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진법

by 유후용

사랑의 글을 쓴다는 것은 늘 위험한 일이다. 사랑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내가 느꼈던 사랑의 온기와 떨림, 그 불안과 설렘은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다른 사람의 기억과 맞닿고, 때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색으로 물들어버린다. 그렇게 사랑의 글은 언제나 나를 떠나 읽는 사람 속에서 새로운 사랑이 된다.


이 위험은 동시에 매혹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을 비춰 본다. 그 안에서 잊었던 얼굴을 떠올리고 지나간 계절의 냄새를 맡는다. 사랑의 글은 그래서 위험하고 또 그래서 멈출 수 없다. 사랑을 쓰는 일은 그 사랑이 이미 끝났음을 추모하는 일이면서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을 쓰며 한 사람의 삶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사랑의 얼굴들을 떠올린다. 가볍게 스쳤던 인연이 있고 불같이 타올랐다가 재로 사라진 사랑이 있다.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채 흘려보낸 관계들이 있다. 어떤 사랑은 많은 것을 감춰둔 채 오래 지속되었고, 어떤 사랑은 모든 것이 드러나면서도 끝까지 건너편에 닿지 못했다.


사랑은 그렇게 무수한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것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어떤 것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어떤 조각은 손에 쥐어도 모양이 잡히지 않고, 어떤 조각은 너무 날카로워 오래 쥘 수 없다.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패턴의 정체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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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들에서 나는 이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았다. 처음엔 그것을 ‘사랑받는 나’라는 이름으로, 또한 조건과 보상, 성공이라는 현실의 얼굴로, 그리고 욕망과 환상, 완벽과 미스터리라는 초현실의 그림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할수록 내가 이야기한 사랑의 이름들이 서로 공통된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각각의 사랑들은 서로 전혀 다른 장면처럼 보였지만 실은 일부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결은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있었던 어떤 원리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여는 방식, 때로는 마음을 닫는 방식,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그 원리를 알게 되면 사랑의 조각들이 어떻게 맞물려 하나의 그림이 되는지 비로소 보일 것만 같았다.


이번 글은 그 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사랑을 더 깊게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흩어진 조각들을 꿰어 각각의 이름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사랑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하게 얽힌 장면들이 문득 단순한 형태로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느껴지는 것은 놀라움이다. 왜냐하면 그 단순함이 단순한 줄무늬나 색깔처럼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이야기를 지탱하는 뼈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뼈대는 생각보다 아주 간단한 두 가지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힘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비유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이다. 문이 열릴 때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문이 닫히면 우리는 머무르거나, 바깥에서 기다려야 한다. 사랑 속에서도 이 두 가지 힘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마음이 열리면 서로가 지나가고 마음이 닫히면 아무리 가까워도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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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두 가지 힘으로 설명되어 왔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음(陰)과 양(陽)이라 불렀다. 음은 감추는 힘이고, 양은 드러내는 힘이다.

300여 년 전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이 0과 1의 조합이 고대 중국의 《주역》과 똑같이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주역》에는 음과 양이 선(-)과 끊긴 선(--)으로 표현되는데 양을 1, 음을 0으로 바꾸면 여섯 개의 선으로 만든 주역의 64개의 괘가 정확히 6자리 이진수 64개와 일치한다. 라이프니츠는 깜짝 놀라 "이 단순한 0과 1이 세상의 모든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주역의 원리이자 오늘날 컴퓨터가 움직이는 기본 원리다.


우리의 사진, 영화, 음악, 메시지, 심지어 이 글도 결국은 0과 1의 긴 행렬로 변환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비트라는 이 최소 단위의 조합으로 컴퓨터는 세계를 그려내고, 인간의 언어와 이미지, 소리와 기억을 담는다.


0은 '없음'이고, 1은 '있음'이다. 이 둘은 마치 밤과 낮이 서로를 완성하듯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0은 1이 되려고 하고 1은 0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없음은 있음을 품고, 있음은 없음을 품는다.

