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 정원에서 만난 겨울 꽃의 향기
지루했던 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고맙게도 이번 겨울은 두툼한 외투나 패딩 입을 일이 거의 없었다. 겨울에 한 번씩 내리는 큰 눈도 없어서, 스노우 타이어 대신에 와이퍼를 교체해 주고 외출 시 우산을 챙기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2월 말부터 나도 모르는 봄의 훈풍이 벚꽃 봉오리를 만들었다.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애써 외면했지만 어제 공원에서는 제법 피고 있는 꽃들을 봤다. 따뜻한 햇살 덕분에 모두들 나와서 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봄 뒤에는 떠나기 아쉬운 겨울의 심술이 새로 나오는 생명을 힘들게 하기 마련인데, 이번 겨울은 그런 힘마저 못 쓰고 앞으로 이주 동안 비를 예고하고 서둘러 떠날 것 같다. 비가 내리는 게 일상인 밴쿠버는 낮게 드리운 회색 하늘이 사람을 차분하고 사색에 빠지게 하지만, 보름 이상 햇살 없는 날씨는 사람을 너무 처지게 만든다.
우울한 겨울의 긴 복도를 걸어가던 어느 날 복도 끝자락에서 향기를 가득 풍기는 식물을 만났다. 이 향기는 나를 호기심으로 끌어당겼다. 한겨울 회색 하늘 한가운데 요양원 복도 끝에서 이토록 차가운 코끝을 감싸는 신선한 냄새라니! 그 순간 나는 싱싱한 생선처럼 튀어 올라 흥분해서 '뭐지?' 하고 찾아봤다. 누군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바깥정원에서 나는 향기로운 내음이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보니 빗물에 싱싱하고 푸르게 올라온 수많은 가지 사이에 하얀 깨알처럼 뭉쳐있는 꽃이 살며시 수줍게 나를 바라봤다. 겨울이라 아무도 가꾸지 않는 그 정원에서 비바람을 뚫고 군락을 이룬 사르코코카(Sarcococca)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줍은 얼굴과는 달리, 녀석은 강렬한 향기를 앞세워 '나 여기 있소, 나 좀 보시오!'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바닐라와 머스크 향이 묵직하고 강하게 그 정원의 습한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먼지 같고 깨알 같은 그 조그만 꽃에서 그런 강한 향이 나오다니 놀라웠다. 푸르고 단단한 줄기에서 생명의 끈질김과 경이를 보며 요양원의 시들고 있는 생명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비루한 육신을 빌려 음식을 요구하고 배설을 하며, 살아있음을 처절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모습은 달라도 그것은 모두 생존을 향한 치열한 아우성이었다. 생명이란 이토록 다른 얼굴로 우리를 찾아와, 잠든 영혼을 끊임없이 깨우고 돌아보게 한다.
그 가지 몇 개를 꺾어서 직원 휴게실에 꽂아놨더니 기분 좋은 내음에 온 직원들이 환호를 했다. 요양원의 어두운 공기와 겨울의 무거움을 멀리 밀어 넣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곧 오게 될 봄의 새 생명의 향연을 조금 일찍 맛보는 기분이었다. 모두들 두세 줄기씩 꺾어 집으로 가지고 갔다.
나도 서너 줄기 가지고 와서 화병에 담아 신발장과 식탁에 놓았다. 이삼일에 한 번씩 화병에 물을 갈아 주면 그 보답으로 집 안을 가득 채우는 향기에 감탄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향기는 사라졌지만 꽃은 남아있고 잎사귀의 짙은 초록색은 내 마음까지 싱싱하게 한다. 내 마음의 거울을 닦듯이 물을 갈아주며 정성을 쏟는다. 조용히 줄기를 바라보며 하얀 수염처럼 나올 뿌리를 기다린다. 새로운 뿌리가 나오면 화분에 옮겨 내년 겨울에 새로운 생명으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나를 통해 보는 화초가 다시 좋은 향기를 세상에 뿌리는 경이로움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