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와 세월호
처음 이 영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뭐 볼 것 없나?’ 하고 개봉 예정 영화 목록을 봤을 때였습니다. 포스터도 무척 보고 싶게끔 생겼는 데다가,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라는 것, 한때 무척 좋아했던 배우 리암 니슨이 출연한다는 것을 보고는 되도록이면 극장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러다가 국내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 번역 작가이신 황석희 번역 작가님께서 자막 작업을 하신 것을 알고 나서는 꼭 극장에서 보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볼 기회는 몇 차례나 있었습니다. 천주교 박해에 관련된 이야기이니 만큼,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성당 지구에서 개봉 첫 주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대관하여 단체 관람을 한다고 하기도 했고, 사순 시기를 맞아 다니고 있는 성당에서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비롯해 크리스트교 신앙을 다룬 영화들을 보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왠지 그런 단체관람은 끌리지 않았어요. 왠지 조용한 의식을 치르듯, 혼자서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그 결정은 영화를 관람한 후에도 후회로 남지 않았네요.
이 영화는 일본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이 영화를 1980년대부터 계획했으나 판권 문제 때문에 2013년에서야 제작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감독은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 전까지 약 15년간 계속 시나리오를 다듬으며 언젠가 크랭크업 할 날을 기다리며 긴 세월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영화는 일본으로 파견된 포르투갈 예수회의 선교사인 페레이라 신부의 서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가사키를 비롯한 일본 전역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에 대한 보고인 서신. 그리고 발리냐노 신부는 그 서신이 마지막 보고였음과,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수사 로드리게스와 수사 가르페에게 전합니다. 이 두 수사는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이었기에, 풍문으로 들려오는 페레이라의 소식, 배교했음을 믿지 못하겠다며 자신들을 일본으로 파견해 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던 발리냐노 신부는 이 두 젊은 성직자들의 간청을 들어주며, 마지막 선교사로 이 두 신부를 일본으로 보냅니다.
마카오에서 일본인 기치지로를 만나서 일본으로 밀항한 두 신부는 토모기 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나가사키 관리인 이노우에와 관군들을 피해 비밀스럽게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신부님이 오셨다며 기뻐하며 그들을 숨겨주었습니다. 몰래 미사를 행하고 있지만 낮에는 산속의 은신처에 숨어 지내며, 밤이 되어야 마을에 내려가 미사를 집전하는 생활이 반복되며 로드리게스와 가르페는 답답하기 그지없었죠. 게다가 토모기 마을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찾고자 하는 페레이라 신부의 소식은 접할 수가 없었다는 것도 그들의 답답함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드리게스와 가르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낮에 은신처 밖에 나가 일광욕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맙니다.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두 신부를 일본으로 데려온 기치지로가 사는 고토 마을의 사람들이었지요. 신부들이 일본으로 온 것을 알게 된 고토 마을 사람들도 신앙생활을 비밀리에 해오고 있었기에 신부님을 모시고 싶다고 먼 길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토모기 마을 사람들도 많은 걱정을 했지만 로드리게스는 고토 마을로 가 신앙을 지키고 있는 고토 사람들을 만났고, 그곳에서 페레이라 신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게 된 정보도 박해가 심각해 지기 전의 이야기라 별 소득이 없었죠.
고토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던 로드리게스는 기치지로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관군이 몰려와 배교하기를 강요했을 때 자신은 성화를 밟고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것과, 그를 제외한 그의 가족들 모두는 배교하기를 거부해 화형을 당했다는 것... 배교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로드리게스는 그의 고해성사를 돕고, 일본에 도착 한 이후 그 어느 때 보다도 신앙과 신의 뜻에 대해 감화되어 신께 감사를 올립니다.
고토에서 토모기 마을로 돌아온 로드리게스. 하지만 관군들이 토모기 마을로 몰려와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이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부들을 관군에 내어주지 않는 대신, 순교를 각오하고 자청하여 관군에게 끌려갔습니다. 신부들이 도착하기 전에 신앙을 지키는 데 중심이 되어줬던 촌장과, 촌장의 오른팔 격인 모키치, 그리고 신앙심이 깊은 남자 주민 하나까지 세 명은 배교를 거부하고 바닷가에 매달려 생을 마감합니다. 최후까지 버티던 모키치는 찬송가를 부르다 숨을 거뒀는데, 그 주변은 침묵으로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들이 찬양하는 신 까지도...
세 사람이 순교했지만, 이어질 탄압을 걱정한 마을 사람들은 로드리게스와 가르페 두 사람을 함께 지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로드리게스는 가르페와 떨어져 이전에 갔던 고토 마을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고토 마을은 이미 토벌을 당했는지 폐허가 되어 있었고, 로드리게스는 살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기치지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치지로는 관군에게 그를 넘기고, 이때부터 로드리게스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이 고난이 로드리게스에게 직접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주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으로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관리 이노우에는 성직자인 신부가 박해하는 것으로 일반 신자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의 관리들은 로드리게스가 보는 앞에서 신자들을 죽이고, 고문하는 등 박해합니다. 직접 육체에 가해지는 고문보다, 죄 없는 이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정신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이 더 괴로웠던 로드리게스는 신의 침묵에 대해 끊임없는 갈구로 신을 찾습니다.
