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에 대한 1과 0

by 유후용

나는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사랑은 언제나 나 자신으로 되돌아왔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 관계 속에서 사랑하고 상처받게 되며 다시 치유되는 일 모두 결국은 같은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가?”


지난 글들에서 관계라는 바깥 풍경을 1과 0으로 그려보았다면 이번에는 그 렌즈를 조금 안쪽으로 돌려본다. 타인과 마주하기 전에 이미 내 안에는 또 하나의 관계가 있다. 몸과 의식이 서로를 바라보며 주고받는 대화, 그 안에도 네 가지 서로 다른 길이 숨어 있다.


우리 안에도 두 존재가 함께 살고 있다. 하나는 몸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이다. 몸을 0이라 하고 의식을 1이라 부를 수 있다. 의식은 늘 몸을 바라본다. 빛이 어둠을 비추듯, 1은 0을 응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몸을 잘 돌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몸은 의식이 생각하는 대로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몸은 이미 자기만의 궤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궤적을 따라 묵묵히 흘러갈 뿐이다.


무언가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것은 의식의 언어이고, 욕망과 충동은 몸의 언어다. 하지만 의식은 늘 자신이 몸을 다스린다고 믿는다. 마치 자기가 주인이고 몸은 따르는 하인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정반대다. 의식이야말로 허상 위에 세워져 있다. 의식은 결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스쳐 지나가는 덧없는 상태 속에서 변화하고 있다. 몸과 마찬가지로 의식도 본래는 0에 불과하다.


0.jpeg


‘나’ 자신이 되어가는 길은 주어진 현실에 화려한 덧칠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해진 환상을 하나씩 걷어내는 과정이다. 스스로를 1이라고 믿던 자리에서 내려와서 본래 0이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일인 것이다. 거기서 몸은 더 이상 의식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되고, 의식은 몸을 굴복시키려 애쓰지 않는다. 의식과 몸, 이 둘은 합쳐지지 않는다. 대신 같은 세계 위에서 각각의 이름이 없이 '나'라는 뭉뚱그려진 이름으로 나란히 존재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저마다의 결을 안고 온다. 빛은 드러남과 인식, 확인과 인정의 성질을 담고, 어둠은 보호와 잠복, 잠재와 변화 가능성을 품는다. 이 두 축이 만나면서 0과 1이라는 단순한 기호 위에 네 가지 양상이 생긴다. 0과 1은 몸과 의식, 어둠과 빛, 음과 양으로 치환될 수 있지만 핵심은 언제나 같다. 1은 드러남이고, 0은 잠재다. 우리가 걸어가려는 이야기는 바로 이 두 극이 한 사람의 내부에서 어떻게 교차하고, 그 교차가 어떤 삶의 풍경을 만들어내는가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1과 0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흑백의 대상이 아니다. 몸과 의식, 드러남과 잠재가 늘 변화하며 서로를 비추고 또 가린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네 가지 고유한 패턴이 드러난다. 이것은 인간을 네 가지 유형으로 단순히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본성을 드러내는 네 가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5번글 그림.jpeg

1. 빛이면서 어둠을 보는 사람 (1→0)


1은 이미 스스로가 빛이다. 여기서 빛은 도덕적 선이나 이상이 아니라, 세계를 주관하는 질서 그 자체다. 이 질서는 외부에서 주어진 교훈이 아니라 태초부터 몸과 의식 속에 놓여 있던 감각이다. 그렇기에 1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둠 또한 질서를 변형시키는 또 다른 원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1 이 어둠을 바라보는 것은 호기심이나 구원의 의지가 아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정밀하게 맞물린 기계가 돌아가는 방에 빛을 비추었을 때, 남몰래 규칙을 깨뜨리는 톱니를 발견하는 순간과 같다. 그 순간 1은 전율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광대함과 생동 때문이다. 어둠에는 빛이 가질 수 없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두 세계는 합일할 수 없다. 1→0의 인간에게 세계와의 만남은 언제나 순간적이다. 찰나가 지나면 그는 변함없이 자신의 본질로 돌아간다.


