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초현실

by 유후용


사랑이란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가. 사랑은 다양한 길로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제각각 깊은 감정의 결을 남기고 간다. 한때는 이름조차 붙이지 못했던 모호한 사랑들을 떠올린다. 그저 지나가고, 아프고, 흐릿해진 후에야 겨우 보이기 시작한 것들. 우리는 종종 그 사랑의 정체를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된다.


나는 그런 모호한 사랑들에 이름을 붙여보려 했다. 확신 없는 사랑, 말로 설명되지 않는 이끌림, 오래도록 가슴에 남은 채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마음들. 그 사랑들에 우리는 모두 같은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진 않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모른 채 지나쳐버렸는지. 그 모호한 사랑들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결국 나를 다시 꺼내보는 일이었다.


여정을 계속 이어가려 한다. 사랑은 우리가 가장 인간적으로 느끼는 정서들과 맞닿아 있다. 기쁨, 꿈, 두려움, 그리고 슬픔. 이것은 사랑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들이다. 사랑이 기쁨으로 올 때 그것은 살아 있음의 충만함을 동반한다. 사랑이 꿈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사랑이 두려움과 함께 올 때 우리는 그것을 잃을까 봐 몸을 움츠린다. 사랑이 슬픔으로 스며들 때 그것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깊은 애도이자 여전히 남아 있는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한 번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사랑이 너무 두려워요. 왜냐하면 그게 진짜인지 아닐지 모르겠거든요."

이 사랑은 어쩌면 두려움이라는 얼굴을 한 사랑이었던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은 상대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진실과 마주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 아닐까.

또 어떤 이는 말했다.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되어 주고 싶었는데 늘 현실의 조건 앞에서 무너졌어요."

그에게 사랑은 늘 손에 닿지 않는 환상이었고 자신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기도 했다.


사랑은 때때로 기쁨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유 없이 웃게 만들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아주 짧게 머물다 가는 경우가 많다. 기쁨은 지속되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기쁨이 지나간 뒤에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기쁨의 사랑은 가장 환하게 빛나다 가장 빨리 사라지는 별과도 같다.


사랑은 꿈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 함께 이루고 싶은 것들,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가능성에 대한 기대. 그 기대는 때로 현실을 마주하는 데 어려움을 만든다. 하지만 꿈같은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이유도,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잃고 말 것이다. 그 꿈은 종종 우리를 배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사랑을 꿈꾸게 된다.


사랑은 두려움 속에서 가장 선명해진다. 관계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내가 상처받을까 두려워하고, 상대가 변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자기 자신을 감춘다. 결국 진짜를 보여주지 못하는 사랑은 진짜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다는 건,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슬픔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 감정, 끝나버린 관계에 대한 미련, 아직 가시지 않은 마음. 그 슬픔은 사랑의 실패라기보다는 끝나지 않는 사랑이다. 슬픔의 사랑은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사랑이다.


사랑의 이야기는 나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며,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모두 같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랑들을 들여다보는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 글이 당신 자신의 사랑을 기억하게 해 주기를, 그리고 당신만의 사랑의 얼굴에 조용히 이름을 붙일 수 있기를 바란다.


너와 나의 완벽한 사랑을 위하여


처음에 그 사람이 너무 좋았다. 말투가 매력적이었고, 생각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무언가에 몰두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자라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나와 다른 바로 그 점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은 왜 그렇게 말하지? 당신은 왜 그렇게 반응하지 않아? 나는 점점 자주 그런 질문들을 마음속에서 삼켰다. 처음엔 그냥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나중엔 답답함이 되었고, 결국엔 상대를 고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방식의 사랑이었다.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고, 더 잘 맞춰가고 싶었고, 더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조금만 바뀌면 좋겠어’라는 말로 시작해, 그 사람의 일상, 말투, 감정 표현, 심지어 친구 관계까지도 바꾸려 들었다.


