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3일 출근길
늦은 새벽의 푸르스름한 환함이 하늘에 깔려 있다. 거리는 훤하다. 가로등은 아직 켜져서 흐린 안개 빛에 번져 보이고 차량의 조명 빛도 희끄무레하게 서늘함을 만들었다. 사람들마저 몇몇 없어 괴괴한 느낌이다.
7시 24분. 갑자기 가로등이 꺼졌다. 지상은 일순 어둑어둑 해지더니 서서히 밝아졌다. 들이쉬는 공기는 여전히 찹찹했다. 하늘은 짙푸르게 바뀌고 동녘에는 아직 어떤 밝음도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도 한산했다. ◇◇초등학교 버스는 7시 30분에 이곳을 거쳐간다. 아직 5분의 시간이 남아있다. 이맘 때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남녀 학생 둘이 나타난다. 오늘은 여학생이 먼저 보였다. 사거리 언저리에서 문득 나타나 스쿨버스가 서는 위치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목 밑 길이의 더벅머리 단발에 반코트를 입었고 검은색 등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들었다. 여학생은 늘 혼자 다녔다.
'어린 나이인데 의젓하네…’
어느새 남학생이 뒤이어 나타나 정거장에 섰다. 남학생의 복색은 여학생과 비슷했다. 남학생은 발을 모으고 두 손으로 등가방 어깨끈을 감아 잡고 차려 자세로 섰다. 그는 자전거도로 경계에서 정거장 위치를 알려주려는 듯이 곧추서있었다. 여학생은 남자 뒤로 세 걸음쯤에 짝다리로 편하게 서있었다. 서로 인사는 없었다. 남학생이 길 건너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한 여자가 이쪽 정거장을 지나쳐 걸어가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파카 조끼에 운동복 차림이었다. 그녀는 마을 공원 쪽으로 방향을 꺾으며 걸어갔다.
버스 정거장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버스를 재촉하는 얼굴들이다. 정류장으로 낯익은 사람이 다가왔다. 덩치가 크고 얼굴도 컸다. 검은색 코트에 검은 신사 바지를 입었다. 머리는 짧게 붙였고 눈은 부리부리하고 콧등은 날카롭고 턱 주변이 거뭇거뭇했다.
'상남자야.'
그 사이 스쿨버스 정거장으로 두세 명이 더 왔는데 그중 한 아이는 자주 봐온 킥보드를 타는 아이였다. 아이 뒤로 엄마가 뒤따라와서는 아이는 줄을 서고 엄마는 킥보드를 건네 잡더니 구석으로 가서 섰다. 또 한 아이도 엄마와 함께 오더니 바로 손을 흔들며 엄마와 헤어졌다. 엄마는 사거리 쪽으로 되돌아 움직인 후 횡단보도를 지나 이쪽 정류장으로 왔다. 손가방을 메고 종이가방을 들고 코트에 청바지, 출근하는 모양새다.
사거리를 지나며 한 부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집 근처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부자였다. 아빠는 3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아이는 유치원생일까? 아빠는 진한 감색 모직코트를 입고 신사복 바지를 짧게 입었다. 단정한 머리모양새에 등가방을 멨다. 한 손에는 아이가방을 들었는데 팔을 ㄴ자로 해서 엉성하게 들었다.
'왜 편하게 옆구리에 붙이지 않는 거지?'
뭔가 지저분하거나 해서 몸에 붙이기 싫은 것을 들게 될 때 취하는 자세였다. 아이는 모자 달린 중간길이 점퍼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들은 얼마 전 보았을 때도 의아스러웠는데 오늘도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남자는 서둘러 앞서고 아이는 뒤따르기 싫은 듯 느그적 느그적 걸었다. 아빠는 마치 아이를 떼어내려는 듯이 걸었고 아이는 뒤처지다가 뒤뚱뒤뚱 뛰어가며 보조 맞추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아이는 타악 타악 걷고 아빠는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아빠의 걸음은 빨라서 금세 아이는 뒤처졌다.
"어서, 어서 와."
탁탁탁탁 탁탁탁탁. 아이가 뛰었다. 둘이 손을 잡고 버스 정거장을 지나갔다. 아빠가 허리를 꺾고 고개를 수그리더니 아이에게 말을 건네고 아이는 듣는 듯했다.
‘무슨 얘기를 했을까?’
이번에는 서로 보조를 맞추듯이 그렇게 수 십 미터를 걸어갔다. 다음 정거장을 넘어 안 보일 때까지. 정겹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모습에 한 동안 눈길을 두었다.
○○○번 버스가 사거리 앞에 섰다. 길 건너 학생은 어느새 여덟 명으로 늘었다. 스쿨버스가 오고 학생들이 손을 흔들며 타고 버스가 움직였다. 학부모들도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며 흩어졌다. 이때 버스의 중간쯤 버스 안 쪽 커튼 끄트머리가 살짝 들쳐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 정류장에 엄마로 보였던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내 눈에는 커튼 뒤 어둠과 학생이 구별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번 버스를 타고 맨 뒷좌석에 앉았다. 낯익은 남자도 뒷좌석에 앉더니 더운지 외투를 벗었다. 세로줄이 가늘게 새겨진 단출한 셔츠가 드러났다. 올 겨울이 기온 관측이래 가장 따뜻하다는 전광판 뉴스를 보며 돌곶이역으로 향했다.
누구는 일터로, 누구는 집터로, 누구는 배움터로, 모두들 어둑함을 헤치고 노동하러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