1_0.jpeg

많은 이들에게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혼돈처럼 보인다. 규칙도, 질서도 없는 듯 보이는 거대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쉽게 길을 잃는다. 하지만 1→0의 본성을 지닌 사람은 그 속에서도 묘한 패턴을 발견한다. 무작위로 흩뿌려진 별들 속에서 별자리를 찾아내듯이, 겉으로는 뒤죽박죽인 세상에서도 보이지 않는 질서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런 시선은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말한 '종교적 인간'과도 닮아 있다. 그는 세상을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저마다 신성한 의미와 질서를 품은 상징의 장으로 바라봤다. 그러니 1→0의 눈에 비친 세상은 단순한 카오스가 아니라, 곳곳에 숨은 우주의 질서가 끊임없이 드러나는 살아 있는 무대와도 같다.

그에게 종교적 인간이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신성한 의미와 질서 속에서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1→0의 사람들을 보면 세상은 무작위의 파편이 아니라 신성한 원형을 품은 정교한 패턴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질서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가 사는 공간은 더 이상 평범한 물리적 영역이 아니다. 대신 우주의 중심을 향하는 신성한 성역이 된다. 마치 고대 문명이 도시를 건설할 때 우주의 법칙을 모방했듯, 우리의 삶의 터전은 작은 우주(소우주)가 되어 큰 우주(대우주)를 상징하게 된다. 이는 거미가 본능적으로 완벽한 원형의 거미줄을 짜는 것처럼, 인간이 본성적으로 질서를 추구하고 구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시간 역시 단순한 선형의 흐름이 아니다. 매년 갱신되는 순환, 즉 재탄생의 사이클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차례, 절기마다 이어지는 축제, 태양신의 축제에서 유래한 크리스마스처럼, 이 모든 전통은 우주의 주기와 연결되어 있다. 매년 1월 1일은 시간을 정화하는 거대한 대청소의 날이며, 인간의 삶은 이 순환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이러한 원형적인 사이클은 곧 신화가 되기도 한다. 신화는 인간 최초의 행위이자 가장 근원적인 주기 프로그램이다. 인류의 역사와 전통, 신화와 원형은 모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재인식시키는 거룩한 행위의 반복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1의 질서적 관점에선 세상을 다름(0 그 자체)이 아니라 틀림(1이 되지 못함)으로 보기 쉽다. 타인을 생생한 코스모스로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엉망이 되어버린 카오스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세상을 틀림으로 본다는 것은 내가 그 세상의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본질적으로 나 자신은 1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1→0은 다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되 참여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1→0의 삶은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빛인 존재가 자신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어둠과 혼돈의 패턴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세계의 더 깊은 원리를 엿보는 과정이다.


2. 어둠이면서 일시적 빛의 과정을 겪는 사람 (0→0)


0은 본래 어둠이다. 그러나 이 어둠은 무지나 결핍이 아니다. 마치 아직 채워지지 않은 여백처럼 어떤 질서도 세워지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다. 0은 규칙을 부여받아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무규정성 속에서 빛을 기다린다. 삶은 그들에게 늘 잠시의 빛을 허락하지만 그 빛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결국 다시 본래 자신의 어둠으로 돌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를 단일 회로 기판에 비유해 보자. 전자가 흘러 무엇인가를 작동시키듯, 모든 삶은 On과 Off, 1과 0의 스위치 위에서 움직인다. 이 어둠의 본질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이다. 언제나 새로운 변화 가능성을 기다리며, ‘예스’와 ‘노’ 사이에서 삶을 만들어낸다.


'무언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삶을 만들어낸다. 예스가 맞으면 노가 틀리고, 노가 맞으면 예스가 틀리다. 그래서 두 선택지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오류를 품고 있다. 무언가는 늘 맞고 무언가는 늘 틀리기 때문이다. 예스, 노의 구분이 없는 상태가 되려면 태어나지 않거나 죽어야 한다. 결국 삶은 1과 0을 오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질문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산다.


