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오해와 마주해 왔다. 때로는 사랑이 계산과 거래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희생의 보상을 갈망하는 고된 협상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완벽한 사랑을 꿈꾸며 상대의 불완전함을 고치려 했던 날들도 있었고,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린 순간도 있었다. 그 모든 고통은 결국 사랑이라는 모호한 언어에 포함된 크고 작은 오해들이었음을 지난 글들에서 이야기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오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우리는 자라면서 하나의 신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바로 사랑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해답이라는 믿음이다. 동화 속에서도,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사랑이 두려움과 맞서는 장면을 본다. 고군분투하던 주인공이 결국 사랑을 발견하면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랑의 빛으로 바뀌는 이야기들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주입된 이 서사는 어느새 우리 내면의 확신처럼 자리 잡는다. “사랑만 있다면, 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삶은 다르다. 사랑을 두려움의 해답으로 삼으려는 순간, 더 큰 두려움이 시작된다. 애써 붙잡은 사랑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상대의 관심이 식을까 불안해하며, 그 불안을 감추려다 더욱 집착하게 되곤 한다. 두려움을 없애려는 사랑이 오히려 새로운 두려움을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안도감으로 착각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남는 것은 더 커진 공허와 불안뿐이다.
이 모든 두려움과 불안은 단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는 인류가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해 온 더 깊은 층위와 연결되어 있다. 즉, 종족 보존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유전적 지향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내면에는 ‘충분히 오래 지속되는 결속 관계가 없다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는 뿌리 깊은 본능이 자리 잡고 있다. 출산 이후에는 ‘함께 사는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또 다른 본능이 뒤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의 실패를 두려워하고, 홀로 남겨질까 불안해하며,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을 찾는다. 또한 그 사랑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이런저런 걱정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이는 사랑을 생존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두려움 / 사랑’의 이분법은 이렇게 우리를 더 큰 함정에 빠뜨린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서로의 '다름'에 끌리지만, 동시에 세상이 정해놓은 '같음'의 틀에 갇히게 된다.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결혼하고, 비슷한 가정을 꾸리고, 비슷한 관계를 지향하게 된다. 마치 사랑과 관계에는 어떤 정해진 답이 존재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각 사람의 고유한 본성과 무관하게 전개되면서 다양한 관계의 독특한 ‘지문’을 잃어버리게 한다. 우리는 그저 정답처럼 보이는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틀에 맞추고, 심지어 배우자나 자녀까지 그 틀에 끼워 넣으려 한다.
그러나 사랑은 단지 생존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은 종종 생존과 유지를 넘어서 나이와 혈연관계를 초월한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자식에 대해 걱정하는 엄마 곁의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는 오히려 엄마에 대해 인간적으로 순수한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는 친구를 위해 목적 없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기도 하고, 위험 속에서 서로를 구하는 인간의 이타성은 유전자의 계산을 초과한다. 낯선 사람을 위해 베푸는 작은 친절, 다친 동물들을 위한 헌신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모습들은 사랑이 단지 유전자적 전략이나 생존의 본능이 아니라, 존재가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사랑을 “두려움의 반대”로 오해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을 너무 작은 틀에 가둬 버린다. 두려움은 삶의 한 순간에 이는 작은 파도일 뿐이지만, 사랑은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더 근원적인 힘이다. 파도에 휩쓸릴 때 그것이 바다의 전부라 여기기 쉽지만, 사실 바다는 파도보다 훨씬 깊고 넓다. 두려움은 삶이라는 바다 위에 잠시 이는 물결일 뿐이고 사랑은 그 바다 전체에 흐르는 물이다. 파도의 반대편에 바다가 있지 않듯,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는 것도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의 반대에 놓일 수 있을까? 사랑은 두려움과 같은 차원의 감정이 아니기에 같은 축에서 맞세워 비교할 수 없다. 사랑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려움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로 내려가야 한다.
죽음은 멈춤과 소멸이다. 모든 움직임이 닫히고, 관계가 끊기며,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지점이다. 반대로 사랑은 열림과 이어짐이다. 사랑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 있음을 드러낸다. 죽음이 모든 것을 끊는다면,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잇는다. 죽음이 닫아버린다면, 사랑은 다시 열어둔다.