그런데 이 단순한 0과 1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랑하는 방식을 설명할 때도 놀랍도록 잘 맞아떨어진다. 만약 세상 모든 관계를 0과 1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양을 남자, 음을 여자로 단순하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남자에게도 음의 성향이 있고 여자에게도 양의 성향이 있다. 음과 양은 모든 만물에 내재한 특징이다. 양은 드러남이다. 빛이나 태양처럼 나를 감추지 않는 힘이다. 음은 감춤이다. 어둠처럼 나를 온전히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지켜내는 힘이다. 결국 사랑은 이 두 힘이 만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마치 디지털 코드의 1과 0이 서로 만나 이진법적인 네 가지 조합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도 그 네 가지 조합의 기본적인 구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양과 음의 원리는 모든 변화의 모습과 만남의 형태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어떤 관계든, 그 안에는 이미 이 네 가지 특성 중 하나가 들어 있다. '부울대수'라는 수학 분야에서는 이 네 패턴이 현상계에서 가능한 모든 상태의 조합이라고 말한다. 정보이론에서는 이것을 상태 전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우리가 겪는 모든 만남의 네 가지 원형이다.


물론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데에는 위험이 있다. 사랑은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틀을 이해하면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흐름을 조금 더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다. 나와 상대가 지금 1인지 0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순서로 이어져 왔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보인다.

이제 우리는 이 단순한 기호 두 개로 사랑의 패턴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다.


빛과 빛의 만남 (1-1)


우리가 만나는 순간의 전율은 없었다. 물 위에 파문 하나 일지 않는 것처럼 우린 고요한 호수에 평화로운 종이배가 천천히 다가오듯 자연스럽게 마주 앉게 되었다. 상대는 이상하게 편했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세상에서 느꼈던 모든 긴장을 내려놓게 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른하고 졸린 기분마저도 들었다.


빛과 빛이 만나는 순간은 이렇다. 둘 다 이미 빛을 품고 있기에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찾듯 서로를 찾지 않는다. 그저 서로 빛을 발화하며 나란히 함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갈등이나 상처는 잘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안정에도 작은 그림자는 있다. 너무 잘 맞아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문득 '이게 전부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뜨거운 불꽃은 없지만 사실상 꺼질 위험도 없는 빛의 안정감이 있다. 그 빛이 서로에게 계속 함께하는 이유가 될지 아닐지는 서로가 함께 보내는 계절들이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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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가명)와 지훈(가명)의 이야기


민서: "우린 첫 만남부터 서로 마음이 놓였어요.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제가 아무 준비도 안 해도 됐거든요. 그런데... 너무 잘 맞으니까 가끔은 좀 심심한 것 같기도 해요.”

지훈: "맞아요, 그래서 처음엔 그냥 친구처럼 느꼈죠. 근데 오래 함께하니까 이런 편안함이 결국 내가 계속 찾던 거였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가 아직 젊지만 이런 관계는 나이로 치면 약간 노부부 같은 그런 사이예요."

빛과 빛의 만남은 사랑의 한 형태지만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인생 곳곳에서 나타난다. 오래 함께하게 되는 죽이 잘 맞는 동료, 같은 톤으로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첫 만남부터 가족 같은 느낌. 이런 관계에서는 서로의 빛을 확인하고 굳이 맞서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단순히 함께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관계다.


안정과 권태, 동전의 양면


이처럼 빛과 빛의 만남은 편안함이라는 가장 견고한 바탕 위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그 안정은 때로 권태라는 이름의 작은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뜨거운 불꽃을 찾아 헤매던 시절의 열정이 부재한 자리에, '이게 전부일까?'라는 의문이 조용히 고개를 드는 것이다. 빛이 빛을 더하는 것은 빛의 존재감을 더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런 관계는 그저 함께 보내는 시간의 깊이로 서로를 발견해야 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0-1)


세상 모든 관계를 두 개의 숫자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자. 1과 0. 앞서 말한 듯 둘 다 빛이면(1→1) 이미 밝은 곳에서 서로를 본다. 하지만 한쪽만 빛이고, 한쪽은 어둠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출발지가 어둠인데 종착지가 빛이라면 무한하고 광대했던 어둠은 빛에 의해 특정한 것들로 규정될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은 그 빛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이 부셔도, 방향이 낯설어도, 혹여 그 빛이 탐탁지 않아도 말이다. 처음에는 그러한 나아감이 사랑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는 언뜻 보이지 않던 긴장이 있다. 한 사람은 그대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끊임없이 맞춰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맞추는 쪽은 점점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본성을 억압받는다고 느낀다.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러한 억압이 서로의 사랑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0→1의 관계가 단순히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관계는 세상에서 흔하다. 다만 중요한 건 이 관계의 핵심이 0의 수용이라는 점이다. 그 수용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본래 0이었다는 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성찰을 통해 상대의 1, 상대가 발하고 있는 빛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0에서 1로 나아가는 과정은 상대의 빛을 향한 동경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은밀한 시도가 되기도 한다. 지난 에세이에서 만났던 수연(가명)이 상대방의 고요한 침묵을 '대화가 안 되는 문제'라 여기고 끊임없이 말을 이끌어내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완벽한 사랑에 대한 프레임으로 보며 연인이 감정을 감추고 있다는 오해에 사로잡혔고, 결국 그 프레임에 상대를 끼워 맞추려 했다. 또 어떤 이는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고쳐야 할 숙제'로 삼고, '너는 이렇게 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이것은 상대의 변화를 통해 나의 불안을 덮으려는 위태로운 방식이며, 사랑을 완벽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환상이 빚어낸 잔인한 집착이었다.