0_0.jpeg


예전에 마이클 밀스라는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제목은 <Not How, Or When, Or Why, But Yes 어떻게, 혹은 언제, 혹은 왜가 아니라, 예스> 이다. 제목이 표현하는 대로, 죽음에 대한 테마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그 다큐멘터리는 인터뷰만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연령과 성별이 다양한 여러 평범한 사람들이 나온다. 감독은 처음엔, 3개월 후에 당신은 죽는다는 상황을 준다. 그러나 몸도, 뇌도, 아무 이상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가 3개월 후에 정확히 딱 죽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기간에 할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사람들의 대답은 제각각 다르다. 대부분은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빠듯하게 죽을 준비를 하려고 한다. 중년이 넘은 사람들은 자산 처우 문제도 얘기하고, 가족에 대한 이런저런 정리 등을 얘기한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누군가와 짧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는 대답이 많았다.


젊은 부부는 오로지 아이 걱정뿐이다.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듣게 되는 대답은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프랑스의 파리를 얘기하고, 혹은 전 세계 어디든 다양하다. 여행 얘기는 거의 빠짐없이 나왔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거나, 가족 모두와 함께 사랑을 공유하고 싶다는 이야기들도 공통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질문자는 기간을 바꾼다. 이번엔 3개월이 아니라 일주일이다. 그리고 다시, 다섯 가지 중요한 것을 묻는다. 사람들은 다소 당황한다. 3개월이었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일주일이면 시간이 얼마 없다. 그들은 3개월 계획에서 우선순위를 골라낸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이 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정치인을 암살하겠다던 10대는 암살 계획을 포기한다. 그 10대는 불현듯 엄마와의 갈등 얘기를 꺼낸다. 엄마와 꼭 나눌 얘기가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일주일 동안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것만 먹겠다고 한다.


큰아들과 3개월간 여행을 다니겠노라고 했던 어떤 자애로운 엄마는 불현듯 큰아들에게 동생을 잘 보살피라는 책임감을 강조하겠다 한다.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다는 노인은 오직 자녀들 얘기만 한다. 노인의 자녀 다섯이 각각 다른 지역에 사는데, 일주일이면 그 자녀들을 다 만나러 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며 혀를 찬다.


3개월 동안 삶이 남아 있을 때 자식들에게 자산을 분배할 계획을 세우던 한 노인은 이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면서 깨달은 바를 말하고 싶다고 한다. 그 말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누구도 더 이상 여행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중요해지고, 특히 삶에서 중요한 사람들과 소통이 거의 전부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다. 질문자는 이제 남아 있는 삶을 12시간으로 바꾼다. '지금으로부터 12시간 이후 당신은 죽는다. 12시간 동안은 몸이 멀쩡하다. 무엇을 하겠나?'


사람들은 이제 더욱 당황한다. 이 질문은 3개월부터 시작했고, 그리고 1주일, 그런 흐름으로 왔기 때문에 흥미롭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겐 준비 없이 심리적으로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는 기분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인터뷰하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생각’ 하기를 포기하기 시작한다. 생각은 1이었고 그들의 본질은 0이었다. 이제 슬슬 0의 반응이 튀어나온다. 가장 중요한 것들, 그냥 ‘지금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자산 분배와 무소유를 말하던 노인은 갑자기 마리화나를 사서 죽기 전까지 피우다 가겠다 하고,

아들을 사랑하던 엄마는 불현듯 아들에게 쌓인 분노를 표출하며 울다가 끝내는 아들에게 아무 할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냥 아들을 찾아가서 말없이 안아주고 마지막 밥을 정성껏 차려주고 싶은 게 전부라고 한다.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계속 자전거를 타겠다 하고, 평범한 직장인인 누군가는 회사를 출근하지 않고 죽기 전까지 12시간 동안 그림만을 그리겠다 한다. 꼭 해보고 싶던 요리를 해서 맛보고 죽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더 이상 어떤 항구적 소통과 표현은 없다. 단지 일시적 행위들만이 있다.


초반 질문에서 사람들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좁혀질수록 사람들의 대답은 바뀌었다. 처음에는 ‘삶은 무엇인가’를 말했다면, 나중에는 오직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만 남았다.

질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을 물었지만, 그래도 초반에는 순수하게 당장 할 일 그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던 것이다.


