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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하 Feb 18. 2021

잘 느끼는 그녀 _ #프롤로그

#프롤로그

강남대로 한복판 빌딩 숲 사이에 위치한 <Dr. 연(然) 정신의학과>.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잘 모르는 이 개인 정신과 병원은 ‘최대한 아는 사람을 적게 만들어 딱 필요한 만큼만 벌고 일하자’는 모토로 운영 중이다. 그레이와 블랙 톤의 대리석을 중심으로 한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와 걸맞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 공간의 주인 서연은 지금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느라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손수건으로 둥근 이마에서 연신 땀을 훔쳐대는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식은땀인지, 정말 더위를 느껴서 흘리는 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방문하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말이죠...”
 “워낙 약속 잡기가 힘들어서 말이죠. 이렇게 환자로 병원에 오면 서연 씨를 뵐 수 있을 거 같아서...”

“많이 더우신가 봐요. 히터를 좀 끌까요?”


한겨울인데도 연신 땀을 훔쳐내는 남자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몇 번째 만남을 거절해 왔으면 눈치껏 까였다고 생각 않고 무작정 외래 환자로 쳐들어온 무례함이 불러온 당황함에 땀이 날 것 같은 건 정작 그녀 자신이었다. 게다가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 당황은 정점으로 치달아 불쾌감을 느꼈고,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한번 감았다 뜰 수밖에 없었다.


“아 괜찮습니다. 제가 몸에 열이 좀 많은 편이라서... 병원이 참 좋네요. 다 천연 대리석인가 봐요?”

“인조예요. 천연은 관리가 힘들어서.”

“아... 그... 그렇군요.”


서연은 뻔한 수작질이 눈에 보이는 이 남자를 빨리 되돌려 보내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오셨나요? 혹시 수면이 불규칙하신가요? 아니면 요즘 직장인 분들이라면 흔히들 가지고 있는 번아웃? 우울감? ”

“아 저는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정말 딱 서연 씨를 뵈려고 온 거라서요. 가능하다면 다음에 만날 약속도 잡고.”


자신의 귓가가 붉게 상기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는 남자는 헤어왁스를 얼마나 발랐는지 기름기로 떡진 머리를 긁적이며 정말 악의 없이 해맑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모습에 치가 떨렸지만 그녀는 애써, 정말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를 계속 유지하며 말했다.  


“이러시면 곤란해요.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신 것도 아닌데, 병은 씨가 이렇게 예약을 하시면 정말 제 도움이 필요한 환자분 한 분이 진료를 보질 못 하시잖아요.”

“아...! 아...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처 미치지 못해서...”


더더욱 상기된 귓불과 목덜미에, 이젠 아예 ‘당황’이라고 써져있는 이마엔 수맥이 터졌는지 땀이 연신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한 남자는 분위기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점수를 어떻게든 만회해 보기 위해 연신 눈알을 굴려댔다. 실제로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기분 상으로는 고요한 진료실 전체에 머리 굴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분위기였다.


‘미처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걍 미친 거겠지... 개념 놓은 자식아. 이래서 난 졸부 2세가 싫어...’


“그럼 서연 씨, 오늘 병원 업무 마감시간은 언제신지... 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 저녁 드시고 그 옆 제 카페에서 차도 한 잔 하며 대화를...”

“어머, 어떡하죠. 오늘 오래전부터 진료받으시던 환자분이 어제 바꿔가신 약이 안 맞다며 부작용 때문에 급하게 방문하신다고 하셔서요. 그분 오시면 언제 끝날 거란 말씀은 못 드리겠네요. 다음에 XX 선배랑 한번 자리를 만들어보죠. 다. 음. 에.”


무척 아쉽다는 듯, 안타깝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그의 이어지는 말을 재빠르게 막은 서연은 빠르게 그를 내보내고 한숨을 포옥 내 쉬었다. 우연히 동창 결혼식에 참여했다 찍힌 사진을 고등학교 선배, 정확히는 가까운 사이도 아닌 그냥 같은 학교 동문인 선배 XX의 SNS에서 보고, 그녀에게 꽂혀 XX에게 소개를 부탁한 남자였는데, 이야길 들어보니 자기 스타일도 아니고,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먼지만큼도 들지 않아 계속해서 만남을 미뤄왔더니 외래진료를 핑계로 병원으로 쳐들어 올 줄이야... 서연의 오른쪽 관자놀이가 머리가 지끈거려 오려는 찰나, 진료실 문을 ‘쾅!’ 하고 박차고 들어오는 한 여자. 그녀는 서연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자매 같은 친구. 수하였다.


“소금 치러 왔다. 할머니가 너한테 아주 이상한 놈 붙었다고 얼른 소금 치러 가라시더라.”


서연이 운영하는 신경정신과 병원인 <Dr. 然 정신의학과>와는 같은 오피스텔 건물이지만 같은 층 맞은편 B동에 위치해 있는 <우연 선녀보살>의 운영자인 수하는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냅다 굵은소금을 카펫으로 뒤덮인 진료실 바닥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 수하를 서연도 말리지 않았고, 서연의 조무사인 소화도 말리지 않았다.


“소화 씨, 이거 내가 내일 아침에 다이손으로 싹 치워줄게, 걱정하지 말고.”

“하루 이틀 일인가요, 수하 님 알아서 하세요.”


수하는 자기가 대신 치워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내 데스크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서 말을 던지고는 소금을 더 세게, 더 많이 바닥에 뿌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 이런 일 하루 이틀도 아닌데.”

“야 할머니가 그 새끼 보통 이상한 새끼 아니라고 많이 치고 오라고 하셨어.”
 “...”


할 말을 잃은 서연은 수하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그런 서연은 아랑곳 않고, 다시 진료실에서 인포 데스크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수하는 소화에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소화 씨, 그 새끼 또 오려고 예약 잡으려거든 알죠? 미쳐도 보통 미친놈 아니니까 절대 예약 잡아주지 마요. 예약 2주 치 꽉 차 있다고 둘러대면서 절대 잡아주면 안 돼! ”

“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금을 담아 온 밀폐용기가 꽤 컸음에도 그 통이 다 비워질 때까지 수하의 소금 던지기는 계속되었다.


“뭐 얼마나 미친놈이길래 이번엔 락앤락 대자 통 한 통이야? ”

“낸들 아냐? 나야 몸신 할머니가 하라시는 대로 한 것뿐야. 복숭아 나뭇가지까지는 안 간 거 보니 얼추 미친놈 중에 중상급인가 보지.”


수하는 통에 남은 마지막 남은 소금을 탈탈 뿌린 후, 밀폐용기 뚜껑을 닫으며 그녀만의 의식을 마무리했다.


“내일 아침에 다이손 들고 와서 소금이랑 다른 먼지까지 다 치워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이제 병원 문 닫을 시간 안 됐어?”

“병원 닫을 시간이긴 하지. 아까 그 환자 아닌 환자가 오늘 마지막 예약환자였으니까.”

“것봐. 그 새끼 아주 그러려고 맨 마지막에 예약한 거라니까. 그것도 금요일 저녁에.”


서연의 대답에 수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을 내뱉었다.


“정리하고 가자, 소화 씨도 퇴근해요. 주말 잘 보내고.”

“누가 보면 네가 이 병원 원장인 줄 알겠다?”

“뭐, 누가 봐도 원장은 너지. 의사 가운은 뒀다 국 끓여먹는다니?”


천연덕스러운 수하의 대답에 서연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언제 그 이상한 남자 때문에 머리가 아파오려 했는지도 잊혀질 정도로.



* * * * * 잘 느끼는 그녀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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