사랑은 때로 가장 아름다운 환상으로 시작되지만, 그 환상이 현실을 침범하는 순간 가장 잔인한 집착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관계를 흠결 없는 그림으로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완벽주의는 사랑하는 이의 작은 허점조차 용납하지 못하게 한다. 상대의 사소한 실수, 어설픈 습관, 혹은 나약한 감정까지도 점점 고쳐야 할 문제로 보이게 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집착이 된다.


"너는 이렇게 하면 좀 더 좋아질 수 있어. 우리가 이렇게 하면 더 완벽한 관계가 될 수 있어."


이런 말들은 겉으로는 사랑의 언어지만 속으로는 상대를 자신의 완벽한 그림에 끼워 맞추려는 숨 막히는 시도가 된다.


수연(가명)의 이야기


“처음엔 정말 다 좋았어요. 그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가 분명했고, 그 안에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죠.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 과묵함이 카리스마 있고 멋있어 보였어요. 근데 나중엔... 사람이 너무 답답한 거예요. 대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꾸 뭘 물어보게 되고, 자꾸 뭔가를 이끌어내려 하게 되고... 어느 순간엔 상대가 나한테 감정을 감추고 있는 거 아닌가, 왜 대화가 안 될까,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해졌어요.”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고 한다. 마치 재봉사가 원단을 다듬고 솔기가 튀어나온 곳을 재단하듯 사랑을 손질하려 한다. 이건 영화 <팬텀 스레드>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레이놀즈는 완벽을 추구하는 드레스 디자이너다. 그는 여자에게 옷을 입히고, 깐깐한 식탁 예절을 요구하고, 상대를 통제하려 한다. 사랑은 완벽한 옷처럼 잘 재단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자는 그 완벽함 안에서 점점 무너지다가 어느 날 스스로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런디 이 균열이 매혹적이다. 사랑은 드레스처럼 다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입고 있던 드레스를 망가뜨리면서 느껴지는 희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 사이의 사랑은 그 완벽함의 환상을 깨뜨릴 때 비로소 진짜가 되어 간다.


우리가 완벽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쁨의 연장을 약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처음의 반짝이는 순간을 영원히 붙들고 싶은 마음, 그래서 불협화음이 나기 전에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랑은 늘 조율되지 않은 불협의 상태로 존재한다. 우리가 놓지 못하는 그 ‘조금만 고치면’은, 사실 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본질을 거부하고 싶다는 뜻일 수 있다.


태형(가명)의 이야기


“제가 사랑하면서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내가 널 이렇게까지 아끼는데 왜 모르냐’였던 것 같아요. 상대방은 자기가 왜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고, 저는 그걸 이해 못 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제가 이상적으로 그려놓은 그림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던 거죠.”

우리는 자주 때로는 은밀하게 누군가를 바꾸려 든다. 심지어 그걸 ‘사랑이니까’라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사랑은 상대의 변화를 통해 나의 불안을 덮으려는 방식이 될 수 없다. 사랑이란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 다름 속에서 나를 정직하게 돌아보는 일이다.


완벽을 위한 사랑은 언뜻 보면 상대에 대한 헌신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헌신의 지향점은 사실 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열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은 그런 열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랑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랑은 완벽하지 않고, 자주 어긋나며, 때때로 깊이 아프다. 그러나 그 어긋남 속에서만 사랑은 진짜로 자라난다.


상미(가명)의 이야기


"저는 우리의 사랑이 서로에게 완벽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 사람의 부족한 점이 보이면 그게 저에게는 고쳐가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죠. 그런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보니 마치 제가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가 된 것 같았어요.

‘너는 이렇게 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거야.’ ‘이렇게 바꾸면 더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끊임없이 말했어요.

처음에는 그 사람도 제 말을 잘 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남자는 지친다고 했어요.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데 조금도 고쳐지지 않는 남자에게 실망스럽고 화가 났어요.

나만 이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건가? 이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되었어요. 그 사람을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려고 했던 거였죠.

제가 사랑했던 것은 진짜 그 사람이 아니라, 제가 상상했던 완벽한 제 남자의 모습이었던 거죠.

