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 출근길
올 겨울 들어 처음 목도리를 꺼내 둘렀다. 지난주에는 봄 같은 날씨이더니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비도 적지 않게 왔었다. 삼척시에는 비가 이틀 동안 200밀리 이상 내리고 강릉에서는 오히려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기상현상들이 이어지고 지구가 바뀌고 있다는 뉴스였다. 이번주는 최대 한파가 예상된다는 뉴스가 며칠 동안 이어졌다.
오늘 날씨는 영하 12.4도씨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람은 없어 체감온도도 같다. 집을 나서며 내게 닿는 공기가 생각만큼 차갑지는 않았다. 공기를 코로 들이켤 때 콧구멍이 어는 느낌으로 시작해서 목구멍까지 써늘하게 만드는 그런 추위는 아니었다. 그래도 몇 걸음을 걸어가니 몸 앞부분이 다리부터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이는 찬 기운은 선뜻선뜻하니 나쁘지 않았다.
정류장으로 가며 보이는 사람들은 강추위를 잘 준비한 모습들이었다. 추위에 웅그린 사람은 십여 명 중에 한 사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무릎길이의 파카를 입고 어깨를 반듯이 펴고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은 자세로 걷고 있었다.
'추위를 이기는 거, 어렵지 않아요!'
붉은색 파카를 입은 여자가 앞서가고 있었다. 무릎길이의 오리털 파카를 입고 니트모자를 쓰고 뒤뚱뒤뚱 엉성한 걸음새로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며 쳐다본 여자의 옆얼굴은 늙은 모습이었지만 추위 때문에 경직된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릎보다 길거나 짧은 길이의 모자 달린 오리털 파카를 입었다. 여전히 롱패딩을 많이 입는다. 그렇다고 모자를 쓰고 있지는 않았다. 모자를 쓴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안으로 후드티를 덧입고 후드를 쓴 모습도 있었다. 이런 방한복들은 언제 마련한 걸 까. 모두들 하나 정도씩은 가지고 있었던 게다. 개 중에는 손으로 귀를 덮고 추위를 이겨내려는 사람도 있긴 있었다.
신당역에서 내렸다. 앞서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시꺼멓다. 여기도 대부분 모자 달린 파카를 입고 있었다. 추위에도 장갑을 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주 오는 사람 중에 넥타이를 한 정장 위에 모직코트를 입은 신사가 한 명 보이기도 했다. 볼과 귀가 벌겋게 보였다. 냉기가 피부에 달라붙은 듯. 내 옆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앞서가는 한 남자는 오리털코트에 귀덮개를 하고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또 한 남자는 등산용 외투에 등산용 각진 모자를 쓰고 배낭을 메고 장갑을 꼈다. 출근하는 것일까 산으로 가는 것일 까. 이런 중년의 전통 복장이 몇몇 보이는 아침이었다. 사람들의 복장을 보면 추운 겨울을 지내기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오리털파카 하나만 걸치면 되는 편리함 때문이다.
진부할 수도 있는데 이런 질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롱패딩 하나에 오리가 몇 마리 필요할까?'
휴대전화에 '패딩 몇 마리'라고 검색해 보았다. '비건 패션'을 추구하는 한 업체의 2022년 인터뷰 기사가 떴다. ‘비건 패션’은 살아있는 동물의 털을 뽑거나 가죽을 벗겨내 옷을 만드는 행위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크루얼티 프리(cruelty-free·동물 학대나 착취가 없는)와 재활용 원료 활용 등을 통해 지속 가능성을 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내에는 2020년부터 수입·판매 중인데, '지난 10년간 패딩 재킷 500만 벌을 판매했고 이를 통해 2000만 마리 이상의 오리를 살렸다'는 인터뷰였다. 이 업체에 대한 올해 기사도 있었는데 매출이 전년 대비 40퍼센트 증가했다는 것과 기능성 소재를 사용해서 약 28마리의 오리를 구한다는 뉴스였다. 오리털 사용에 대한 비판 기사는 2017년에서 2018년에 주로 집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가 논란의 시작 시점인 듯하다.
2019년도 한 기사는 '최근 몇 년간 롱패딩 열풍이 이어졌지만, 올해는 20대에서 30대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짧은 기장의 숏패딩이 유행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었다. 올 겨울에는 더 짧고 화려해진 숏패딩이 유행할 거라는 최근 기사도 있었다. 이 기사에는 '윤리적 다운 인증(RDS)을 받은 구스 다운 충전재'를 사용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패션 유행은 숏패딩, 강추위에는 롱패딩. 오리는 계속 죽어나겠군…’
애니멀 프리(animal-free·동물성 원료 배제)는 경쟁적 산업구조 앞에서 속수무책일 뿐이다.
열차를 타고 가는 중에 내 앞 오른쪽에 앉은 한 여자의 통화소리가 흐리게 들렸다.
"… 달려 있는 거 입어."
"뭐 하는 건데…!”
"옷 다 말랐다 구…”
여자는 탁! 전화기를 덮고 한숨을 쉬었다. 통화한 상대는 강추위 때문에 여자가 급하게 준비한 옷이 맘에 들지 않은 것일 까. 여자는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털 코트에 가죽가방과 롱부츠까지 그럴싸하게 차려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