공허를 지나고 있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두 이야기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결코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는 결코 내가 점유한 몸의 공간을 밀고 들어올 수 없다. 나는 누구와도 하나가 아니다. 나는 오직 나와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혼자다. 나는 혼자다. 나는 홀로 선 산이다. 나는 군중 속에 있더라도 군중 속에 홀로 있다. 나는 늘 궤적 속에 홀로 있다. 어떤 관계라는 것은 결국 그 만남의 타이밍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변화하고 있으며, 그 만남의 타이밍이 곧 장소가 된다. 모든 것은 특정 장소에 속해 있다. 모든 일이 일어나는 특정한 장소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밤하늘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별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망원경을 통해 조금만 시간을 길게 들여다보면, 그 모든 별이 각자의 길을 따라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까운 행성들은 빠르게 움직이고, 먼 별들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끊임없이 제 궤도를 따라간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닮아 있다. 우리는 각자 하나의 궤적을 따라 산다. 나의 길이 있고, 너의 길이 있다.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가끔은 그 길이 교차한다.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 예고되지 않은 대화, 뜻밖의 손길. 그때 두 궤적은 잠시 스쳐 지나며 서로를 만난다.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는 궤적의 스침 속에서 충만한 즐거움과 만족을 느낀다.
사람들은 종종 사랑을 ‘하나 됨’으로 이해하려 한다. 둘이 하나가 되고, 나와 네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를 꿈꾼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우리는 결코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고, 각자의 고유한 리듬과 타이밍을 가진다.
사람들은 사랑에 있어서 어떤 것이 자기 책임이나 다른 사람들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곤 한다. 그리고 비난, 수치, 죄책감, 잘못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마치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을 책임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하든 늘 각자의 공허를 지나고 있을 뿐이다.
사랑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하나가 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서로가 나누는 대화, 함께한 시간, 스쳐간 손길은 각자의 궤적의 마주침이다. 사랑은 바로 이 스침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영원한 합일이 아니라, 순간의 교차가 남기는 흔적이다.
그 흔적은 때로는 크다. 어떤 사람은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삶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만남은 더 미묘하다. 나에게 아주 작은 변화들을 주고, 그 변화가 쌓여서 결국 먼 미래에는 큰 차이를 만들게 된다.
삶을 돌아보면 내 궤적은 수많은 스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수없이 교차했고, 그 교차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 누구와도 하나가 되지 않았지만, 그 만남들 덕분에 나는 지금의 자리에 있다.
자연의 흙들이 다양한 힘과의 만남으로 산이 되어가듯이 인간이 만들어낸 산도 있다. 이를테면 피라미드같은 것들 말이다. 산처럼 생긴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수백만 개의 돌이 쌓여 이루어진 거대한 왕의 무덤이다. 그 돌 하나하나는 수많은 인간의 손길이었고, 땀이었고, 제 각각의 삶의 순간들을 지낸 흔적이었다. 돌 하나만 보면 보잘것없는 물질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이어지고 이어져 거대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압도된다.
그 건축은 한 세대의 힘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수많은 세대가 이어서 쌓아 올린 결과다. 어떤 이는 기초를 다졌고, 어떤 이는 벽을 세웠고, 또 다른 이는 꼭대기에 올릴 마지막 돌을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이미 죽었고,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시간은 돌 속에 남아, 다음 세대의 손길과 이어졌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도 그렇다. 성당을 건축했던 가우디는 이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는 생전에 작은 미니어쳐 모델을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남겼지만, 내전과 전쟁 속에서 그 모델은 산산조각이 났다. 후대의 건축가들은 그 파편을 모아, 설계의 흔적을 이어붙이며 성당을 다시 세우고 있다. 지금도 공사는 계속된다. 가우디는 죽었지만, 그의 손길은 아직도 건축 속에서 살아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끝나지 않는 건축이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기에 더욱 생생하다. 매일 쌓이는 돌과 철근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 건축은 완결을 향해 가는 동시에, 끝나지 않는 과정을 품고 있다.