과거 이냐시오 로욜라라는 가톨릭 성인이 있다. 그는 평생의 과업처럼 예수회를 창립했으며, 예수회 신학 대학을 세웠고 교육에 힘썼다. 말년에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만약 교황이 예수회 신학대학을 탄압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냐고 말이다. 이냐시오는 대답했다. “25분 정도 기도하고는 그에 대해 더 이상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그것이 평생의 과업이면 어떻고, 이런들 저런들 어떠한가. 본디 0이었던 나의 존재는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한 순수함으로만 존재한다. 그뿐이다. ‘신성한 무관심’이다.


0이 빛을 경험하는 이유는 영구적인 각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바다에서 잠시 수면 위로 올라와 하늘을 바라보고 다시 잠수하는 거북이의 숨과 같다. 0은 태생적으로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 이것은 고정된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과정과 경험 자체에 몸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빛은 늘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다가온다. 이들은 그 빛을 붙잡지 않는다. 오히려 빛은 잠시 스쳐 지나며 이에 대한 신성한 무관심을 유지할 때 자신이 머무는 어둠의 풍경과 변화를 새롭게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들에게 1의 빛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둠은 본래 그들이 자리하는 광대한 무한함이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삶을 가꾸고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호흡한다. 이들은 그 두 세계를 모두 알고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써 양쪽 모두를 경험한다.


3. 어둠에서 빛을 향하는 사람 (0→1)


0→1은 자신이 본디 어둠이지만, 0→0과는 다르다. 0→1 은 빛에 이르고자 하는 어둠이다. 그 어둠은 단순한 무지나 결핍이 아니라, 빛을 향한 이끌림을 간직한 씨앗 같은 상태다. 스스로 발광하지는 않지만, 빛이 드리우는 길을 감지할 수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안에서 빛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위에서 발견한 빛이 본래의 힘을 드러내도록 돕는 일이다. 이 과정은 봉사나 헌신이라기보다, 빛과 자신이 함께 완성되는 순간을 함께 하려는 내밀한 갈망에 가깝다.


0_1.jpeg


0→1은 자기 안에 다른 사람과 융합되기 위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호기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에게 집중을 하다 보니,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 저격수의 딜레마와 같다.


저격수의 관점에서 본다고 해보자. 저격수는 타깃에 집중을 하다 보니 주변 상황이나 자기를 누가 노리고 있는지 상대적으로 보기가 어렵다. 0→1 이 자신이 호기심을 가진 어떤 사람, 그런 1을 보여주는 존재에게 집중하는 동안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문제가 생기고 있는지를 전혀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본성을 가진 사람들에겐 내가 누구와 관계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스스로 들여다보려 하면 잘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0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0→1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의 말처럼 “모든 진실은 상대적이다.” 그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했다. 예를 들어, 같은 바람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춥게 느껴질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이 두 가지 경험 모두가 각자에게는 진실이라고 보았다. 즉, 절대적으로 '시원하다'거나 '춥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프로타고라스는 공동체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각각의 개인에게 맞는 더 유용한 진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보았고, 이것이 바로 소피스트로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설득하는 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객관적인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보는 것이다. 그의 말은 절대적 진리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는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0→1의 상대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자주 빠져드는 오류가 있다. 자기만의 어떤 관점에서 타인을 판단해 버리고 단정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떤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이런 것들로 스스로를 인식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너무 빠져들어서 '나, 나, 나' 하는 것 말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은 0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0이 아닌 1로 보는 관점에서 세상을 대할 때 이들은 타인에 대한 반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처음 자신의 부모를 본다고 해보자. '저 분들은 어떤 분들이구나' 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런데 자신이 0이고 1을 향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타인의 내면을 관통해서 볼 수 있다. 이런 부분이 0→0과의 가장 큰 차이다.


예를 들어서 엄마를 본다고 하자. 엄마는 늘 '난 괜찮다'고 말하는데 0→1이 보면 사실은 엄마가 우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서 보지 않는다면 단순히 투명하게 보는 것이 가능하다. 즉, 엄마가 자신을 잘 돌아보지 않았거나, 단순히 감정을 더 잘 다루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를 보더라도 자신이 보는 장면이 그냥 거울일 뿐이라는걸 알고 있으며, 그래서 스스로는 엄마와 함께 거울에 비친 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0→1 은 그렇게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울이 아니라 실제로 이것이 ‘나’의 삶이다 라고 내재화하는 것이다. 0으로서 어떤 관계에 대해 스스로가 영원한 손님이 되어 투명한 자신(0)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원하는 방식(1)을 자기 것으로 내재화시키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안에 뭔가 내가 아닌 것이 나를 잔뜩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부모를 떠나서는 친구, 나에게 영향을 줬던 이들이나, 혹은 연인, 선생님 누구든 그런 사람들이 날 채우고 있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거울이었을 뿐이다. ‘나’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거울이었다.