나중에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고 있었어요. "

상미의 이야기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사랑은 종종 상대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다. 이 사랑은 상대의 망가진 부분에 집착한다. 비단 연인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부모가 망쳐놓은 성장기, 망가진 가족 관계, 혹은 상대의 무능력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고쳐주겠다는 명분으로 관계에 개입하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사랑을 상대에게 적용할 때 발생한다. 연인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고, 나의 불행이 너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사랑은 불만족과 불평으로 가득 찬 시니컬한 감정으로 변한다. 결국 이 사랑은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끝없는 분노와 절망에 빠뜨린다.


영화 <팬텀 스레드> 중


그러나 사랑은 통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화 <팬텀 스레드>의 주인공, 레이놀즈의 연인 알마는 레이놀즈의 완벽에 대한 집착에 저항하고 그의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 반대로 알마는 레이놀즈를 완벽한 예술가의 세계에서 끌어내려 그를 인간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녀는 레이놀즈가 먹는 음식에 독버섯을 넣어 그를 병들게 하고 그가 아플 때만 자신에게 의존하는 나약한 인간이 되도록 만든다. 이 기괴하고 병적인 관계는 완벽을 향한 두 사람 각자의 지옥을 만들어 서로를 파괴하게 한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망가진 아이 같은 모습을 사랑한다. 그가 아플 때 버르장머리 없는 아기처럼 구는 모습에서 오히려 기쁨을 느낀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어머니 유령을 제거하고 그를 고쳐줌으로써 사랑을 완성하려 한다. 처음엔 아버지와 딸처럼 보였던 관계는 나중에는 어머니와 아들처럼 변해간다. 알마는 영화에서 레이놀즈의 드레스를 입고, 그의 어머니 역할을 자처하며 스스로가 유령이 된다. 그녀는 레이놀즈가 온 힘을 다해 만든 완벽한 드레스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망가뜨린다. 이 사랑의 완벽 추구는 끝을 모른다.


결국 영화는 완벽한 사랑의 환상을 깨부순다. 완벽을 추구하던 레이놀즈는 알마에게서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알마는 그를 고쳐주려고 하는 대신 그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사랑은 결국 서로를 파괴한 뒤에야 비로소 불완전한 나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영화는 역설한다. 삶 자체가 주는 부조리성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의 문제들을 당장 고치려기보다는 심미적으로 음미하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기쁨의 열쇠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환상과 현실 사이: '욕망의 꿈'이 가져온 위기


연주(가명)의 이야기


"저는 인스타에서 우리가 멋진 사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도 올리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옷도 잘 입은 모습도 올리고… 좋아요가 많을수록 제가 하는 사랑이 더 빛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나면 함께 찍은 사진이 예쁘게 나오게 하려고 신경을 썼어요.

한 번은 여행을 갔는데 제가 찾은 카페에서 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했더니 상대방이 ‘그런 건 나중에 찍자, 지금은 그냥 쉬자’고 했어요. 저는 속으로 ‘쉬는 건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 자리에서 목소리가 커졌죠. 근데 맞잖아요? 쉴 거면 왜 여행을 가죠?

그런데 그 사람은 ‘너는 그냥 나랑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진이 중요한 거냐’며 화를 냈어요. 그날 이후로는 사소한 일에도 계속 부딪치고 끝내는 헤어졌어요. 솔직히 헤어진 뒤에는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주의 이야기처럼 욕망의 꿈은 종종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채워주지 않으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믿으며 관계를 끝내기도 한다. 이 환상은 현실보다 훨씬 강력해서 타인의 행동을 오해하고 결국 스스로 만든 망상을 현실처럼 믿어버리는 비극을 부르기도 한다.


완벽을 향한 사랑이 현실을 깎아내리는 초현실적 칼날이라면 욕망의 꿈은 우리를 끝없는 환상의 늪으로 빠뜨리는 달콤한 유혹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불처럼 타오르는 감정이나 영원한 열정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때로는 욕망의 꿈이라는 환상에 불과할 때가 많다. 이 환상은 다른 모든 종류의 사랑을 감염시킨다. 특히 이 환상은 욕망에서 시작하여 사랑과 성적인 느낌까지도 하나로 묶어버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성적인 충족이 제대로 되지 않고서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제각각의 일방적인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기도 한다.


