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물에 세수하고 계란 프라이를 먹던, 이제는 마음으로만 걷는 산길
엄마와 아버지가 전부이던 어린 시절.
그저 보는 대로 느끼고 행동했던 나의 어린 시절.
짧았기에 더 소중했던, 돌아가고 싶은 나의 소중한 어린 시절.
우리의 일요일 아침은 언제나 엄마의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일어나서 산에 가자."
더 자고 싶었지만, 엄마의 재촉에 우리 세 자매는 일어나서 산에 갈 채비를 했다.
일요일 아침마다 우리 다섯 식구는 늘 우이동 산을 찾았었다.
두 시간 남짓 산행, 걷는 내내 우리는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다정하게 조언해 주시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었다.
그리고 산 중간에 흐르는 냇가에서 세수를 했었다.
겨울이면 얼음물에 진저리를 쳤지만,
우리들은 엄마가 돌 밑에 숨겨놓은 비누로 세수를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산 중턱으로 계속 올라가면 자그마한 암자가 나온다.
그곳으로 가면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 절을 올렸었다.
꼭 불교 신자는 아니더라도 한 주를 잘 보낸 감사 인사를 하고,
다음 주를 잘 보내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절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셨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차디찬 물이 짜릿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
우린 또 한 번 재잘대며 신나게 산을 내려갔었다.
내려오는 길에 산 입구 쪽의 해장국 집으로 가서 부모님은 커피를 드시고,
우리에겐 계란프라이를 사주셨었다.
우리는 고소한 계란프라이를 먹으며 가끔 부모님의 커피도 한 모금씩 맛보고,
재잘거리며 일요일 아침을 시작했다.
1970년대 초중반은 한국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우리는 가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유하다고 할 수 없었던 평범한 집이었다.
그 시절 계란프라이는 지금보다 훨씬 귀하고 특별했다.
산중턱에 퍼져 있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배가 고팠고,
그 맛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또 재잘대며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그 힘으로 일주일을 재밌게 보낼 수 있었다.
많은 날들이 그렇게 그립게 흘러갔었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는 나의 11세 생일을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산에 갔지만, 더 이상 냇가에서 세수도 안 했고,
엄마가 숨겨놓은 비누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후의 산행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느낌이었다.
그마저도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점점 멀어져 아버지 혼자 가시게 되셨다.
이제는 아버지마저 떠나셨고, 두 분을 향한 그리움은 해가 갈수록 더욱 깊어진다.
오늘 아침 계란프라이를 먹으며 그 일요일 아침이 떠올랐다.
우이동 계곡에서 언니들과 나의 재잘거림과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
아버지의 따뜻한 얼굴, 깊은 산속의 냇물 소리,
그리고 이제는 그립기만 한 다섯 식구의 웃음소리...
그 시절 나는 '행복'이라고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때가 내 삶의 가장 따뜻한 봄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