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의 창, 비움과 가능성의 사랑

—땅처럼 기다림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수렴하는 사랑의 창

by 유후용

사랑은 빛이 아니라 어둠에서 시작된다. 갓난아기의 첫 울음이 그렇듯, 모든 탄생은 보이지 않는 기다림 속에서 준비된다. 아이가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서서히 자라나며 아이는 사랑의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이 태어나 무르익기까지는 그 사랑의 방향을 주도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방향을 가능케 하는 포용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땅과 같은 비움과 가능성의 사랑이며 8가지 사랑의 창 중에서 가장 깊은 어둠이자 수용의 사랑이다.


지난 5편에서 나는 인간의 본성을 0과 1이라는 이진법 기호로 설명하며 네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그중 '0→0'의 본성을 가진 이들은 빛을 경험하지만 다시 본래의 어둠, 즉 잠재성의 상태로 돌아오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결과나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과정 그 자체에 집중하며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태도를 가진다. 이들의 본성은 마치 하늘의 변화에 묵묵히 맞춰가며 생명의 문을 여는 땅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리고 지난 6편에서는 그 본성 자체는 아직 잠재적일 뿐, 순간(moment) 속에서만 현현한다고 덧붙였다. 이진법의 두 자리가 세 자리가 되는 순간, 우리는 여덟 가지 창을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창이 바로 0-0-0의 창, 비움과 가능성의 사랑이다. 0-0-0의 사랑은 바로 이처럼 고정된 방향 없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0의 순간을 담아내는 창이다.


그래서 0-0-0은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순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이미 잉태되어 있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씨앗이 흙 속에서 보이지 않게 뿌리를 뻗어가듯,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성장의 결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삶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막막한 절망의 시기라고 여기곤 한다. 관계가 멈추고, 일이 풀리지 않고,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실패했다거나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0-0-0의 사랑은 그런 순간 속에서만 드러난다. 그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순간을 감싸안는 사랑이다.


비움의 사랑


음과 양으로 빗대어 이야기한다면 0-0-0은 가장 음적인 순간이다. 모든 조합이 0이기에, 눈앞에는 빛도, 방향도, 구체적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텅 빈 어둠은 결코 무(無)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흙이다. 하늘이 아무리 기운을 흩뿌려도, 그것을 받아낼 땅이 없다면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수용은 곧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한때 내 삶이 텅 비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기를 지나온 적이 있다. 관계는 끊어지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벽을 만나 무기력하게 좌절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깨달았다. 그 비어 있던 순간이야말로 내 삶의 가능성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결실은 반드시 비어 있는 순간을 통과한다. 0-0-0의 사랑은 바로 그 공백을 두려움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품어내는 사랑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아마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고,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말이다. 그러나 그 공백은 실패가 아니라 준비다. 0-0-0의 사랑은 길을 안내하지 않는다. 대신 길이 열릴 자리를 마련한다. 0-0-0의 사랑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지금 당신이 멈춰 서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자리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이는 그 자리에서 이미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뿌리는 더 깊게 자리잡고 있으니까”


땅은 앞서가지 않는다. 땅은 방향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면, 땅은 그 기운을 받아 씨앗이 뿌리내릴 자리를 마련한다. 땅은 기다림 속에서 유순하게 힘을 담고 품어 감싼다. 0-0-0의 사랑은 그래서 언제나 기다린 이후 움직이고, 뒤를 따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선도하는 것, 먼저 나서는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0-0-0의 사랑은 다른 진실을 말해준다. 먼저 나아가려는 자는 길을 잃고, 비로소 뒤에 따르는 자가 제 길을 얻게 된다. 땅은 기다리며, 기다림으로써 길을 만든다. 그것은 계산된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비어 있음 속에서 중심을 감지하며 수용하는 능력이다.



마이아와 헤르메스


이 수용의 사랑을 서양 신화에서 찾아본다면 그리스 신화의 마이아 여신을 떠올릴 수 있다. 마이아는 플레이아데스 자매 중 가장 조용하고, 그늘속 어둠을 사랑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굴 속에 머물던 님프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장 음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바로 그 마이아가 헤르메스를 낳았다.


헤르메스는 리라를 발명하며, 신들 사이에 언어와 기술, 속도를 가져온 존재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수동적이고 음적인 듯 보였던 마이아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능동적이고 양적이며 변화의 아이콘인 헤르메스가 태어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지의 시간 속에서도 변화의 힘은 이미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다림과 수용은 곧 준비이며, 그 준비는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0-0-0의 사랑은 바로 그런 기다림과 수용 속에서 빛을 잉태한다.


마이아의 아들 헤르메스는 문제아였다. 태어나자마자 소를 훔치고, 언어를 조작하며, 신들을 농락한 이 소년은 위험하고, 반항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마이아는 그를 억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넘치도록 주었고, 그가 가진 모든 재능과 욕망을 담아낼 수 있도록 그릇을 넓혀주었다.