0에서 1로 나아가는 과정은 단순한 동경을 넘어 때로는 0인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은밀한 시도가 되기도 한다.


지난 에세이에 2편에서 만났던 소라(가명)의 이야기에서 사랑을 성공과 생존의 문제로 계산하고 조건을 걸며 상대를 자신의 틀에 맞추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의욕적 사랑은 상대에게 야심차고 정 없는 계약으로 읽혔다. 또한 모연(가명)은 부모님의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말에 사랑을 갚거나 증명해야 할 무언가로 여겼다. 그녀는 희생을 사랑의 가장 그럴듯한 얼굴로 삼았지만 그 이면에는 억눌린 분노가 깊이 서려 있었다. 이처럼 0→1의 사랑은 상대에게서 인정과 보상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마음의 그림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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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와 민호의 이야기


윤주(가명)와 민호(가명)는 동거를 준비하고 있으며, 2년 정도 연애를 했다. 민호는 요리를 좋아했고, 자신이 정성 들여 꾸민 부엌을 좋아했다. 민호는 자신의 부엌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에서 만족을 느꼈다. 서랍 속 식기들이 어떻게 배열되어야 하는지, 칼과 도마는 어느 각도로 나란히 놓여야 하는지에 대해 늘 신경을 썼으며 냉장고 속 채소는 크기 순으로 정렬되어야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윤주는 부엌의 일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윤주는 단지 부엌은 깔끔하게 유지되면 좋겠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요리에 큰 흥미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처음 윤주의 눈에 민호의 주방은 단순히 정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보였다. 처음 민호의 부엌에 들어섰을 때 윤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좀 복잡하네. 그냥 간편하게 식사하기 좋게 깔끔하게 정리해 두면 좋겠어.’


윤주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선 부러움을 샀다. 남자친구인 민호가 워낙 요리광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살겠다는 얘기였다. 민호의 친구들은 그가 얼마나 요리에 진심인지 알기 때문에 혹시나 그런 걸로 싸우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그럴 때 윤주는


“난 그냥 민호가 차려주는 대로 먹으면서 살고 싶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을 오래 했던 윤주의 한 친구는 윤주에게 따로 말해주기도 했다.


“그냥 민호가 해주는 대로 두면 좋겠네 싶겠지만, 그게 오히려 싸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어.”


윤주는 처음에 그 친구가 자신이 부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해서 속으로 무시할 뿐 그 조언에 크게 귀를 기울이진 않았다. 그런데 민호와 동거하게 된 이후 정말로 바로 그 문제로 큰 다툼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윤주가 부엌을 정리했던 것이 이유였다. 왜냐하면 부엌은 민호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부엌의 질서는 민호의 동선에 맞게 그의 신체 감각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의 일부를 바꾸는 일은 곧 민호의 본성을 흔드는 일이었다.


부엌 문제로 평소와 다르게 노발대발하는 민호의 반응을 보고 윤주는 민호와의 이별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였다. 그러다 윤주는 결국 포기했다. 부엌은 온전히 민호에게 내주었고, 윤주는 부엌에서 자신이 쓸 수 있는 일부 영역만을 허용받았다. 그리고 윤주는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알게 된다.


“나라는 사람은 부엌에서 벌어지는 일에 사실 아무 관심이 없었구나.”


