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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의 동심을 지켜주었으면

12월 24일 출근길

by 박유재

눈이 왔다. 올해 첫눈이다.


밤새 내린 눈은 1센티 정도였다. 이른 새벽이 부산했는지 눈길은 눈발자국으로 변해 있었다.

'아쉽다'

내 앞으로 모녀가 앞서가고 있었다. 킥보드를 타는 아이였다. 오늘도 킥보드를 타고 있다. 사거리로 가는 길 중간에는 옆길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끄트머리에는 십여 미터 경사길이 있다.

"… 미끄럽겠다."

엄마가 말했다.

"응, 저 앞은 위험한 곳이야."

아이는 엄마의 걱정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모녀는 중간의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으로 내려가 뒤쪽에 있는 횡단보도로 향했다. 그들은 얼마간 돌아가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

사거리 앞에 섰다. 사거리 귀퉁이는 5미터 정도로 눈이 치워져 있었다. 염화칼슘도 뿌려져 있었다. ○○○번 버스가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옳지! 시작이 좋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버스가 움직였다. 버스의 직진 신호 뒤에 보행신호가 켜지는데 눈구경을 하다가 그만 버스가 먼저라는 생각을 못하고 말았다.

사거리를 건넜다. 차도는 눈이 녹아 사라지고 물로 변해 바닥에 흥건했다. 군데군데 눈과 함께 미처 녹지 못한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사거리를 쳐다봤다. 사거리 너머 모퉁이에서 검은 파카와 조거 팬츠를 입은 한 학생이 발돋움질하는 것이 보였다. 제자리 뛰기를 네다섯 번 하더니 신호등이 바뀌자 사거리를 건넌 후 마을공원으로 걸어갔다. 인근 초등학교로 가는 듯했다. 소년은 마을공원 초입에서 다시 돋움 질을 했다. 발자국이 없는 눈길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듯. 한 번 뛰더니 다음은 약간 뒤로해서 발끝을 모으고 뛰었다. 그다음은 또 약간 뒤로 발끝을 벌리고 뛰었다. 네 번째는 발끝을 더 벌리고 뛰었다. 눈 위에 만들어진 모양을 잠깐 본 후 발길을 옮겼다.

'어린아이의 동심인가…'

학생이 지나간 뒤로 현수막이 보였다. 벌써 한 참 전부터 매달려 있던 현수막이었다.

'공원 내 노점상 및 상행위 금지'

글자가 큼지막하게 보였고 그 아래로 위반 시 관련 규정에 따라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문구와 신고를 할 수 있는 연락처가 쓰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장사를 했던 푸드트럭은 그 후로 사거리 건너편에서 장사를 했었다.

현수막 뒤로 한 사람이 대빗자루로 보도의 눈을 쓸고 있었다. 바로 옆 교회부터 시작된 눈 청소였다. 눈을 청소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봤다.

버스를 타고 다음 사거리를 지났다. 길가를 보며 좀 더 가다 보니 좁은 골목 어귀에서 두 남자가 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 주변을 빠르게 살펴보았는데 눈을 치우는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가 필요 없는 돋움 질, 빗질…’

완만한 고개를 넘어가며 길 건너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길에 휘청휘청하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는 불안스러운 걸음새였다.

지하철 입구에 왔다. 계단에는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어 눈이 얼음물처럼 바뀌었지만 조심조심 계단을 하나하나 걸어 내려갔다. 옆사람도 앞사람도 조심하는 모양새다. 중간까지 내려와서야 얼음물이 없어지고 바닥이 반지르르 물기만 있었다. 그제야 안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대합실에 내려오니 여기저기에 '미끄럼 주의' 글씨가 새겨진 무릎 높이의 A형 알림판이 세워져 있었다.


신당역 환승통로에는 오늘도 유도요원이 있었다. 이삼 개월 전 갑자기 나타난 유도요원. 형광조끼에 마스크를 쓰고 오늘은 털모자까지 썼다. 손에는 짧달막한 형광봉을 들고 있었다. 나이는 지긋해 보였다. 기둥에 붙어 형광봉을 건들건들 흔들며 승객들을 향해 '(에스컬레이터) 못 타요!'라고 소리쳤다. 아니, ‘소리 냈다’고 해야 정확하다. 계단으로 유도하려는 것일 게다. 승객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따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계단을 오른 곳에도 에스컬레이터를 오른 위에도 똑같은 복장의 늘그막 한 유도요원이 있었다. 승객들과 거리를 두고 벽이나 구석에 붙어 따로 노는 모양새다.

'최근 취업률 상승을 자랑한 모양이 고작 이거였군!'

열차를 탔다. 전광판에 모 공사의 청년주택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내일을 꿈꾸는 만 19세의 대학생', '일을 잘하고 싶은 내일을 꿈꾸는 만 21살의 신입사원', '창업을 준비하는', 역시 '내일을 꿈꾸는 만 34세의 창업인'들이 등장했다. 마무리 문구가 가관이다.

'대한민국 모든 청년이 주거 걱정 없이 마음 놓고 내일을 꿈꿀 수 있도록 청년의 삶을 응원합니다'

광고라는 게 그렇지만 '모든 청년'이란 문구는 우스꽝스럽고, 광고 속 청년들의 순진무구하고 해맑은 표정은 열차 속 승객들의 모습과 이질감이 컸다. 사이버틱하고 어두운 종말을 그리는, 영화 속 환상을 현혹하는 이미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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