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출근길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엊그제에 경영지원팀 직원 둘이 나를 찾아왔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와요."
"호호, 다음 주 말에 창립기념식 겸 워크숍 있잖아요?"
"응."
"이번 창립기념행사에는 근속 표창 직원이 많아서, 무대에 다 오르고 그러는 것보다 인터뷰를 보여 줄려구요."
"인터뷰? 나안 안 할래. 이 나이에… 무슨 인터뷰…"
"아이, 잘하실 거면서…"
다른 직원이 얘기했다.
"길지 않아요. 한 20초에서 30초 정도로 인터뷰하려구요. 내일모레 ◇◇◇으로 와 주시면 됩니다."
20초든 30초든 전 직원 앞에 큰 화면으로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민망하고 쑥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어쩌랴, 따라야지.
무슨 얘기를 할까?
언제 입사를 했는지, 왜 계열사를 옮기게 됐는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선배님들의 지도와 후배님들의 도움 때문이라고…
'상투적인데…'
회사에 대한 생각도 한 가지 얘기하자. 회사를 옮긴 후 전에 다녔던 회사나 이곳 동료들 한테도 공통된 질문을 받았었다.
"어디가 더 좋아요?"
나는 대부분의 경우, 어디나 장단점이 있다고, 비슷비슷하다고 얼버무렸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회피의 대답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일종의 커밍아웃처럼 얘기를 할까?
'지금 회사가 더 나아요!'라고. 큭큭.
인터뷰이지만 너무 무거우면 안 될 것 같으니 가벼운 우스개 소리를 하나 할까? 무얼 할까?
'하이, 에브리원~'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두 손을 가슴 앞 쪽으로 들고 손바닥을 펴서 흔들며 '하이, 에브리원~'이라고 시작하면, 나 같이 나이 든 사람이 하면 무거움이 좀 깨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정년까지 남은 시간은 4년 반.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희망한다는.
오늘 출근길은 따사롭다. 허벅지 아래가 금세 뜨듯 해졌다. 태양고도는 얼핏 보아 25도가 넘어 보였다. 앞서서 돌곶이역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건물들을 만나며 꺾였다.
지하철 출입구에 못 미쳐 골목 입구에 산** 자동차가 섰다. 차에서 두 젊은 여자가 내리고 차 안의 운전수한테 인사를 했다. 운전수는 나이가 지긋하니 초로의 모습이었다.
'딸들인가?'
운전수의 상의는 면티였다. 출근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퇴직 후의 한가한 아침에 장성한 두 딸을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는 것은 아닐까?
열차를 탔다. 이제 해 보자. 타이머를 켜고 소리 없이 입으로만 연습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30년 차를 보내고 있는 ○○○입니다.
30년을 보내는 지금, 감회가 남다른 데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간 만났던 선배님들과 후배님들의 지도와 지원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1993년 12월에 ◇◇건설로 입사했습니다. 건물을 짓는, 특히 집을 짓는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건설회사로 입사했었습니다. 통산 3,800세대를 짓는데 일조했고요, 아쉬운 점은 저는 그 아파트들에 입주를 못했다는 것입니다(웃음)…"
'너무 길다.'
과거보다 미래에 대해 얘기하자.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자.
"과거는 생략하고 미래에 대해 한 말씀드리자면, 정년까지 사오 년 남은 시간을 잘 보내서 유종의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길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30초뿐이다.
'어렵다…'
인터뷰를 했다. 햇빛이 잘 드는 로비에서 햇살을 뒤로하고 줄 마이크를 착용했다.
"편집할 거니까 자연스럽게, 편하게 해 주시면 돼요."
경영지원팀 직원이 친절하게 몇 가지 질문을 해주었고 나는 간단 간단하게 답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지만, 결국은 자기소개와 감사의 말을 했고, 조금 더 얘기해 보라고 해서 '남은 시간 잘 보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습니다. 많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는 얘기를 하며 끝냈다.
'남은 시간 잘 보냈으면…'
이제는 내려오는 시기다. 약해지고 작아져, 그래서 응원이 필요한 시간이 다가옴을 이제야 실감하게 된다. 내 마음속에 이것저것 축약하고 버린 후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사사롭고 소박한 소망이었다.