이런 자각을 통해 0→1의 삶은 나도 저 빛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저 빛이 가장 잘 살아날까?'라는 질문에 몰두한다. 그들은 빛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빛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도록 환경과 흐름을 조율하고 있을 뿐이다. 그 길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바꿀 수 있나? 내가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이것이 0→1의 본성을 가진 이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뭔가 바꾸려고 하기 전에 알아야 될 것은 아직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행복한 바보가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원래 바보로 살아야 행복한 사람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나무는 나무답게, 바보는 바보답게 산다. 세상엔 바보도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바꿀 수 없다. 행복한 바보가 바보이길 멈추게 할 수 없다.


0→1 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것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보고 있는 건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다원적인 생명 현상의 패턴인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상은 질문이 먼저가 아니라 항상 답이 먼저다. 삶은 매 순간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부터가 그렇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질문지를 받지는 않는다. 부모님을 선택하고 집을 선택하고 그렇게 키오스크 주문처럼 태어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보니까 이런 삶을 만났다. 언제나 우리의 주어진 삶이 답이라는 것이다. 늘 그 현재가 답이다. 지금 이 순간이 답이고, 늘 완성이다. 그러면 누군가를 본다는 것, 그리고 1을 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를 투명하게 보는 것은 상대방이 이미 답(1)으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그 상대방이 본인 스스로 답이라는 걸 모르고 있을 때 그 의구심을 점점 사라지게 하는 힘이다.


스스로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묻는다. “당신은 바보입니까?”

“네. 저는 바보인 것 같아요.”

“네가 바보인 줄 알고 있어?”

“네.”

“바보는 모르는 사람 아니야?”

“네. 그렇죠.”

“그럼 네가 바보라는 것도 몰라야 바보 아닌가?”

“오 그러네요. 난 바보가 아니네요.”


결국 최고의 질문은 상대에게서 답이 필요가 없게 만드는 질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본인이 답을 찾게 해주는 질문이다. 타인을 보려면 자신이 깨끗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내 방이 텅 빈 방이어야 그 사람이 들어왔을 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고 온갖 의구심이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 물음표는 바로 뭘로 이어질까? 그건 상대방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고정된 1의 틀 안에서 그 사람을 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정말로 상대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 1의 프레임 안에서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질문은 계속 엇나가는 일이 생긴다. 0→1 이 자기 안에서 어떤 프레임을 설정하여 타인을 대하기 시작하면 그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가 점점 왜곡되기 시작한다. 결국엔 관계가 점점 괴롭고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자신의 마음 안의 방에 있는 그 사람 말고 실제로 저 앞에 있는 사람을 봐야 한다. 스스로는 0이기에 자신 안에서는 그를 알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좀 벗어난 이야기라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엔 한 가지 가치관으로만 정의 내릴 수 없는 다양한 방식의 삶이 있다. 나는 이것을 음과 양, 0과 1이라는 원리로 그 본질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사랑을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시키려는 것에서 수많은 사랑의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듯, 인간에 있어서도 모든 인간이 하나의 가치관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 하는 경우처럼 느껴질 수 있다.


4. 빛이면서 다른 빛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 (1→1)


1은 스스로가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고립된 발광이 아니다. 스스로 타오르면서도 다른 빛이 일어나는 순간을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 그 만남은 사건이라기보다 고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개시다. 두 개의 빛이 나란히 서는 순간, 일이 일어난다. 1은 그 나타남 속에서 평온을 느낀다. 그것은 빛으로서 다른 빛을 온전히 목격할 수 있는 평온이다.


1_1.jpeg


빛은 질서다. 그리고 평화는 질서가 구현될 때 유지되는 상태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다. 빛과 빛이 겹치지 않고도 서로를 해치지 않으며 서로의 궤적을 존중하는 상태로 나아간다. 1은 이 질서를 깰 의도가 없지만 때로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단호해진다.