그건 단순히 자신이 부엌일에 게으르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이고 관계 안에서 스스로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포기는 민호의 세계를 지켜주는 동시에
관계에서 윤주의 경계를 뚜렷하게 그려주었다. 그들 관계에서는 서로의 불가침 공간이 생겼고, 오히려 그런 경계에 대한 인식은 서로의 관계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도현과 서연의 이야기


도현(가명)은 철저했다. 그에게 삶은 일련의 성공 방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자신의 방식이 늘 가장 효율적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단순한 아집이 아니라 오랜 시간 검증된 결과와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연은 도현과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유연했고 모든 일에 흐름을 타듯이 대응했다. 서연은 효율보다 분위기를 중시했고, 가끔은 비효율 속에서 발견되는 우연을 즐겼다. 그러나 도현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그의 성공 방정식에 맞춰야 했다. 그리고 한편 서연은 도현의 그런 철저한 라이프 스타일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서연은 처음엔 흥미와 호기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계획된 시간표에 맞는 아침 운동 루틴, 예측 가능한 하루 일과, 명확한 판단 기준에 따르는 목표 설정 같은 것들을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점점 자기 방식을 잃어갔다. 그녀는 도현과 지내며 수많은 계획서를 함께 만들어가야 했고 스스로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들이 비효율로 분류되었다. 서연은 어느 시점에 이르자 선택해야 했다. 그 방정식에 적응하든지 그 세계를 떠나든지를 말이다.


그녀는 적응을 택했다. 그러한 적응 속에서 그녀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아니구나. 나는 틀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틀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이구나.”


자신의 0을 깨닫는 일, 그리고 1에 대한 수용


0→1의 관계는 수용을 통해 지속된다. 그러나 이 수용은 나를 상대에 비해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정확하게 자각하게 만든다. 부엌에서 나는 0일 수 있지만 여행 계획에서는 1일 수 있다. 나는 재정 관리에서는 0일 수 있고 가족 모임의 분위기 조성에서는 1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의 수용과 상호 간의 타협이 주는 선물은 내가 언제 0이고 언제 1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나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확히 누구인지, 어디까지가 나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선적으로 상대의 다름을 수용하는 것이 전제다. 상대가 가진 특정한 영역에서의 1의 본성을 해치지 않고 그 세계의 빛 속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나의 어둠을 인정하는 것. 0→1은 흔하다.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는 승부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의 수용은 상대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의 본성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길이다.


빛이 어둠으로 (1-0)


이번엔 빛이 어둠으로 향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사랑의 불꽃에 가깝다. 빛이 어둠에 다가가면 환하고 따뜻하게 공간을 채우게 된다. 어둠은 '마침내!'라는 환희를 느끼는 동시에 오랜 어둠으로 눈이 부셔 눈을 찡그리게 만들기도 한다. 1이 0을 향해 다가갈 때 그 움직임은 마치 오래된 방 안의 창문을 열고 햇살을 쏟아붓는 일과 같다. 0이었던 쪽은 자신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1이 0을 향해 다가갈 때 그 움직임은 마치 어두운 방 안의 커튼을 열고 공간에 햇살을 쏟아붓는 일과 같다. 방을 채웠던 먼지들이 보이고 오래 잠들어 있던 방 안의 사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0이었던 쪽은 자신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연인들에게 처음 만난 순간의 이야기를 물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눈빛부터 달라진다.


“그때 그 사람이 웃었는데… 뭔가 마음이 환해졌어요.”


빛이 스며드는 순간은 무대 위의 조명 스위치가 켜지듯 단번에 환한 빛이 공간 전체를 바꿔버린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번 불꽃이 튀면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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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과 승훈의 이야기


지연(가명)은 승훈(가명)과의 첫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내가 딱 좋아하는 말투로 말하더라고요. 내 안에서 맴돌던 질문이 있었는데 그렇게 딱이라고 느껴지는 답을 명확하게 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 사람과 대화하면 내 머릿속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었어요.”


이것은 단순한 호감 이상의 느낌이다. 빛은 단지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간 어둠 속에서 더듬어보고 만지작거리기만 했던 것들의 형태와 색을 함께 드러낸다. 이때의 불꽃은 내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닫게 만들고 마치 세상 전체가 확장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만남의 초반에는 모든 것이 기다림 끝의 선물 같다. 빛은 어둠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바꿔놓는다. 어두운 방 한쪽에 무심코 쌓아둔 상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안을 열어보니 오래전 잊고 있던 나의 취미, 나의 꿈, 나의 가능성이 들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승훈은 이렇게 고백했다.