그녀는 아들의 ‘본성’을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그 본성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었다. 헤르메스는 어머니에게 체벌을 받기보다는, 뭐든지 충분히 받았기에 더 이상 도둑질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지식을 사기처럼 조작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자기 안의 본성을 따라, 신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정당한 안내자로 자라났다.


이것이 0-0-0의 방식이다. 이것이 땅의 방식이다. 무언가를 제어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충분히 담아낸다. 우리가 자녀든 후배든 사랑하는 이든, 누군가를 품어내고 있다면, 어디엔가 나의 헤르메스가 있다면, 이것은 충분히 생각해봄직한 일이다.


상대를 억누르지 않되 그 본성이 '필요'를 넘어서게 해주는 방식, 그것이 바로 0-0-0의 사랑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스토르게(storge)라 불리는 사랑이 있다. 이 용어는 사랑의 한 종류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는데, 흔히 가족이나 친구 사이의 애정을 의미했다. 스토르게는 다른 종류의 사랑처럼 열정적이지 않고, 깊고 편안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유대감을 강조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설명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사랑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스토르게(친밀한 애정), 에로스(낭만적,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필리아(우정)이었다.


스토르게적 사랑은 바로 이런 0-0-0의 사랑에 가깝다. 이런 사랑은 안정적이고 포근하며, 설명되지 않는 깊은 신뢰를 자아낸다. 이 사랑은 기다림 속에서 무르익는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사랑


이 사랑에는 목적이 없다. 이 사랑에는 원인도 없다. 그것은 단지 삶에 대한 반응의 사랑이다. 나는 앞선 글에서 말했듯 그것을 ‘신성한 무관심(Divine Apathy)’이라고 부른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행하고, 모든 것을 이끌고 있지만 언제나 뒤를 따른다. 어떤 것도 의도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 그것이 0-0-0의 사랑이다.


우리는 흔히 ‘방향성’이라는 말을 오해한다. 그것은 서양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목적론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 '방향성(direction)'이라는 단어에는 ‘어디로 향해 도달해야 한다’는 행위 우선의 의미가 내재한다. 그러나 방향성이란 본질적으로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외부로 뻗는 선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뿌리에서 감지되는 반응의 가능성이다. 0-0-0의 사랑은 그 두 가지, 모호함과 선명함 사이에 자리한다. 그 움직임은 결코 스스로 정한 방향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이런 사랑의 반응은 곧 관계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 단순한 원리가 모든 관계를 지탱한다. 관계는 우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 방향이 응축된 결과이며, 그 방향은 이미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0-0-0의 사랑은 먼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을 만들지는 않지만, 길이 형성되는 조건을 갖춘 채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라클의 메시지


이 사랑은 시간에 대해 다른 감각을 가진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직선으로 그린다. 그러나 0-0-0의 사랑은 시간을 원으로, 아니, 나선으로 감지한다. 시간은 반복되지만, 결코 같은 자리는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닮아 있지만 어긋나 있고, 그 어긋남은 무늬를 만든다. 그리고 이 사랑의 방향은 그러한 수용 속에서만 드러난다.


이것은 영화 《매트릭스》의 오라클이 네오를 처음 만난 장면과 연결된다. 네오를 보자 오라클은 말한다.


"Don't worry about the vase." (화병 걱정 마.)


놀란 네오가 뒤돌아보다가 화병을 떨어뜨리자, 오라클은 말한다.


"I said don’t worry about it. I’ll get one of my kids to fix it."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했잖아. 내 애들 중 하나가 고칠 거야.)


그리고 네오가 묻는다.


"Would you still have broken it if I hadn't said anything?" (내가 떨어뜨린 건 당신이 말했기 때문 아닌가요?)


오라클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 답하지 않는다.



방향을 주지 않고 단지 움직임을 정렬시키는 것. 화병을 걱정하지 말라는 오라클의 말은 그러한 메시지다. 그 순간이 어떻게 정렬될지에 대한 언급에 불과하다. 오라클은 미래를 말하지 않고 중심을 말한다. 그 중심의 말은 진정으로 비운 상태에서 기다리는 사랑에 도달한 이에게만 의미가 된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동시성이다. 0-0-0의 순간은 그 중심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타이밍이며, 그 타이밍을 놓칠 때 우리는 시간에서 미끄러진다. 중요한 것은 항상 때와 장소의 적확성이다.


어떤 길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말로 설명되지 않지만 우리는 안다.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 사랑의 길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중심에, ‘나’라는 존재가 서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나를 어떠한 목적지로 향하도록 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있는 곳’과 ‘나의 지금’을 더 깊이 인식하게 만드는 움직임이다.


때와 장소


하지만 이 타이밍은 논리적인 계산으로는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비운 채 기다리는 것이다. 길을 찾는 대신, 길이 나를 찾아올 여지를 마련한다. 0-0-0의 사랑은 그 자리에 생겨난다.