수진(가명)의 이야기


"저는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성적으로 별로 만족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내 욕망이 풀리지도 않고... 그렇다 보니 어차피 실망할게 뻔해서 성관계도 거부하게 되었어요.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저 사람은 내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생각을 했죠. 전 사실 그 사람을 만나고 스킨십 하는 것보다 만화를 보고 상상하는 게 더 좋을 때가 많아요. 이렇게 말하면 웃기지만 만화 캐릭터가 현실의 상대보다 훨씬 더 로맨틱하게 느껴져요. 현실엔 이런 관계가 없잖아요. 만화 속으로 가는 게 더 충족되는 것 같아요."


수진의 고백은 욕망의 환상이 가진 양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환상은 우리를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랑받지 못하면 어쩌나'라는 두려움에서 도피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환상과 현실을 동일시하며 내 인생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환상은 환상 그 자체로 즐기고 현실은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을 건강하게 경험하는 시작이다.


우리는 종종 욕망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욕망이 곧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랑이 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사랑은 욕망의 노예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은 사랑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욕망하는 성적인 충족감을 상대에서 느끼지 못하는 사랑을 하고 있다 해도 관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랑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쪽에서의 이런 실망감은 이 욕망의 환상이 만들어낸 사랑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일 수 있다.


환상은 환상 그 자체로 족하다. 환상 속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뭐든 가질 수 있다. 그것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설렘과 같다. 불이 다 꺼진 공간에서 스크린이 켜지고 영화를 보는 그 순간의 기쁨. 영화가 꼭 현실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환상의 힘은 그런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환상을 환상인 채로 나누는 것이다.


투쟁의 사랑: 나의 길을 찾는 여정


사랑은 달콤하고 편안한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깊은 곳에는 말하지 못했던 진실, 즉 사랑이 곧 치열한 투쟁이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이 투쟁은 주먹질 같은 육박전이 아니다. 그것은 '말'이라는 가장 강력하고 잔인한 무기를 통해 서로의 한계를 마주하고 자신을 내보이려는 고된 여정이다. 고유한 각자의 존재로서의 사랑은 서로를 변모시키고 그 투쟁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는 길이다.


나의 사랑은 한 때 목적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그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길이고 나의 목적을 찾는 길이라고 믿었다. 나는 사랑하는 이와 자주 싸웠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하면서 싸우는 것들은 대부분 하나의 말로 압축될 수 있었다. "난 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거야. 넌 대체 왜 그런 거야?" 그 질문은 난 너를 알고 싶고, 너의 길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너의 길이 나의 길과 하나인지를, 우리 사랑의 목적과 길이 같은 방향인지를 알고 싶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늘 "나는 모르겠다"라고 답하곤 했고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고유한 존재로서의 사랑은 상대방을 추측이나 추정으로 알 수 없다. 각자 스스로가 길을 드러내 그저 알게 될 때 비로소 아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늘 모르는 것 같을까?'라며 고통스러워했다.


다정(가명)의 이야기


”결혼하고 나서 남편과 자주 싸웠어요. 연애할 때와 다르게 결혼하고 같이 살고 나니까 남편은 저에게 늘 답답해하기 시작했어요. 남편 말은 저랑 살다 보니까 제가 너무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저는 뭐라 할 말이 없었어요. 저도 저를 아는 게 아니니까요. 사실 감정은 너무나 거대해서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잖아요. 남편은 가끔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조용히 있으면 더 화를 냈어요."



다정의 말처럼 고유한 존재로서의 사랑은 서로의 '모름'을 인정하고, 그 미스터리 속에서 함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은 잘 모르겠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그리고 서로에 대한 그 모름을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가 함께 길을 찾는 모험의 시작이자 관계의 진정한 성장을 위한 첫걸음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 목적을 잃은 사랑


사랑의 투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종종 비극으로 끝난다. 우울은 사랑에 기이한 옷을 입힌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목적을 잃은 사랑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서로에게 "네가 없다면 나의 길도, 삶의 목적도 없다"라고 말하며, 삶의 길과 목적을 서로의 존재에 의존한다. 그리고 사랑이 좌절되었을 때 그들은 함께 죽음을 택하며 파괴적인 결론을 맞이한다. 우리 사랑이 서로에게서 길을 찾지 못할 때 종종 사랑은 우울증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시련을 통해 사랑의 힘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사랑은 우리가 각자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만약 사랑을 통해 목적과 길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나만의 방식이라면 그 과정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런 여정이 나의 사랑을 가치 있게 만든다.