아이의 탄생은 이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어둠과 침묵 속에 있던 존재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기의 첫 울음이 터진다. 그 울음은 생존의 신호이면서 동시에, 사랑이 이미 아이 안에 깃들어 있음을 드러내는 첫 외침이다. 사람들이 종종 아이의 출산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기의 첫 울음 속에서 우리는 생명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힘, 존재가 존재를 향해 열리는 모습—곧 사랑을 목격한다.
이 진실은 가족 관계 안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한 순간, 우리는 연인이나 자녀뿐 아니라 친구의 얼굴, 오래 함께한 동료의 손길, 스승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심지어 낯선 이에게 받은 작은 친절조차도 죽음 앞에서 다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닫아버리는 상황에서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의 흔적들이다. 그것은 삶이 단순한 생존을 넘어 끊임없이 서로를 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연의 순환 속에서도 우리는 이 대비를 목격한다. 겨울의 나무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인다. 잎은 모두 떨어지고, 줄기는 앙상하게 말라붙어 더 이상 소생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봄이 오면 땅 밑에서부터 생명이 밀려 올라와 다시 싹을 틔운다. 죽음은 잎이 지고 줄기가 말라가는 순간이라면,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싹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 생의 힘이다. 사랑은 계절의 변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살아있음의 가장 단순하고도 분명한 모습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의 본질을 더듬는다. 죽어가는 이가 누군가와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체온, 사람들과 함께 나눈 기억의 장면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살아 있음을 끝까지 나눈다. 죽음은 관계와 시간이 닫히는 지점이지만 사랑은 그 끝에서도 여전히 남은 불씨처럼 남아 있는 힘이다. 죽음 앞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사랑이 감정이나 행위를 넘어 삶 그 자체이며 존재의 방식임을 드러낸다.
우리가 흔히 사랑을 ‘느끼는 감정’이나 ‘행하는 행위’로만 이해하는 것은, 사랑을 지나치게 좁혀놓는 일이다. “사랑한다”라는 말은 감정의 고백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사랑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의 현현이다.
죽음이 멈춤이라면, 사랑은 움직임이다. 죽음이 끊김이라면, 사랑은 잇는 것이다. 죽음이 닫힘이라면, 사랑은 열림이다. 그래서 사랑은 두려움의 반대가 아니다. 사랑은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대립 속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은 삶 그 자체이며, 죽음의 반대편이다. 결국 우리는 사랑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본래부터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숨 쉬는 매 순간, 그 진실은 다시 발견된다.
지난 글에서 나는 인간의 본성을 1과 0으로 구분된 네 가지로 구분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각 본성은 잠재의 가능성일 뿐 그대로 삶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본성은 마치 씨앗과 같다. 씨앗은 이미 나무의 형상을 품고 있지만, 씨앗인 채로는 아직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씨앗은 흙을 뚫고 나와 햇빛과 바람을 만나며 비로소 나무로 자라난다. 인간의 본성도 이와 같다. 본성은 그 자체로는 잠재적이지만, 삶을 만나는 순간(moment) 속에서만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두 자리의 본성 (0-0, 0-1, 1-0, 1-1)에 하나의 자리를 더 붙여, 세 자리(0-0-0, 0-0-1, …, 1-1-1)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세 자리가 되는 것은 곧 삶의 순간들의 이야기이다. 잠재적 본성만으로는 결코 드러날 수 없는 인간의 사랑이, 존재의 현현이, 순간이라는 틈을 통해 얼굴을 내민다. 이진법으로 두 자리의 구분은 네 가지이지만, 세 자리의 구분은 여덟 가지가 된다. 그 여덟 가지 각 순간의 배열 속에서, 사랑은 여덟 가지 다른 빛깔로 펼쳐진다.