“그 사람이 제게 해준 게 너무 많아요.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게 전부 나를 위해 그런 거라는 말로 포장된 강요나 요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지 않아도 되었을 고민들을 하고 있었죠. 물론 제가 선택한 거기도 했어요.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과의 관계가 내 인생을 붙잡고 있더라고요.”


승훈의 고백은 본래 만남 이전에 어둠 속에서만 가질 수 있었던 무형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다. 어둠은 형체가 없고 그 무형성 안에서 무엇도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빛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빛이 드러내는 모습에 고정된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그 관계로 인해 빛 속에서 보이는 자신의 초상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 초상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무겁기도 하다. 빛 속에 있으니 확실히 더 명료하고 서로가 더 빛나 보이지만 그만큼 자신이 될 수 있었던 어떤 다른 가능성들은 닫혀버린다.


이 역설은 사랑을 깊고 복잡하게 만든다. 빛 속에 놓인 나의 상태를 사랑하지만 그 안에 갇힌 나를 때때로 미워한다. 빛이 닿기 전의 어둠을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왜냐하면 돌아간다고 해도 그 어둠은 이미 예전의 어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우와 서진의 이야기


빛을 기다리던 0이었던 쪽은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정우는 서진과 함께 살면서 처음으로 긴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전에 건조했던 자신의 삶은 가끔 유튜브에서 보던 여행이나 히치하키킹을 하는 이들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정우에게 그런 콘텐츠는 환상을 자극하며 빠져들게 만드는 흥미를 일으켰다. 그러다 서진을 만난 정우는 드디어 꿈속에서만 머물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서진은 정우에게 그런 모험에 도전할 힘을 주었고, 이런 일들이 사실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빛은 이런 관계에서 0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처음 가보는 도시의 골목을 헤매는 경험들과 새로운 도전들. 그 모든 것은 처음엔 ‘너와 함께’라서 가능한 즐거움을 준다. 어둠 속에 있을 땐 그 풍경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그 신선함은 가히 압도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도 이면이 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동시에 운명의 힘도 느끼게 만든다. 빛이 드리우면 그 빛이 닿지 않는 영역이 더 선명해진다. 삶은 어떤 향상으로 규정되고, 새로운 발견은 행운과 불운이라는 이원적 인식을 동시에 제공한다. 본래 0이었던 상대는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왜 너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지?”


처음엔 선물이었던 바로 그 빛은 어느 순간 짐처럼 느껴진다. 서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렇다고 그전처럼 살고 싶은 건 아니에요. 지금이 좋기만 하지도 않아요. 근데 이상하게 이런 느낌이 또 우리 사랑을 깊게 만드는 것 같아요. 서로 미워하다가도 놓칠까 봐 더 애틋해지는 거죠.”


사랑의 불꽃은 슬픔과 늘 함께한다


빛 속에서만 가능한 아름다움이 있고 어둠 속에서만 가능한 가벼움이 있다. 사랑의 불꽃은 나를 새롭게 드러내고 색을 입히지만 나는 무채색이었던 본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마치 관계에 결박된 것처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 관계는 또한 환상일 뿐인 빛과 현실이라는 어둠의 충돌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 에세이 3편, 사랑과 초현실에서 만났던 연주(가명)는 사랑을 영화처럼 완벽한 환상으로 꿈꿨다. 그러나 현실이 그 환상에 미치지 못하자 실망했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관계를 끝냈다. 이처럼 빛이 어둠을 밝히는 과정은 때로 현실을 깎아내리는 날카로운 칼날이 될 수 있다.


같은 3편에 나온 수진(가명)의 경우 그녀의 성적인 환상(1)은 현실의 관계(0) 보다 훨씬 강력해서 현실의 관계를 포기하고 환상 속으로 가는 게 더 설레는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처럼 빛이 어둠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꿈이 빚어낸 환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거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결국 1→0의 사랑은 불꽃으로 시작해 이런 그리움을 지나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품게 된다.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되려면 빛과 어둠 각각이 숨 쉴 틈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빛 속에서도, 동시에 어둠 속에서도 계속해서 나 자신이어야 한다. 빛이 나를 바꾸더라도 나는 내가 아니었던 무형의 순간들을 잊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의 만남 (0-0)


이번엔 어둠 속에서의 만남이 있다. 그 어둠은 결핍이나 허무의 어둠이 아니다. 이미 자기 자리에서 완전하며 굳이 빛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는 상태의 어둠이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를 마치 제삼자가 객관적으로 바라보듯 정확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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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와 지연의 이야기


민호(가명)와 지연(가명)의 이야기가 있다. 민호는 지연을 서로를 관찰하는 데 탁월함이 있었다. 민호는 지연의 표정과 말투, 습관을 거의 왜곡 없이 읽어냈다. 지연이 뭔가에 대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민호는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떤 감정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마치 오래전에 읽은 책의 페이지를 훑듯 정확히 짚었다.