1과 0을 아주 기본적으로 구분해 보자. 1을 양으로 0을 음으로 보면, 양은 하늘이고 음은 땅이다. 주역에서 하늘은 건乾이고 땅은 곤坤이다. 그리고 하늘의 특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늘이 쉽다는 것이다.


乾以易知 坤以簡能

건이이지 곤이간능


공자님이 쓰신 주역 계사전의 말이다. ‘건이이지 乾以易知’ 건은 쉽게 주관한다는 뜻이다. ‘곤이간능 坤以簡能’, 곤은 간단하게 해낸다는 뜻이다. 하늘은 주관하는 것을 쉽게 하고, 땅은 이루는 것을 간단하게 한다. 여기 땅은 위에 언급했던 0→0에 가깝다. 신성한 무관심의 태도를 보였던 이냐시오 로욜라처럼 뭐든지 복잡하지 않게 해내는 모습이다.


그리고 1→1은 쉽게 주관한다고 한다. 무엇을 쉽게 주관할까? 하늘은 만물을 시작하고 이루는 것을 쉽게 한다. 예를 들어 하늘은 계절을 주관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면 쉽다. 어느새 보고 있으면 한 해가 다 가있다. 하늘은 계절을 흘러가게 하는 것에 대해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어련히 알아서 흘러가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을 보면 시간을 알고, 별을 보면 모든 걸 다 펼쳐놔서 알려준다.


땅은 그에 대해 간단하게 해낸다. 땅은 하늘의 변화에 따라 맞춰서 간단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에는 하늘에 맞추느라고 생명의 문을 연다.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루기 위해서는 땅이 다시 문을 닫는다. 닫아야 생명이 맺힌다.


세상을 라디오라고 상상해 보자. 라디오를 간단하게 음악을 나오게 하는 부분과, 조그 다이얼이 있는 두 부분으로 구분해 보자. 조그 다이얼을 돌리면, 음악이 나오는 주파수를 맞춘다. 좋은 음악이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다 조그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 1→1의 앞의 1이고, 딱 맞게 음악이 잡음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뒤의 1이다. 그런데 잡음이 많거나 음악이 제대로 안 나오거나, 등등의 경우는 어떨까? 불쾌할 것이다.


스스로가 하늘로서 봄을 시작했는데 땅이 새싹을 틔우지 않는다면? 여름의 태양을 줬는데 빛이 대기에 가려져 한파가 찾아온다면? 1→1의 과정에서는 항상 이런 저항감에 대한 격정이 동반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0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1→1의 본성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1이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단지 질서를 감지할 뿐, 그것이 고정된 나 자신이 될 수는 없다.


즉, 빛으로서 새로운 빛을 찾아 나서는 일은 기다림에 가깝다. 무작정 빛을 쏘아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질서의 순간을 감지해 나가는 것이다. 빛은 간혹 길모퉁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빛과 마주친다. 그 순간 자신의 빛이 조금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1→1이 무언가를 시작하게 될 때 그것은 그 일(1)을 시작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지금 이곳에서 일어날 것임을 감지하고 알려주는 의미의 시작이다. 아무도 1→1만큼 그런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이런 시작의 감각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하나가 될 때 이들은 삶이 자신을 방해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네 가지 본성


빛과 어둠, 몸과 의식은 네 가지의 다른 본성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단순히 네 가지로 인간의 유형을 나누는 일이 아니다. 이 네 가지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살아내는 각각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구분들은 언제나 이어지고, 겹치고, 변주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나의 삶 속에서 내 안의 빛과 어둠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를 듣는 일일지 모른다. 그 대화는 때로 찰나의 전율로, 때로는 무심한 깊이로, 때로는 불가해한 흐름으로 우리 삶 속에 스며든다.


그리고 이야기가 조금 더 확장될 때, 이 네 가지 본성은 서로 얽히고 겹쳐져 새로운 창을 연다. 이제 우리는 그 위에 각각 0과 1을 하나씩 더 덧대어, 여덟 개의 창처럼 펼쳐지는 또 다른 풍경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6.jpeg


작가의 이전글사랑의 이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