그 과정에서 로드리게스와 떨어져 지내던 가르페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로드리게스는 끝까지 관리들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신앙을 지키려 노력하며 신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결국 이노우에는 자신이 배교시킨 신부 페레이라와 로드리게스를 만나게 해 줍니다. 페레이라는 배교 후 일본 이름을 얻고 일본인 아내와 자식까지 두고 있었죠. 게다가 기독교의 허점을 비판하는 책까지 저술하고 있었습니다. 페레이라를 만나고서도 배교하기를 거부하는 로드리게스. 결국 이노우에는 페레이라를 배교하게 만든 고문을 사용합니다. 신자들을 거꾸로 매단 후, 목에 작은 상처를 내어 계속 피가 흐르게 하다가 결국 죽게 만드는 형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견디지 못한 로드리게스는 결국 성화가 그려진 석판을 밟게 됩니다.
그 순간...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신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이 정말 신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로드리게스의 내면에서 들려온 합리화의 목소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화를 밟아도 된다.’ ‘나는 괜찮다.’는 신의 응답을 들은 로드리게스는 석판을 밟고 나서 쓰러져 한참을 울었습니다. 아마 그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많은 사람들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가르페를 비롯한 많은 얼굴들이 기억이 났을 겁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라면 왜 그동안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도 들었을 것이고요...
이후 로드리게스는 철저히 일본인으로서 살아갑니다. 페레이라가 그랬듯 죽은 한 일본인의 이름과 그의 아내와 자식까지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배교를 확인하는 관군이 집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감시는 계속되었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일본인으로 살았습니다. 죽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로드리게스의 아내는 남편을 이 세상에서 보내며 일본의 전통대로 작은 칼을 흰 수건에 싸 손에 쥐어줍니다. 장례 또한 불교식으로 치러집니다. 하지만... 불길에 휩싸이고 있는 그의 주검의 손에 쥐어진 십자가가 클로즈업됩니다. 그의 아내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남편으로 살았던 한 이방인을 보내며 몰래 쥐어준 십자가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영화는 끝이 나게 됩니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 <사일런스>에 ‘침묵이 부재는 아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불빛 역시 어둠을 밝힌다.’고 평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침묵한다고 하여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없었던 것도 아니지요. 로드리게스는 응답하지 않는 신을 찾으며 고난을 이겨내려 했지만, 그 고난에 굴복해 신을 부정하는 순간에서야 신의 응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신은 ‘네가 고통받는 순간순간 함께 있었다.’고 하며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토모기 마을의 모키치가 죽는 그 순간에도 침묵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 그리고 관군에 잡혀가기 직전,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로드리게스의 경험. 신은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모든 슬픔과 고난을 함께 했다는 상징적인 장면인 겁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로드리게스의 손에 쥐어진 십자가 또한 부재가 아닌 존재를 상징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단순히 종교영화로만 분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담고 있는 그릇은 종교이지만 종교를 뛰어넘어, 사람 사는 사회를 담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면 그 행위가 의미 없다고 치부하곤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돌아오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영화에 나온 과거 존재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당한 죽음과 고난이 과연 의미 없는 것이었나요? 한국에서도 있었던 천주교 박해를 떠올려보죠. 결국 그들에게 종교를 가질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멀지 않은 과거인 4˙19 혁명이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혁명은 어떤가요?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전처럼 권력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거나 희생되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고요. 이런 것들을 본다면 이 영화 <사일런스>는 종교 영화라는 카테고리에 가둬놓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 돌아오니 세월호 인양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이 영화와 세월호가 자꾸 연계되어 생각이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세월호는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과 슬픔을 가져다준 사건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사망했음에도 우리 개개인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직도 찾지 못한 탑승자가 최소 아홉입니다. 시간은 만 3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며칠 전에서야 배를 건질 수 있었죠. 여전히 세월호는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아픔이자 슬픔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같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큰 슬픔에 생활이 지속되지 않아 그 슬픔을 외면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저 또한 그랬노라 고백합니다. 계속 세월호 소식만 접하다 보니 눈물샘이 터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의도적으로 그 소식을 접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저만 그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실제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저와 비슷하게 너무 힘들어서 세월호 소식을 회피했노라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세월호에 대해 침묵한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에 대해 모두 다 잊고 지내진 않았습니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그 세월을 지내왔을 겁니다. 그리고 지난 11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터졌을 때, 사람들은 그 부채의식을 가지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왔을 때 언급되었던 것 중 하나가 세월호 아니었던가요. 세월호 일곱 시간은 대통령 탄핵 사유 중 하나이기도 했고요.
물론 유가족 분들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이 포기하지 않고 지난 시간 싸워주신 것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특조위 활동에 제동이 걸리고, 유의미한 결과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지만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진실 규명을 주장해오셨기에, 지금 이 순간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박근혜 씨의 세월호 일곱 시간에 대한 의혹은 조금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세월호는 뭍으로 올라오고 있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양 작업 중 미수습자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대한민국 전역에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침묵을 통해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를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우고자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진실은 끝끝내 밝혀질 것입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그 진실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