“지연아 넌 춤을 출 때가 제일 즐거워 보인다.”


민호의 이런 말은 가끔 지연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그녀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순간이었다. 여기엔 불꽃처럼 서로를 하나의 빛의 공간 속에 규정하는 특징은 없었다. 다만 지연의 오랜 시간 일관되었던 모습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민호는 지연이 즐거워하던 춤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민호와 지연은 너무나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이었고, 성격이나 취향도 달랐으며 서로에게 일말의 공통점도 없었다.


그런 만큼 서로를 보는 것에 있어 훌륭했다. 지연 역시 민호가 상당히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알려주었다. 지연은 평생 논리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순수 회화를 전공한 작가였고 최근엔 현대 무용을 배우며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곤 했다. 민호는 어릴 때 수학을 좋아했지만 입시와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경쟁 속에서 수학에 대한 흥미를 잃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연을 만나 자신의 논리적 성향을 재차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제 취미로 통계를 공부한다.


0→0 관계에서 이런 양상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것은 어둠 속에서의 만남이다. 어둠은 서로를 볼 수는 없지만 만지고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있는 그대로의 감각을 나누게 한다. 지연이 춤을 좋아하는 것은 민호와 관계없이 지연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성향이며, 민호가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지연과 상관없이 본래 민호의 성향이다. 이렇게 서로 채우려는 욕심이 없으니 상대의 윤곽이 흐려지지 않는다. 민호는 지연이 춤을 좋아하는 것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으며 어떤 것도 바꾸려 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 그녀를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지연 역시 논리적인 사고를 요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민호에게 도움을 요청할 뿐, 어떤 것도 거스르지 않았다.


수진과 하석의 이야기


수진(가명)과 하석(가명)의 관계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하석은 만화를 사랑했으며 만화적인 면에서 상당한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수진의 하루는 평소보다 빠르게 흘렀다. 하석과 함께 있으면 머릿속에 만화 아이디어가 쏟아졌고 손이 바빠졌다. 이런저런 빈 공간에 만화를 그려대며 마치 자신도 원래부터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평생 그림과는 무관하게 살았지만 하석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점이 즐거웠다. 수진은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웹툰 공모전을 준비해 볼까 하는 계획을 세워보기도 했다.


공모전을 준비하기로 한 마지막 주간 하석은 나이가 많으신 부모님과 효도 여행을 떠났다. 이렇게 하석과 한동안 떨어져 있자 그 힘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 안의 공기가 바뀐 듯 수진은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수진의 책상에 만화를 그리기 위해 준비된 도구들은 갈 곳을 잃은 채 굴러다녔다. 빈 종이를 놓고 아무리 고민해도 어떤 것도 그릴 수 없었다. 결국 공모전 응모는 접수는 했지만 실격으로 끝났다. 그때 수진은 알게 된다. 만화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런 자각은 당황스럽지만 동시에 귀했다. 왜냐하면 이로써 자신이 본래 0이었던 지점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런 이야기를 들은 하석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만화는 단순하게 하석의 취미였을 뿐, 수진이 공모전을 내는 것은 하석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석은 자신이 여행 중에 비행기를 놓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수진은 계획적이며 체계적인 사람이었다. 둘이 함께 여행을 가거나 무언가를 할 때 하석은 언제나 수진에게 모든 예약을 위임했다. 수진은 자신이 그런 일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이 없었고, 하석이 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었다. 그런데 부모과 여행을 간 자리에서 하석은 부모님을 모시며 모든 여행의 수속을 혼자 처리해야 했고, 숙소와 비행기 등 복잡한 일들을 하는데 서툴렀다. 결국 하석은 한국행 비행기의 시간을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공항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지연과 민호, 수진과 하석의 관계에서 서로는 마치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각자의 방식이 있다. 이것은 서로를 흥미롭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런 흥미는 오래가지 않는다. “너는 그런 사람구나.” 이 말은 분명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아쉬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그런 사람인 것에 대해 자신이 어떤 영향을 받거나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회사 내에서 부서가 다른 이들이 서로를 대하는 사무적인 거리감과도 비슷하다. 이런 관계에서 서로는 힘든 날에도, 기쁜 날에도, 일정한 거리와 표정을 유지한다. 그 거리는 각자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때로는 답답함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0→0 관계는 상대의 고유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때로는 상대에 대한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분투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지난 에세이 3편에서 만났던 다정(가명)은 남편이 '지금 당장 널 알고 싶다'라고 다그칠 때 자신의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어 '나는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그녀는 그 싸움 속에서 오히려 사랑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이 관계의 투쟁은 주먹질이 아니라 '모름'을 인정하고 그 미스터리 속에서 함께 길을 찾는 과정이다.