이런 사랑은 때로는 서로를 더 강하게 만든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부딪히고 다투면서도 헤어지지 않는 것. 나는 나다운 채로, 당신은 당신 다운 채로 서로 부대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사랑이 추구하는 길과 목적의 다른 의미다. 수십 년을 함께 살면서 늘 싸우는 부모님에 대해서 “그럴 거면 이혼하시지 뭐 하러 계속 그렇게 살까?” 하는 생각을 하는 자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평생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서로를 싫어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사랑하며 각자의 길을 찾기 위해 투쟁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랑의 투쟁은 항상 좋게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평생 싸우면서도 멋지고 건강하게 사랑하는 관계도 많다.


다만 우리가 이 모든 사랑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은 아름답기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모든 사랑은 같지 않다. 사랑에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삶은 당연히 멋진 순간도 있지만, 끔찍한 순간도 있다. 싸우는 순간에는 '저 사람이 차라리 없었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고, 자신이 세상에서 증발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과정 속에서, 비로소 사랑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지의 사랑


사랑은 늘 우리에게 명확한 답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니?"라는 질문은 '예' 혹은 '아니요'라는 선명한 답만을 원한다. 그러나 사랑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오직 모름만이 가득한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영주(가명)의 이야기


"저는 연인에게 '나는 너를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자주 말했어요. 10년 넘게 함께 동거했는데도 그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어요. 연인은 그 말에 화를 냈지만 저는 정말 몰랐어요. 마음속에서는 사랑이 있는 것도 같고, 뭔가 느낌은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래요. 상대는 제가 사실 자길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냐고 추궁했지만 오히려 이 모른다는 느낌은 그 사람보다 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어요. 저는 그 답답함 때문에 혼자 많이 울곤 해요. “


영주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때로는 사랑이 가진 미스터리 앞에서 좌절을 경험한다. 우리는 사랑을 손에 잡을 수 있는 물질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처럼 확신하고 싶어 하지만 사랑은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숨겨진 영혼과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모름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자 광대함의 원천이다. 이 모름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사랑의 새로움을 발생시키는 뮤즈와 같다. 우리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를 쓰고, 음악을 만들고, 예술을 통해 그 미스터리를 표현하려 한다.


사랑의 미스터리를 가장 잘 활용하는 이들은 어쩌면 시인들이다. 시인들은 '나는 너를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고백을 통해, 우리가 결코 다 가질 수 없는 사랑의 광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들의 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사랑을 갈망하지만 그 갈망 자체가 곧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임을 보여준다.

시인들은 종종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속에서 영감을 얻고 사랑이 가진 미지의 영역을 탐구한다. 사랑에 대해 끝내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는 가장 순수한 길일 수 있다.


99%의 사랑


사랑은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저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우리는 그 강물 위에서 서핑보드를 타고 파도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파도가 아무리 높고 낮게 쳐도, 서퍼의 시선은 늘 수면 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사랑의 격정적인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저 흐름을 타는 것. 파도의 잔상은 초현실이며, 그 불균형 위에서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이 현실 속에서 사랑을 느끼는 일이다.


우리는 결국 누구나 100%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최대로 쳐도 99% 일 수밖에 없는 부족함과 불완전함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100%여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갈 만큼 위험한 생각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완벽한 사랑을 추구하기보다는 부족한 나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다. 상대를 이상향에 맞춰 바꾸려 하기 전에 부끄러운 나 자신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 더 나은 상대를 원하기 전에 잘못된 나 자신부터 토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99%의 나로서 사랑하는 아름다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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