사랑은 멀리 무언가를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사랑이 두려움의 반대편에 놓인 빛일 때 우리는 늘 사랑을 찾아 “저 너머”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살아있음 그 자체의 사랑은 늘 생의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한다. 아이가 그린 비뚤비뚤한 그림 앞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낀다. 그 그림이 완성도가 낮다고 해도 앞으로는 더 잘 그리라는 말을 삼키게 되는 까닭은, 그 순간이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섯 살의 인간에게는 다섯 살의 순간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이 있고, 열여덟 살의 인간에게는 그 나이에만 깃든 사랑이 있다. 순간은 늘 불완전하지만, 사랑은 그런 미완의 순간 속에서만 드러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본성을 고정된 성질로 이해하지만, 본성은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한, 본성은 매번 다른 순간으로 드러난다. 인간의 본성을 1과 0으로 본 것이 인간으로서 출발하는 네 가지 문을 연 것이었다면, 각 순간의 이야기는 본성이 나타나는 풍경을 보는 창이며, 그 창을 통해 본성은 사랑이라는 형상으로 제각각의 모습을 현현한다. 마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방 안의 풍경이 창문을 열자 햇빛 속에서 살아 움직이듯, 인간의 본성도 순간 속에서만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덟 가지 순간, 여덟 가지 배열은 곧 현현하는 사랑의 원형이 된다. 그것은 완벽한 이상형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 ‘지금-여기’에서 드러나는 여덟 가지 순간이다. 어떤 순간은 예기치 못한 즐거움으로, 어떤 순간은 가능성의 성취로, 또 어떤 순간은 광대한 질서와 조우하는 경이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모두가 사랑이다. 사랑은 순간 속에서 언제나 이미 시작된다.
다음 편부터 우리는 이 여덟 가지 사랑의 창을 한 편씩 열어보려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7편 : 0-0-0의 창 비움과 가능성의 사랑. 땅처럼 기다림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수렴하는 사랑의 창.
8편 : 0-0-1의 창 사랑은 타이밍이다. 때에 맞춰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랑의 창.
9편 : 0-1-0의 창 구덩이에 빠진 채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창.
10편 : 0-1-1의 창 바람처럼 몸에 스며들어 이루어지는 사랑의 창.
11편 : 1-1-1의 창 발산하는 사랑. 어둠을 밀어내고 나아가는 빛과 같은 사랑의 창.
12편 : 1-1-0의 창 조화의 사랑.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게 하는 사랑의 창.
13편 : 1-0-1의 창 불처럼 변화무쌍한 빛의 움직임 속에서 비밀을 품은 짝사랑의 창.
14편 : 1-0-0의 창 예측 불가능한 사랑. 무질서한 혼돈과 실망 속에서 순수를 발견하는 사랑의 창.
앞으로 하나씩 살펴볼 사랑의 여덟 개의 창을 통해 사랑이 단순히 한두 가지 감정이나 행위로 정의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각각 여덟 종류의 인간으로 쪼개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따라 두 자리의 네 가지 구분 중 하나에서 살되 그 본성에 뒤따르는 1과 0의 맥락에 따라 다른 창으로 보는 것이다. 0-0-0의 텅 빈 어둠에도 사랑이 있고, 1-1-1의 발산하는 빛의 사랑도 있다. 격렬한 감정 속에서도, 늪에 빠진 느낌 속에서도,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움직임은 항상 사랑이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존재의 방식이다. 사랑은 끊임없이 드러나고 이어지는 살아 있는 순간들 자체다. 네 가지 본성 이전의 1과 0을 보자.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에 0이었고, 삶을 통해 0에서 1 사이의 무수한 순간을 지난다. 사랑은 0에서 1이 되어가는 과정 사이에 있는 모든 미완의 순간들이다. 사랑의 완성은 죽음이며, 1이다.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사랑은 늘 완결되지 않은 채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완성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서툰 모습, 불안한 마음, 티격대는 관계 속에서도 사랑은 이미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오늘 이 순간을 살아 있음으로 이미 사랑은 존재하고 있다. 당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든, 어떤 모습이든, 그 자체가 사랑의 한 순간임을 잊지 않기를.
세 자리의 여덟 가지 양상은 사랑이라는 존재 방식이 서로 다른 순간에 드러나는 모습들이다. 우리는 이 여덟 개의 창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가지가 뻗어나가듯 사랑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0과 1의 세 자리 조합(0-0–0)이 여덟 가지라면, 여섯 자리(0-0-1-0-0-1)의 조합은 예순네 가지가 된다. 인간의 삶은 그만큼 무궁무진하게 갈라지고 흘러간다. 그러나 그 모든 갈래가 결국 하나의 뿌리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뿌리의 이름은 사랑이다.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사랑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