또한 10년 넘게 동거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던 영주(가명)처럼 사랑이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일 때 이 관계는 오히려 가장 순수한 형태로 지속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지연과 민호, 수진과 하석의 관계에서 서로는 마치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각자의 방식이 있다. "너는 그런 사람이구나"라는 말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그런 사람인 것에 대해 자신이 어떤 영향을 받거나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에서 서로는 일정한 거리와 표정을 유지한다. 그 거리는 각자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때로는 답답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0→0 관계에서는 이 거리감이 핵심이다. 서로를 오래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거리감이다.


마술사의 공연처럼


관계에서 서로에게 명백히 다른 점은 어쩌면 마술처럼 느껴진다. 마술사는 가끔 관객을 무대로 부른다. 관객은 그 마술에 참여하고, 마치 직접 마술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가면 관객은 그 마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혹은 마술사에게 특별한 연정을 품는 일도 거의 없다.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의 마술을 원하긴 하지만 마술의 원리까지 알고 싶어 하진 않는다. 이런 관계에서 진실은 늘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 그리고 어둠은 우리가 서로 만나게 할 뿐, 빛에 이르게 하는 길은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모든 현상계의 일은 어둠 속에서의 만남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너무 가까워지면서 마치 자신에게도 그 빛이 존재하고 마술이 존재한다고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관계에서 때로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유일한 버팀목이 된다.


하석과 함께 있는 동안 수진은 만화를 그리는 기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 하석이 상상에 몰두할 때의 표정,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새로운 발상을 그림으로 만드는 모습을 마치 복사하듯이 흡수했다. 그것은 만화가가 되고자 억지로 배우려는 공부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스며드는 배움이었다.


0→0 관계의 배움은 마치 여행 같기도 하고 공연 같기도 하다. 서로의 고유성을 빼앗지 않고 관계 속에 머물면서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것. 이것은 내가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교과서나 강의로 얻는 것과는 다른 배움이다.


서로를 향해 비워진 시선(0)은 판단 대신 관찰을 남긴다. 판단이 줄어들수록 상대의 중요한 본질이 더 선명히 보인다. 나는 너를 느낀다. 그러나 규정하지 않는다. 이런 양상을 가진 관계만의 우아함이 있다. 상대를 보는 관찰이 통제가 되는 순간 어둠은 단단한 벽(1)으로 변한다. 관찰이 서로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갖게 되면 어둠은 뜨거운 빛을 가려주는 그늘이 된다. 벽은 관계를 닫고 그늘은 서로를 쉬게 한다. 관계는 그늘에서 오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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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관계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너무 특별해서 다른 모든 관계와는 다르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면 사랑도 우주가 쓰는 언어의 한 방울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네 가지 관계의 원리는 단지 사랑의 모습만을 그리는 게 아니다. 친구 사이, 가족 사이, 스승과 제자의 인연, 동료와의 협력, 심지어 내가 세상과 맺는 방식까지 모든 것이 이 네 가지 구분 안에서 흘러간다. 중요한 건 어떤 길이 더 좋고 무엇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빛이든 어둠이든 그 흐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너와 함께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는지를 아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결국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어떤 관계는 나를 편안하게 만들고, 어떤 관계는 나를 바꾸고, 어떤 관계는 나를 시험하고, 어떤 관계는 나를 가만히 비운다. 나는 그 안에서 조금씩 나를 알아간다. 관계의 본질은 상대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발견에 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이 단순한 네 가지 이진법적 구분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고 떠난다. 그 여정의 끝에서 남는 건, 내가 누구였는지, 너와 있었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내 안에 어떤 빛과 어둠을 남겼는지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사랑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세상 모든 관계가 드러내는 가장 순수한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비로소 자신과 세상을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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