궤적을 세상 전체로 보고 궤적의 만남들 하나를 한 인간의 삶으로 보자. 그럴 때 만남은 개인의 시간이 아니라, 세대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애에서 완성되지 않는 일이 있고, 나의 손길이 닿은 자리가 훗날 다른 이들의 손길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한 사람의 삶의 궤적에서의 크고 작은 사랑들도 이와 닮았다. 사랑은 단 한 사람의 감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 속에서, 친구와의 만남 속에서, 연인과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돌 하나를 얹는다. 내가 쌓은 돌 위에 누군가가 또 다른 돌을 얹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위에 쌓는다. 그 과정 속에서 한 사람의 삶은 자신만의 피라미드를 만들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미완의 과정이다. 내가 다 쌓지 못한 벽은 누군가가 이어서 세운다. 내가 미처 다듬지 못한 모서리는 누군가의 손에서 마무리된다. 그래서 0-0-1의 사랑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를 건너는 과정이 된다.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하면 아련함이 남는다. 그러나 그 아련함은 헛된 것이 아니다. 피라미드를 완성한 이는 그것을 기초한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이어받았고, 성당을 다시 세우는 이는 파편을 찾은 사람들의 흔적을 이어갔다. 아련함은 끝을 알리지만,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사랑도 그렇다. 한 관계가 끝날 때 그 끝은 단절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기초다. 내가 다 하지 못한 사랑은 누군가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내가 남긴 흔적은 다른 누군가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결국 0-0-1의 창은 우리에게 시간의 집을 보여준다. 순간의 드러남은 반드시 멈춤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멈춤이 쌓이고 이어질 때, 삶은 거대한 무언가가 된다. 한 사람의 삶보다 더 큰 시간의 집. 세대를 지나는 흔적이 된다.
우리는 오늘의 사랑 속에서 돌 하나를 얹는다. 그것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다음 세대의 시간과 이어져 하나의 형태를 갖춘다. 그래서 사랑은 개인의 일이자, 세대의 일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존재’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았다. 그는 존재를 늘 변화하고 생성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것을 ‘되기(becoming, devenir)’라고 불렀다. 되기의 관점에서 보면, 0-0-1의 순간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의 한 국면이다. 알이 깨지는 순간, 새가 태어난 것 같지만, 사실 그 새는 여전히 자라야 하고 여전히 변해야 한다. 공연이 끝난 순간 무언가 완결된 것 같지만, 배우와 관객은 여전히 그 경험 속에서 변해 간다.
사랑은 완결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늘 변하는 과정 속에 있다. 관계는 드러나는 순간에 이미 사라지고, 사라지는 순간에 또 다른 관계의 씨앗을 품는다. 드러남은 완성이라기보다, 끊임없는 생성의 한 장면이다.
불교에서 연기(緣起)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가르침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만남 속에서만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던 줄탁동시도 연기의 장면이다. 안에서 두드림이 있고, 밖에서 응답이 있을 때만 알이 열린다. 연극의 공연도 연기의 장면이다. 배우와 관객, 조명과 무대가 함께 모일 때만 공연이 이루어진다. 세포의 주기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단백질들이 서로 신호가 맞아떨어질 때만 생명이 이어진다.
사랑 또한 연기적이다. 사랑은 혼자만의 열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의 반응과 상대의 반응, 삶의 조건, 안과 밖의 상황이 함께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드러남은 언제나 타이밍이며 관계다.
0-0-1은 드러남을 뜻한다. 산 역시 언젠가 바다가 될지 모른다. 드러남은 영속하지 않는다. 드러난 것은 반드시 다시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0으로 돌아간다. 농부는 한 해 농사를 끝내고 다시 밭을 비운다. 배우는 공연을 마치고 다시 빈 무대에 선다. 우리는 사랑이 끝난 뒤에도 다시 새로운 만남을 맞이한다. 비워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이 열린다. 삶은 이렇게 순환한다. 끝남과 돌아감, 아련함과 새로움이 이어진다. 그것이 존재의 방식이고,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방식이다.
그렇게 다시 0으로 돌아간 뒤에도 어둠이 계속될 것 같지만 결국은 빛이 찾아온다. 0-0-0의 공백은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아도 기다림 끝에서 어느 날 문득 0-0-1의 창이 열린다. 줄탁동시의 알처럼, 공연의 오늘처럼, 삶은 준비된 때에 문을 연다.
우리가 할 일은 억지로 문을 열려 하지 않는 것이다. 비워진 마음으로 기다리며, 때가 오면 반응하는 것. 사랑은 의지가 아니라 존재와 세계가 서로 두드릴 때 열리는 문이다.
믿음 속에서 우리는 기다린다. 어둠은 계속되지 않는다는 믿음, 삶이 나를 이끌어 주리라는 믿음.
결국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살아내는 일이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았다는 사실,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