0-0-0의 사랑은 물처럼 굴절하고, 굽이진다. 그러한 것은 언제나 먼저가 아니다. 마치 하늘과 땅의 관계와도 같다. 하늘은 언제 멈춰야 하며, 언제 함께 있어야 하고, 언제 홀로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하늘은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을 열고, 땅은 생장수장이라는 순환으로 응답한다. 하늘은 시간의 방향을 설정하고, 땅은 그 방향에 맞춰, 가장 적절한 자리를 형성한다. 그래서 0-0-0은 앞서 나서면 미혹되고, 뒤에 머물면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0-0-0의 사랑은 무르익는 타이밍을 기다린다. 이 사랑에서 기다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타이밍이 어긋나면 흐트러지고, 삶은 불협의 음으로 삐걱거리게 된다. 그래서 0-0-0은 앞서가지 않는다. 대신 기다린다. 기다림은 때에 대한 직관이다.


문명이란 무엇일까. 한 방향으로 곧게 뻗은 도로, 돌을 쌓아 올린 건축물, 시간을 저장한 언어, 그리고 반복되는 패턴과 습관.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에, 문명이란 무언가를 따라가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시대의 결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 즉, 자연이 어떤 결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는 것. 그것이 문명의 시작이다. 어떤 길은 햇빛의 기울기를 따라 놓인 것이고, 어떤 건물은 바람의 통로를 막지 않도록 설계되었으며, 어떤 말들은 계절의 묘사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문명은 방향의 축적이다. 방향은 생명의 결이자, 흐름이 만드는 흔적이며, 그 결이 모이고 쌓여 하나의 형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문명이라 부른다.


나는 오래된 도시를 걸을 때 이런 사랑을 느낀다. 직선으로 끊어짐이 없는 골목, 손때 묻은 계단, 강을 따라 휘어진 거리. 그것은 누군가 계획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과 삶의 축적이 빚어낸 흔적이다. 어떤 흐름은 길이 되었고, 어떤 습관은 건축이 되었으며, 어떤 만남은 축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0-0-0의 사랑이다. 길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길이 만들어지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사랑이다.


문명은 0-0-0의 사랑의 결정체다. 0-0-0은 그래서 방향이고, 구조이며, 형태가 이룬 흔적이다. 보이지 않는 지형을 따라, 형태의 기원을 느끼는 것이다. 눈이 아니라 몸으로 읽는다. 지도 없이 걷는 여행처럼, 우회로가 정답인 길처럼, 0-0-0의 사랑은 계획을 거부한다. 나선형 계단, 돔의 곡률, 고대 성소의 천문학적 정렬, 수메르 도시의 대지진 이후 재건 패턴까지 우리는 역사적 문명의 형태에서 이런 사랑을 본다.


그리고 이 사랑의 반응은 물질을 형성해 낸다. 이는 생명의 반응이 남긴 무늬이며, 수많은 삶이 머물렀다 사라진 자리에서 천천히 증류된 방향성이다. 대지엔 모든 것이 흘러든다. 그리고 모든 반응의 결절점이 된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방향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방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은 생긴다. 그 방향은 외부로 뻗는 선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내부에서 조용히 정렬된 사랑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직선으로 그린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선형의 흐름. 하지만 0-0-0은 시간을 원으로, 아니, 나선으로 감지한다. 시간은 반복되지만, 결코 같은 자리는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닮아 있지만 어긋나 있고, 그 어긋남은 무늬를 만들고, 그 무늬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의 방향은 그러한 수용 속에서만 드러난다.



모든 관계의 시작, 본성을 온전히 사는 것


결국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 본성에 따라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그 시작이다.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용》 22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능진기성 즉능진인지성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능진인지성 즉능진물지성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능진물지성 즉가이찬천지지화육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가이찬천지지화육 즉가이여천지참의


'진기성(盡己性), 진인지성(盡人之性), 진물지성(盡物之性)'이라는 구절은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어야(盡己性) 다른 사람의 본성을 온전히 발현하게 하고(盡人之性), 나아가 만물의 본성을 온전히 발현하게 할 수 있다(盡物之性)는 뜻이다.


동양에서는 성현이 머무는 곳에 가면 모든 것이 제모습 그대로를 발현하게 된다고 말한다. 성현의 집에서는 개도 개답고, 소도 소답고, 애들은 애답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이렇게 성숙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내가 되고,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자신이 되도록 하고, 그렇게 만물이 그 자신만의 본성을 가지게 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흔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에 익숙하다. 이 말에서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듯 우선 이웃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사랑에 열려 있는 것이다. 모든 관계의 문제들이 사실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본성은 무엇인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목적지로 향하도록 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있는 곳'을 더 깊이 인식하게 만드는 움직임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 사랑은 형태는 없지만, 그 비어 있는 공간이 오히려 모든 형태를 가능케 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나 자신이 될 때, 내가 사랑하는 이도 그 자신이 되고, 내가 속한 삶 속에서 만물은 그 본래의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도, 아직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도, 모두 이미 사랑의 한가운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